상단여백
HOME 칼럼 시사비평 김진호 칼럼
섣부른 대형개발사업, 서민의 욕망을 볼모로 하다[시사비평-김진호]

   
▲ 용산국제업무지구 조감도
최근 우리는 연일 토건자본과 국가기구가 공모하여(?) 벌인 대형사고들을 본다. 이들 건설프로젝트들의 비용이 수십조 원에 이른다. ‘건국 이래 최대’ ‘단군 이래 최대’ 등의 수사가 동원되었다. 이 정도 사업이라면, 긴 시간 숙고에 숙고를 거쳐 기획하여야 할 일이다. 규모가 큰 만큼 장기간에 걸친 검토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좋은 상황만을 고려하여 기획안을 만드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문제가 발생할 것에 대한 대비책 또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만약 예상 밖의 사태가 생긴다면 기업도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고 국가 또한 대재난을 맞이할 수 있다. 아니 그 파급력은 그 이상일 수 있다. 현대사회의 내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위험사회’적 요소는 하나의 시스템 혹은 사업이 다른 영역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나아가 국경을 넘어서까지 긴밀하게 엮인 체계적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 이론의 문제의식에 따르면 사업의 규모가 몇십조 원이라는 것만으로 그 재앙의 규모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최대 경제규모의 제국 미국을 일거에 위기에 빠뜨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보라. 그것은 이 주택담보대출 제도의 관련자만이 아니라, 미국 전체. 나아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의 경제위기로 이어졌다. 그러니 대형 개발사업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면 기획에 관여한 기업의 임원이나 정부기관의 관료는 엄중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이 위기,  날아간 로또의 꿈

그런데 과연 그런가? 최근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이 위기에 처했고, 개발사업권을 가진 용산역세권개발주식회사의 경영권을 쥔 삼성이 포기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31조 원이나 되는 초대형 개발사업이 이렇게 좌초위기에 빠지게 되자 서울시와 코레일, 삼성물산 간의 책임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서로 논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사업 추진상의 허점들이 하나둘이 아닌 듯이 보인다.

아무튼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많은 주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그리고 필경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는 점점 심각해질 것이다. 또한 개발사업이 정말로 좌초한다면 그 피해는 주민에 한정되지 않는다. 서울 시민 전체가 그 실패의 부담을 짊어져야 할 것이고, 서울의 위기는 전 국민의 위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까지의 다른 실패한 사업들을 통해 유추해본다면 책임자는 기능상의 역할을 했던 중하급 관료나 임원의 몫이 될 것이다. 사실상 책임질 자 없는 채 피해만 양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도대체 안전장치도 없이 이렇게 대형 사업을 벌이는 것은 무슨 배포인가. 아니 실은 그이들의 심사 속에는 안전망이 있었다. 주민에게 피해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거래는 없었어도 수십 배나 오른 부동산 가치를 보며 무모한 망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아니 있었다. 살다보니 이런 로또식 횡재가 있나보다 하며 잠시 무모한 꿈을 꾸기도 했겠다. 근데 그런 일은 개발업자들에게 수백 배 초과이윤이 남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그런 엄청난 자산 ‘뻥튀기’가 가능하려면 거대한 거품을 상정해야 한다. 그러니 이 거대한 거품이 발생하는 순간 그 부작용이 어딘가에선 혹은 언젠가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을 예상해야 하지만, 눈앞에 벌어지는 수십 배 횡재의 순간을 외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국가와 자본이 그러한 허망한 꿈을 부추기는 데 앞장선 탓에 많은 사람들은 영혼을 빼앗겼다. 이웃 간에 싸움이 잦아졌고, 무모한 은행거래에 발을 들여놓은 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꿈이 수포였고, 현실은 그 잠시의 꿈에 혹독한 보복을 가한다. 모든 책임은 이런 맹랑한 꿈을 꾼 주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와 자본이 생각하는 안정장치다.

CEO형 지도자는 공공성의 대변자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국가, 지자체, 그밖의 온갖 공공기관의 책임자의 자질로 CEO형 리더십이 회자되었다. 그런데 CEO형 지도자는 공공성의 대변자가 아니다. 그들의 과제는 자신이 책임 맡은 영역의 ‘총량적 재산증식’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은 많은 경우 불가피한 손실일 뿐이다. 즉 희생을 위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그것이 CEO적 리더십의 속성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배려하는 사회’라는 공공적 문제의식은 부차적인 것이 되거나 고려할 필요 없는 것이 된다.

더구나 한국형 CEO의 특징인 이른바 무대뽀적 목표 지상주의가 최근의 대형개발사업들의 중요한 기조를 이루고 있다. 공공성이 없는, 총량적 자산증식의 사업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배려를 상실한 체제가 점점 더 깊게 뿌리 밖힌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

다윗은 성전 건설이라는 당시로선 커다란 국가건설사업을 도모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의 시조인 여로보암 왕도 북쪽과 남쪽 끝에 국가제단을 건설하려는 대형국책사업을 시행했다. 고대국가가 성립하고 발전적으로 전개되는 데 있어 종교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에 건설하는 것이나 영토의 양 극단에 건설하려는 국가제의의 장소는 왕의 입장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업임에 분명하다.

한데 성서는 이 두 사례에 대해 하느님의 분노와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하느님의 태도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어쩌면 그러한 국가적 개발사업이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 채 벌어졌을 때 발생할 위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기초한 비평인지 모른다. 체급이 맞지 않는 욕망은 백성을, 국민을, 시민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나라는 더 이상 민주국가가 아니다. 나아가 하느님은 그런 나라를 만든 자들, 그 최고 책임자의 죄를 감면하지 않았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김진호의 다른기사 보기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