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라디오 스타, 이준익 감독, 2006년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늘 보기도 하고 가끔 보기도 하지만 어쨌든 넓게 일상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그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라디오 스타〉는 너무 익숙해 소홀하게 여기지만 우리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잔잔한 이야기다.

왕년에 가수왕까지 했던 최곤(박중훈 분), 한때는 잘나가는 가수였지만, 이제는 인기도 시들고 사고나 친다. 그의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는 최곤의 곁에 있으면서 열심히 뒤치다꺼리하기에 여념없다. 재기를 노리는 한물간 가수와 그에 대해 헌신적인 매니저, 이들은 그렇게 늙어갔다.

우연한 기회로 최곤은 영월의 라디오 방송국 지국에서 DJ를 하게 된다. 왕년의 가수왕에게 성이 찰 리 없어 성의 없이 대충대충 진행하고, 방송사고도 잦다. 그러나 점차 방송에 재미를 붙이고 틀에 얽매이지 않고 진솔하고 신선하게 방송을 진행한다. 화투판에서 고집을 부리는 할머니에게 지역마다 규칙이 다르다는 것도 설명해주고, 이래저래 일상사에 고단한 사람들에게 많은 위안을 준다. 최곤이 좀 어리게 굴긴 해도 본디 인성은 참으로 착하겠다 싶은 대목이 엿보인다. 이렇게 방송이 인기가 좋으니 중앙에서는 그냥 놓아둘 리 없다. 결국 그가 맡은 프로그램이 서울로 옮겨진다.

그런데 매니저 박민수는 최곤을 떠나간다. 최곤이 재기하는 데 자신보다 더 나은 매니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박민수는 서울로 돌아와 김밥을 파는 아내를 돕는다. 사실 최곤은 박민수가 항상 곁에 있을 때는 투덜투덜 불평하면서, 자기한테 제대로 해준 것이 무엇이냐는 식으로 따지곤 했다. 최곤은 방송 중에 “형, 돌아와”하면서 박민수를 찾는다.

박민수의 부재에 직면한 최곤은 그 부재감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가 되고 만다. 참으로 애처로우면서도 그 심정이 이해된다. 집에 있을 때엔 몰랐는데 방학 때 잠시 시골에서 지내면서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 막 울면서 엄마를 찾던 어린 시절과 정말 떠나가지 않았으면 했던 사람의 텅 빈자리를 보고 느꼈던 울먹했던 그런 부재감을 생각하노라면. 어쩌면 최곤에게 박민수는 엄마와 같은 존재였으리라.

버스 안에서 최곤이 자신을 찾는 것을 방송으로 들은 박민수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그의 아내. 최곤의 뒤치다꺼리에 집안을 반쯤 버려두다시피 했음에도, 아내는 이게 운명이려니 하는 표정으로 박민수에게 돌아가라고 한다. 박민수는 다시 최곤에게 돌아간다. 여전히 박민수 앞에서 응석을 부리는 최곤이지만 이내 얼굴은 한결 밝아졌다.


일상은 우리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참으로 하찮게 여기게 하나 보다. 사람들에게는 늘 익숙하고, 그냥 주어지는 것을 덜 소중하게 여기는 속성이 분명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찾아오게 될 부재감이 우리의 정신을 바짝 들게 하곤 한다. 늘 이것을 명심하고 사람들에게 잘하면 좋으련만, 정신 없이 살다 보면 쉽지 않겠다. 그래도 가끔이라도 생각하면 참 좋겠다. 가령 너무 친하게 지냈던 어떤 사람이 갑자기 미워질 때 그와 참 좋았던 기억을 되뇌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인연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실로 경이롭기 그지 없다. 그냥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인연도 있고, 우리의 선택 하나하나가 길을 만들어 이어진 인연도 얼마나 많은지. 정말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저 머나먼 쥐라기 공룡 발걸음 하나하나, 수많은 역사적 사건 하나하나, 우리가 세상에 오기 전에 있었던 많은 사물과 현상들이 지금 옆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 일인가.(상황에 따라서는 아주 끔찍하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정말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내 주위의 사람이 새롭게 보이곤 했다. 영화에서 최곤이 가수왕을 받았다고 설정된 <비와 당신>은 노래가 참 좋은데, 내게 감당키 쉽지 않은 부재감을 안겨준 한 사람이 들려준 노래이기도 했다. 요즘 비가 참 많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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