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강신주

동양 고전 『장자(莊子)』와 관련하여서는 수많은 출판물들이 있지만 <장자(莊子)>를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집요하게 조명하고 있는 책은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장자(莊子)>의 한 구절을 예로 들면서 장자의 철학이 어떻게 타자를 발견하고, 어떻게 타자와 소통할 것인가를 고심한 철학임을 역설합니다.

쓸모있다, 또는 없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장자>,「소요유(逍遙遊)」)

송나라 사람에게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주는 것이 모자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월나라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쓸모 있는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이치, 바로 이것이 타자성이요, 상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이 “피레네 산맥의 이쪽에서는 진리가 저쪽에서는 오류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진리의 상대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말이겠죠. 저자는 이 우화에 등장하는 송나라 사람이 “차이 속에 머물며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나 자신만의 생각에 머물지 않고 차이를 가로지르는 운동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동일한 규칙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이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와 토론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와 토론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공동체의 규칙을 집단적으로 재확인하려는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소통은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줄이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나와 내 집단만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의견을 재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 못 하는 개만 억울하다

우리는 홀로 자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의타적인 존재들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란 늘 누군가와 부딪히는 접촉과 접속의 연속입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의 저자는 <장자>의 한 구절을 예로 들면서 타자와 어떻게 대면해야 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장자>, 「지락(至樂)」)

우리는 노나라 임금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자주 봅니다. 개를 아예 짖지 못하도록 성대를 제거하면서도 그들은 그 불쌍한 동물을 ‘애완견’이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방식대로 개를 사랑하는 일종의 소유 방식의 사랑이겠죠. 그런 소유 방식의 사랑에 타자에 대한 배려는 일체 없습니다. 오직 내가 속한 공동체의 규칙만을 되풀이하는 배타적 논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 바로 이것이 유아론(唯我論)입니다.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라는 태도죠. 다시 말한다면 나만의 ‘움벨트’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진리의 유일한 척도라고 생각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비유하건대 나의 애완견에게 “나에게는 냄새가 나지 않는데 너는 냄새가 난다고?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라고 언성을 높이는 태도라고도 하겠죠. 이런 경우 말을 못하는 개만 억울합니다.

가만 놔두면 새가 알아서 한다

노나라 임금은 자신의 방식을 타자[새]에게 강요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욕망을 배제하는 제국주의적 방식입니다. 장자를 말하는 강신주의 또 다른 책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 저자는 위의 <장자>의 「지락」의 구절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사랑은 하나라는 생각은 위험하지요. 하나의 세계를 하나의 세계에 복속시켜야 하니까요. 사랑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로서의 타자를 인정해야 합니다. 타자는 내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이요, 사랑은 나와는 다른 세계를 끌어안는 것이지, 나의 세계를 확산시키려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닷새가 가진 삶의 규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공중을 날며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는 자유겠죠. 장자는 이 자유를 인위성이 제거된, 있는 그대로의 새의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새를 가만 놔두면 새가 알아서 한다. 새가 알아서, 새의 규칙대로 하게 놓아두는 것이 새에 대한 사랑이지, 내 방식을 새에게 강요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편견에 갇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레네 산맥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쪽의 문화와 전통에 사로잡혀 있고, 피레네 산맥의 저쪽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문화와 전통에 사로잡혀 있겠죠.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식의 소유자라면 이 차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중으로 한번 날아올라 차이의 세계, 즉 땅의 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내가 속한 세계만이 유일하다는 속 좁은 밴댕이

"북쪽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둘레와 치수는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었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장자>, 「소요유(逍遙遊)」)

바로 이 대붕이 피레네 이쪽과 저쪽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내가 속한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라고 주장하는 속 좁은 밴댕이가 아니라, 높고 낮음과 평평함과 울퉁불퉁함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존재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합니다. 무엇에도 얽매임과 걸림이 없는 존재 말입니다.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제가 속한 문화적 규칙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 그야말로 ‘대자유인’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 잘리고, 옻나무는 쓸모 있어 베인다. 표범은 그 아름다운 털가죽 때문에 재앙을 맞는다. 사람들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어도,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르고 있구나."(<장자>, 「인간세(人間世)」)

돈[이익]이 되면 쓸모가 있고, 이익이 안 되면 쓸모가 없다. 이것이 돈의 논리, 자본의 논리입니다. 현명한 사람도 이 논리 앞에서 장님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좋은 음악가도 이 논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되면 장사꾼밖에 되지 않습니다.

장자의 논리는 초월의 논리입니다.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는 속박의 논리가 아닙니다. “일류대학? 나 그런 것에 관심 없어. 난 학문 그 자체가 즐거울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초월의 논리를 말한 셈입니다. 초월은 어려운 곳에 있지 않습니다. 돈의 논리에만 얽매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초월의 삶을 이미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사랑이란 그 초월의 삶 속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요?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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