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성, 한국교회의 가장 긍정적 측면
-친일문제, "인정하고 참회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못 하는지 모르겠다"

2010년 8월 29일은 한일병탄 100년을 맞는 날이다. 조광 이냐시오(65)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민족사학계의 대표 학자이며 평신도로서 드물게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도 힘써왔다. 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지난 5월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밝히는 양쪽 지식인들의 공동성명에 참여한 조광 교수는 이번 8월 31일, 정년퇴임을 맞는다.

정년퇴임을 단 며칠 앞두고 연구실 정리에 한창이던 그를 만나 퇴임을 앞둔 소회와 한국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연구실은 대부분의 짐이 정리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송고할 원고를 고치느라 분주해보였다. 입장이 다른 일본 학자들과 한일병탄이 불법임을 선언하는 과정이 꽤나 힘겹고 지난했을 텐데, 담담하고 편안해 보였다.

한때 사제가 되기 위해 가톨릭대학을 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역사학자로 진로를 변경하게 되었나?  

가톨릭대 4년을 마치고, 학교에서 교회사 공부를 권해서 고려대 사학과에 오게 됐다. 나 역시도 역사공부를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 부터 관심이 많았고 논문을 써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대신학교 시절, 교회사 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조직해서 회장을 지냈고, 그 자료들을 모아서 책을 내기도 했다. ‘교회사 연구지’라는 이름이었는데 66년 즈음이니 꽤 오랜 이야기다. 가톨릭대학을 그만두고 고대 사학과 편입학을 했는데, 1년쯤 공부하고 학사졸업장이 있으니 대학원으로 바로 진학했다.

역사에 대한 매력 때문에 사제의 길을 포기한 것인지? 어떤 계기가 있었나?

그건 별로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않은 부분인데...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이 나에게 아주 큰 충격이었다. 그 당시는 교회에도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 들어올 때였다. 교회의 사회적 참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그 사건이 났다. 같은 동료들에게 물어봤더니 그저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는데... 나에겐 그 일이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역사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공부를 하고 있기도 했고. 역사를 통해서 변화에 대한 인식, 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창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마음을 굳히고 신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해서 한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원하던 바를 달성하셨나?

그저 그렇다. 삶이란 게 의미를 부여하자면 한 없고 그렇지 않으면 다 평범한 것 아닌가. (웃음)
교회사를 40년 정도 연구한 셈이다. 사실, 주전공은 조선근대사다. 교회사 관련해서는 재작년 대학원에서 처음 강의했다. 논문도 교회사 관련해서는 삼분의 일정도로 가끔 쓰는 셈이다. 일반 잡지에 글을 많이 실었다. 정년을 계기로 그간 못 냈던 책을 올해 8권 정도 낸다. 내일 모레 출판기념회인데 3권이 아직 교정이 안 끝났다.

수년에 걸쳐 <경향잡지> 기고했던 연재글도 좋았는데 책으로 나오는지 궁금하다.

그건 아직 계획에 없다. 그것도 교회사 책 관련해서 꽤 오래 연재했는데 모으면 한 권 분량정도 될 것이다. 이걸 책으로 내려면 각주를 달아야 한다. 지금도 그 정리를 하고 있는데 지금 준비중인 것 외에 3권을 더 내야 하는데 일이 밀려 큰일이다.

한국교회 변혁과 역동성에 주목
한국교회는 자발적 민중과 함께 하면서 민중종교로 변화
대군대부이신 하느님, 한국적 유교문화와의 결합 중요


한국 교회사에서 최근에 더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 조광 교수는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와 천주교 신앙이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사진/한상봉 기자)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자체가 역동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조선의 사회적 특성과 관련해서 교회가 들어오는 형태가 상당히 변동적이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에 대해 그 당시 우리 문화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조선사회 사상에는 크게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의리를 중시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것. 또 하나는 변례(變例)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보는 사상적 배경이다. 이것은 남인의 사상인데 변례를 허용함으로써 변혁에 능했고 천주학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천주교가 철저하게 민중종교화 된 것이다.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민중종교운동으로 변했다. 그것은 기존 가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대체하는 가치체계를 부여하는 움직임이었다. 이것이 당시의 시대상이었다.

이것에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민중들이 천주교에 접근한 것이다. 천주교는 왕조입장에서는 최고급 지식인과 무지랭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었고, 우리 역사에서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현상이다. 지배층은 그들만의 결속과 윤리가 있는데 이를 어긴 것이 천주교도였다. 지배층과 민중의 결합 현상, 그 중심에 천주교 신앙이 있었다. 신앙은 종교적 이념뿐만 아니라 사회적 복음으로 작용한다. 평등과 같은. 그 당시는 평등을 추구하던 때였다.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했던 자발성, 순교자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66년 박해 때 순교자가 많았는데 그 동력이 무엇이었나? 성사의 힘도 있었겠지만 우리 문화의 힘도 있었다. 모든 계층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은 우리 문화가 가진 역동적 측면이고 한국교회의 특징이다.

당시 순교자들이 많았던 맥락은 우리 문화안에 ‘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들도 의병을 일으키고 농민도 동원했는데, 당시 농민을 전쟁으로 이끈 것은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비난받지 않았다는 것은 의를 위해 죽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교문화가 가진 큰 특징이다.

당시 신자들은 하느님을 우리식으로 공경했는데 이것은 탁월한 해석이다. 대군대부(大君大夫)인 하느님. 임금과 아비에 대한 충효의 가치에 따르면 하느님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었다. 그러한 문화가 우리의 순교를 촉진시켰다. 한국교회의 순교는 순수 신앙이라기 보다 신앙과 우리 문화의 요소가 합쳐진 결과다. 신앙만으로 목숨을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문화의 강점을 최대한 살렸다는 것이 우리 교회가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신앙의 자발적 수용과 실천, 그 중심에 한국 문화가 있다 

우리 신앙선조들은 책으로 신앙을 배웠다.
그래서 더 근본적인 평등주의로 갈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영향을 미쳤다면, 지배자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건강한 모습, 한국교회를 살리는 힘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앞서 말했던 자발성이다. 스스로 탐구하는 힘, 이것은 한국의 고유한 문화가 준 힘이다. 교회, 신앙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그런 모습이 퇴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선교사들로 인해 퇴보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교회가 바뀐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우리 신앙선조들은 책으로 신앙을 배웠다. 그래서 더 근본적으로 갈 수 있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다 같은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영향을 미쳤다면, ‘종교적 평등과 실제는 다르다. 지배자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사회질서를 강조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렇지 않았지만. 그러나 종교는 어느 사회나 유지와 개혁의 기능을 모두 한다. 그 중 유지의 기능을 선교사들이 했다고 볼 수 있다.

1850년대 최양업 신부의 편지를 보면, 주교에게 양반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내용을 전한다. 그 당시 교회는 질서유지의 경험이 있어서 질서유지에 협조했다. 반면 직접 민중을 접했던 최양업 신부는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초기교회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동력은 지배층에는 약화되고 민중 속에서 지속된 것이다. 그것은 변함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학자 입장에서 볼 때, 말씀하신 교회의 긍정적 부분에 반해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평신도의 무한한 저력을 존중하고 양성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더 노력해야 한다. 교도권, 신자들 자신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 교회문제는 신자들 책임도 있다. 오히려 신자들이 그렇게 만든 부분도 있다. 박해 때, 선교사들이 순교했던 것은 우리 신자들이 그렇게 만든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보고 배우는 것이다.

아무리 선교사들이 19세기의 낭만주의 세례를 받고, 한국에서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을 어떤 로망으로 생각했다고 해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겠나. 그런데 신자들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혼자 살수 있나. 체면 때문에라도 죽을 수 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성직자와 신자를 구분해서 우리는 잘하고 그들은 못한다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신자들의 일부분이 성직자들을 그렇게 만들고 교회의 어두운 부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에 공동책임을 느껴야 함께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본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업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어떻게 생각하나?

교회안에 있는 신자들 역시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의식수준이 그와 같기 때문일 수 있다. 교회는 신자들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곳곳에 작은 희망의 불씨들이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

다른 돌파구나 실마리는?

성직자들에게 요구해서 될 것이 아니다.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발휘되도록 만드는 사회적 환경도 중요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족감, 자만심이 충만하다. 그것은 대단한 걸림돌이다. 그것을 극복하고 겸손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원래 교회 이야기는 잘 안하는데... 그냥 보고 있다.(웃음) 참여관찰의 차원도 있는 것이고 내부의 노력, 외부의 영향 모두 다 중요하다.

전쟁과 식민상황이 좀 다르다. 
전쟁/침략상황이면 적(敵)과 아(我)가 분명해서 부역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식민상황에서는 식민주의가 문화가 되면서 적과 아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조광 교수의 저작들, 조광 교수는 향후 후학들을 위해 한문 자료들 주석 작업을 할 생각이다.

교회의 친일 문제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내가 노기남 대주교였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본다.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과 식민상황이 좀 다르다. ‘부역’이라는 것을 볼 때, 전쟁/침략상황이면 적(敵)과 아(我)가 분명해서 부역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식민상황에서는 식민주의 자체가 문화가 되고 그 속에서 생활을 한다. 그 경우 적과 아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식민문화가 형성되고, 사람들은 거기에 젖어 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은 대단한 혜안을 가졌고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문화화 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장면의 경우 동성학교 교장을 하면서 학교제도 안에서 전쟁에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있었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인정한다. 이건 내 입장이다. 식민지 상황에서의 친일, 부역의 문제는 좀 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친일파에 대해 독특한 개념이 있다. 정의에 위반된 '의리의 문제'로 본다. 초기 완전한 부역자들, 전쟁 수행기의 철저한 황도주의자들과 다른 많은 친일파들 사이에 구분점이 있다고 본다. 그 구분에 대한 배려가 역사에서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 교회에 대해서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었다'는 교회의 말은 부끄러운 일이다. 자료가 분명하지 않은가. 한두 번 친일한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것이 아니다. 세 건 이상의 자료를 가지고 한 것이다.

재심을 청구할 때, 교회사 연구소에 자문을 얻어서 했을 것인데, 그 안에는 현대 교회사 연구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재심사 신청을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더 창피만 당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일본교회와 교황청이 불의한 상황에 눈감은 것도 문제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돌 추모 미사 때, 당시 뮈텔 주교가 안중근에게 성사를 준 빌렘 신부에게 성무정지처분을 내린 것을 두고, 뮈텔 대주교가 안중근 의사와 빌렘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것이라는 정진석 추기경 발언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일본의 침략행위가 정당하다는 그 당시 판단에 의거한 것인데, 지금 추기경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한 번도 사과한 적도 없고. 교회 안에서 제대로 현대 교회사를 가르친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 장상으로서 교회를 지켜야 하지만, 자신의 책임은 느껴야 한다. 그저 '우린 안 그랬다'는 말을 하기 전에 더 자문을 얻어야 했다.

그냥 반성하고 털어버리면 자유로울 것인데. 인정하고 참회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못 하는지 모르겠다. 교회 자체가 완벽하고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는 '교회는 완전한 사회'라는 데 집착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 자체가 질서유지와 변혁의 이념도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덤덤하게 보게 되겠지만, 여전히 교회의 친일문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본 교회는 죄책선언을 하지 않았나. 낮은 차원에서 일본 정부도 하고, 개신교도 했다.

일본의 사과도 좀 불만이다. 더 강하게 했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에서도 일부 목소리로는 나왔다. 1995년 해방 50주년에 출처가 확실하지 않지만 한 것은 분명하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주교회의 입장에서 발표를 하기는 했다. 친일에 대한 반성에 대해서.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 측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천주교 친일활동에 대해 정리하는데 교회의 협조가 없어서 고생을 했다고 하더라. 실제로 역사를 연구하자면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을 다 봐야 하는데 어려운 것은 없었나?

별로 어려울 것 없다. 할 얘기 하면 되는 것이다. 원래 역사란 밝음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것이다. 빛만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밝은 것만 봐도 눈이 멀것이고, 그림자만 봐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두 가지를 바로 봐야 한다. 교회사도 마찬가지다.

퇴임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지..

하던대로 한문 자료들 주석 작업을 할 생각이다.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력이 닿으면 교회사 관련 글들 정리를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조선후기 천주교 사상사 같은 것. 기존 것들은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다.

사상사라면 이념과 사회의 만남이다. 하나만 쓰면 안된다. 천주교의 결혼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평등, 은총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우리나라에는 거저 주는 은총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과연 초기 신자들이 이를 철저히 받아들였을까. 어느 정도 유교의 영향이 있었는데, 그렇게 본다면 철저한 배교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등등. 보다 학문적으로 조명하면 나름 교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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