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만 열사의 삶에서 죽음을 다시 읽는다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받아들던 날, 그날
“형, 왜 저에겐 일언반구도 안 했지요? 살고 죽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고 어떻게 사는냐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가요? 우린 서로 많은 대화를 했잖아요. 삶의 목표, 방향, 방법까지도 말이에요. 술 취한 저는 일찍 잠이 들고, 형은 자는 저를 옆에 두고 유서를 정리했겠지요. 산 위의 집까지 술 취한 저를 메고 올라가는 것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를 오르는 심정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르겠지요.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정의의 십자가!” 조성만이 죽기 전 몇 개월 동안 함께 자취생활을 하고, 그가 죽기 전날까지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 주최의 오월제 행사를 함께 준비했던 후배 김경곤의 안타까운 하소연이다.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받아들던 날,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던 조성만은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교육관에서 농민복을 입은 채 배를 가르고 투신했다. 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감당케 하였는가? 그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난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그가 사랑했던 조국의 현실은 “일제치하의 조국을 구하고자 자기의 삶을 버리고 싸워갔던 자랑스러운 독립군의 정신은, 인류를 자기 나라의 이익을 뽑아내는 장소로 여긴 미국에 의해서 땅에 묻힐 수밖에 없었으며, 그 대리 통치세력인 해방 후의 정권들에 의해서 이 땅의 주인인 민중들은 어느 한 구석 성한 곳이 없는 사회에서, 민족의 바람인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야기만 해도 역적으로 몰리는 세상에서 삶을 뿌리 뽑힌 채 갈수록 비인간화되는 모습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거부하지 않았던 조성만은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세상을 바로 세우고자 염원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문제들을 쌓아놓고 있는 현실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우리의 형제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은 차분히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에게 더 이상의 자책만을 계속하게 할 수는 없었으며, 기성세대에 대한 처절한 반항과, 우리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을 남겨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깊게 간직하게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착박한 팔레스티나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분단 조국 44년.”

정직한 분노를 피해 가지 않았던 순결한 영혼

조성만은 고뇌 속에서 신앙의 요청이 역사적 사회적 차원을 가져야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은 현실에 대한 정직한 대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순결한 영혼만이 정직한 분노를 피해가지 않는 법이다. 결국 현실에 제 몸을 투신코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됨으로써, 조성만의 자아는 이웃으로, 겨레의 심장으로 확장되는 초월을 경험한다.

인간의 해방이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득도에 이를 뿐이다. 진정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회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 속에서 사랑이란 말이 승화되어 그 말이 없어지는 것이리라. ... 삶이란 너무 어렵다. 예수는 지금보다 바쁘지 않은 당시에, 급하다 하면서 집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에게 맡기고 부지런히 쫓아오라고 했는데 ... 잘 살자. 많은 것이 부족하다. 요즈음에는 왜 이렇게 지저분한 내가 되었는지 한탄스럽다. 나태하고 관성적이다. ... 벗어나자. 정말 나 자신의 삶부터 충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내가 어떻게 참됨을 더러운 입으로 말할 수 있는가? ... 이 고비를 벗어나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기 전에는, 쓰러지는 나의 모습을 내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것 같다.
(1988년 3월 17일자 일기)

이러한 가기초월에 대한 격렬한 체험은 자아에 대한 뼈를 깎는 각성을 요청하게 된다. 일그러진 자아의 주름을 펴는 일은 셔츠를 다림질하는 상쾌함보다는 다른 차원의 아픔을 동반한다. 그 후로 조성만의 삶은 겨레의 고통에 저당잡혔다.
 


민중의 현실은 곧 나의 현실

이제 조성만의 현실은 곧 민중의 인간성을 일그러뜨리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로 대체되었다. 그 두 현실이 주는 아픔은 통일되었다. “체제가 인간을 돈의 노예로 변화시키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나고,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민중’이 그러한 모습을 보일 때는 미칠 지경이다. ... 왜 구조는 이러한 비참한 상황만을 계속 ... 미칠 것 같은 세상. 왜곡된 역사 속에서 존재 해 온 한반도 민중이 정말 사람이 사는 세상을 창조해야 하는데 술을 먹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는 세상. 그래서 황지우는 새들도 세상을 뜬다고 외쳤던가? 빛고을의 핏자국을 만든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은 너무나 가혹하다.”

조성만이 ‘세계의 쓰레기 하치장’이라고 불렀던 조국의 현실은 조성만의 가슴에 참담하게 남고, 너절한 쓰레기를 청소해야 할 소명을 느끼게 한다. 조성만은 이러한 현실을 이제 그만 접어두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생명 하나로 해결될 일이면 벌써 이루어졌을 텐데 ...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인간을 가혹하게 놓아두고 있는 것 같다.”(1988년 3월 18일자 일기)는 한탄에서 보듯이, 조성만의 가슴엔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비원(悲願)이 자리 잡는다. 여기서 희망도 출산의 고통을 겪는다.
 


아픔을 따라 숨쉬는 철원평야의 엉겅퀴

예수는 죽어서 인간을 구원하고, 맑스는 죽어서 구조(세상)을 구원하는가? 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 이어지고 이 땅을 사람 살아가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 사랑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치는 세상. 오늘도 철원평야 엉겅퀴는 역사의 아픔을 따라 숨쉬고 있겠지.(1988년 3월 18일자 일기)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바로 이것이 희망을 낳는 진통의 동인(動因)이다. “어제 학교에서는 아크로폴리스 옆에서 세진과 재호의 추모비가 학형들 손에 의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부끄럽게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게 더욱 또렷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죽음을 넘어가는 긴 장례행렬의 끈질긴 여운인가?” 거룩한 죽음에 대한 각성, 그것은 조성만에게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창조하기로 작심케 한다. 자기 한 몸을 죽임으로써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통 없이 만들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해방된 위치로 올리려는 삶의 바람의 여건이 되는 것”(1988년 5월 3일자 일기)이기 때문이다.

붉은 산천이 부른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의 신앙적 궤적 속에서 마침내 결정적 의미를 찾는다. 조성만은 1981년 전주 중앙성당(당시 주임사제는 문정현 신부)에서 노동자의 주보성인인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 나서 줄곧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원했다고 한다.

형, 나는 신부가 되어서 농촌으로 갈 거야. 아버님, 어머님이 농사지으시던 농촌으로 가서 농사지으며 살 테야. 농부들과 같이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갈 테야. 형, 지금은 부모님이 내 말을 들어 주시지 않지만 언젠가는 꼭 들어 주실 거야.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교에 들어갈 예정이었고, 부모님의 허락도 받았다. 그가 가고 싶다던 농촌은 고난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넘어 부활할 산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 노래를 적어 두었다.
 


붉은 산천이 부른다.
마지못해 살아가는 노동의 현장.
벼가 잘 익어도 잡초만 돋고 한반도의 피눈물,
논두렁으로 살라고.
아, 붉은 산천이 부른다.
묶인 사슬 끊자고 너를 부르네.
내 몸 내 혼을 부르네.
꿈틀거리며 살아가는,
아 부활하는 내 한반도여.

가족과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성만은 자신을 ‘소민(素民)’이라고 불렀다. 겨레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했던 조성만은 ‘백의민족’, 소박한 백성 가운데 하나로 스스로를 여겼던 것 같다. 겨레의 산하가 부활할 때 조성만의 몸도 따라서 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그는 부활신앙을 선포한 증거자라 말할 수 있다.



아시아의 종교심성, 살신성인의 길을 따라

조성만은 민주화와 겨레의 통일을 위해 일하다가 1988년 명동성당 교육관에서 제 몸을 죽이고서 자살하였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장례미사마저 치르지 못했다. 교회법이 조성만의 복음적 열정을 삼켜 버린 것이다.

조성만의 투신은 일반적 의미의 자살과 다르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자살이란 개인적인 한과 원망을 이기지 못해 제 몸을 아예 죽이기로 결심하는 것이므로, 여전히 그의 영혼은 제 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구원을 위해 제 몸을 봉헌하는 행위(투신)는 자아를 이웃과 세상으로까지 확장시킨 결과이므로, 그의 영혼은 제 몸에 갇히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살신성인(殺身成仁)과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는 아시아 종교심성의 핵심에 맞닿을 수 있다. 불교에서 보살(菩薩)은 중생을 제도하기로 발원하는 자이며,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는 자이며, 만인의 종으로 처신하는 사람이다. 보살은 천한 중생 하나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천(千)의 생(生)을 상으로 주어도 받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을 돌보는 분이다.

그러므로 동양종교에서 분신자살은 생명의 파괴가 아니라 생명의 건설이며, 영생을 추구하는 신앙의 완결이며, 사회변혁을 위해 일하라는 강렬한 호소이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은 나름대로 구원론적 의미를 갖는다. “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8)라는 예수의 구원론적 의미와 똑같지 않더라도, 겨레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투신과 자살은 더 큰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 뜻의 일부를 이룰 수 있다.

망월동의 조성만 열사 묘비

하느님 나라를 위한 열정

<사목헌장>에서는 의로운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인간이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경고를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서 이미 새로운 인류공동체가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세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겠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 한,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39항)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정이다. 그러므로 이 열정에 힘입어 세상 전부에 맞먹는 목숨을 내어 놓는 삶에 대해서 함부로 단죄할 수는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그동안 자신의 목숨과 제도교회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불의를 눈감아 왔으며, 스스로 불의를 행해 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복음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우리 손에 거듭 쥐어주고 있는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요한 12,24-26)


/한상봉 200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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