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를 따라 걷고 싶었던
영원한 청년 조성만을 추모합니다

지난 5월 15일에 저녁 7시에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조성만(요셉) 형제 20주기 추모미사’가 열렸다. 이날 미사는 당시 조성만군이 활동하던 명동성당청년연합회의 지도 신부였으며, 그에게 직접 종부성사를 주었던 김민수 신부와 당시 가톨릭청년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상지종 신부가 공동집전하였다.

이 추모 행사는 ‘조성만 형제 20주기 서울대 자연대 준비 모임 (대표 이원영)’과 당시 가톨릭청년학생운동을 했던 동료들이 20주기 행사 준비를 위해 20년 만에 모인 ‘성만 사랑회 (대표 최효성)’가 공동으로 주최한 것이다. 이 두 단체는 20주기 추모 행사 준비를 위해 지난 4월 21일, 기금 모금을 위한 ‘후원의 밤’을 가졌고, 5월 18일에는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서 20주기 추도식을 갖고 향후 조성만 평전을 출판을 할 예정이다.

추모미사에서 김민수 신부는 강론을 통하여 20년전의 조성만군을 회고하였다.
그날은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에서는 민가협 주최로 ‘양심수 전원 석방, 수배 해제’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으며, 성당 옆의 가톨릭 회관 6층에서는 여익구, 박계동 등 당시 수배 중이었던 사람들의 농성이 진행 중이었다.

또한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에서는 5월 행사로 광주항쟁 계승 마라톤 대회가 준비 중에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성당 교육관 옥상에 하얀 농민복을 입은 조성만군이 등장했다. “공동 올림픽 개최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 “민주인사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말이냐!” “분단 고착화하는 미국 놈들 물러가라!” 그가 옥상에서 외친 구호였다. 그리고 유서를 뿌리며 과도로 자신의 배를 그어 할복한 뒤 12미터아래 성당의 콘크리트 바닥으로 투신하였다.

투신 직후 근처의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5시간 만에 숨졌다. 5월 16일 새벽 2시 시신을 명동성당으로 옮겨 빈소를 차리고 국민적 애도 속에 ‘통일열사 고 조성만 민주 국민장’을 5일 장으로 치룬 후 5월 19일 아침 7시 명동성당에서 발인 예식을 마치고 오전 10시에 구 서울고등학교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시청 앞에서 30만여 명의 시민 학생이 모여 노제를 치루던 중 해무리가 하늘에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이 있었다. 그 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노제를 또 한 차례 지내고 김세진, 이재호 열사 비 앞에 머문 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뎌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김민수 신부는 아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고 기억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에집트에서 해방되었던 경험을 거듭 기억하면서 민족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해 가고자 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조성만군은 서울대 화학과 84학번, 24살이었다. 그가 명동성당 문화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많은 청년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고, 김신부도 보았다. 당시 김신부는 의사들에게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목숨을 연장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죽음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부서진 얼굴, 김신부는 조성만의 발에 기름을 발라 종부성사(지금의 병자성사)를 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김신부는 “그는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계속된다”고 하면서 이날 미사 중에 읽은 요한복음과 요한의 편지들을 되새기며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며,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 속에서 조성만을 기억하자”고 하였다. 이날 미사에서 고 박종철군 아버지와 이한열군 어머니 등 150여 명은 조성만군의 영정 앞에 국화를 헌화하며 애도의 마음을 표하였다.



조성만군이 투신했을 때 그를 만류하기 위해 안타깝게 문화관 옥상까지 뛰어 올라갔던 최효성(성만사랑회 대표)은 “우리는 열사의 죽음을 일각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영웅주의나 감상주의의 희생물로 그를 추모하는 것이 아니며, 살아남은 자들이 스스로 자기 위안을 삼고자 함도 아니다. 조성만 형제가 신앙고백을 통해 제기한 명제를 오늘 다시한번 일깨우려는 것”이며, “자국의 이익과 패권을 위해 우리 국민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미국의 진면목, 그에 기생하여 민족의 자존심마저 저버리고 제 국민들을 윽박지르며 깔보며 속이는 투기꾼이나 다름없는 강남부자들의 안하무인격인 권력집단의 모습에서, 조성만이 이미 지금도 우리 민족과 한반도를 짓누르는 모순의 진실을 예언자의 소명의식으로 꿰뚫어보고 있음”을 알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이원영(추모사업위 위원장)은 “지난날 함께 웃고 울던 그저 ‘아는 사람’의 기일이 되어 모인 것이 아니”라면서, 지난 20년 동안 20대 청년들이 40대의 나이가 되었지만, “거창하게 조국과 민족의 이름을 앞세워 무엇을 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지만, 조성만 형제가 이 땅에서 외쳤던, 그리고 그토록 이 땅에서 이루고자 했던 소원을 20년이 지난 오늘에서도 다시 기억하고, 우리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다시 모였다”고 하였다. 또한 조성만의 죽음은 순교이며 우리와 함께 부활할 것임을 믿는다고 말했다. 

미사에 참석한 조성만 형제의 아버지는 “이번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를 바라보면서, 젊은이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역임을 다시한번 확인했다”면서, “4.19와 5.18을 비롯해서 촛불집회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10대들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장래가 밝고 마음 든든하다”고 소감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 10대들은 386세대 부모들의 뜨거운 피를 나누어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를 더 밝게 구제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만이의 유서를 다시 읽어보면서 성만이가 제 소신을 밝히는데 당당했음을 되새긴다”고 하였다. 이날 참석자들은 미사를 마친 뒤 명동성당 문화관 아래서 촛불기도회를 하고 추도식을 마무리 하였다.



[ 조성만 (요셉) 형제 ]
1964년 12월 전북 김제군 출생
19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1983년 재수 당시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 민속 연구회 가입
1984년 서울대 자연대 화학과 입학, 2학기 휴학
1985년 2월 군입대
1987년 12월 구로구청 항쟁시 구류 10일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30분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에서 “양심수 석방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고 할복, 투신, 오후 7시 30분 운명

열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할 당시에도 명동성당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활동을 하는 등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서울대 입학 후 바로 군입대를 하게 된다. 군에서 제대하여 ’87년 대선 당시 부정선거 규탄을 위한 ‘구로구청 농성’에 참여하여 구류 10일을 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주항쟁 8주기를 맞이하던 ’88년 5월 15일 당시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이었던 동지가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할복, 투신하였다. 동지는 투신 후 즉시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투신 때 입은 두개골 손상으로 인해 오후 4시 30분 뇌사상태에 빠져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가슴에 맺힌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7시 30분 끝내 운명하였다.

[출처] 18년 전 명동성당 조성만 열사의 할복투신, 그리고 5월 열사|작성자 한길

[ 조성만 열사 할복 투신 당시 남긴 유서 전문 ]

†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막아져서는 안됩니다.
조국이 분단된 지 어언 44년, 일제치하의 조국을 구하고자 자기의 삶을 버리고 싸워갔던 자랑스러운 독립군의 정신은,인류를 자기 나라의 이익을 뽑아내는 장소로 여긴 미국에 의해서 땅에 묻힐 수밖에 없었으며 그 대리통치세력인 해방 후의 정권들(친미사대주의자인 이승만,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본육군사관학교의 후예들, 이들의 반민족적 행동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에 의해서 이 땅의 주인인 민중들은, 어느 한 구석 성한 곳 없는 사회에서, 민족의 바램인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야기만해도 역적으로 몰려 세상에서 삶을 뿌리 뽑힌 채 갈수록 비인간화되는 모습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몇년전 혈육을 부여잡고 말을 잇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의 모습은 이 땅의 현실이며 노동형제들, 농민들, 학생, 공무원, 경찰, 사병 등등 반쪽이 된 조국의 구성원들이 처해있는 현실은 차마 양심을 가진 인간을 편안케 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 모든 모습의 원인들은 바로 한반도를 본국의 이득을 위한 땅으로 여기는 미국과 그 대리통치세력인 군사정부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올해 열리는 올림픽도 미국과 현 군사정부의 기득권 유지에 필요한 행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으며, 올림픽을 통해 한반도를 영구분단화하려는 것은 이 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입니다. 민족 문제의 해결은 조국통일로서만 가능하다는 사실로 볼 때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는 미국과 군사정부의 반민족적 행위는 우리에 의해서 막아져야만 합니다.

한반도에서 미국은 축출되어야만 합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미국의 등장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동반했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외쳤던 제주도민의 학살인 4.3, 한국전에서 보여준 미군의 우리 민족(북한과 남한을 포함하여)에 가했던 살상, 5.16의 지원, 저 잊을 수 없는 80년 광주학살 등 오직 제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미국의 모습은 이 땅을 단 한발의 원폭으로 초토화시킬 수 있는 상황을 유발하고 있으며, 더 이상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민족 문제의 해결은 미국을 축출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은 더 이상 민족반역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군사정부는 반드시 물러나야 합니다.
오직 정권욕에 가득찬 현 군사정부는 이 땅의 현실을 은폐한 채 미국에 대한 사대적인 태도를 표명하며 정권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조국의 운명을 그네들 손에 맡길 수 없다는 판단을 낳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민족의 한인 광주학살을 주도한 현 군사정부, 자랑스런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

다가오는 올림픽은 반드시 공동개최되어야만 합니다.
분단고착화와 정권유지와의 타협에서 이루어질 올림픽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한과 북한이 같이 참여하여 민족화해와 민족통일을 이루는 기반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이후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 살아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같은 형제라는 낱말을 잊고 살아 왔습니다. 통일이 국시가 아니라 반공이 국시인 현실 속에서 국민학교 음악책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없어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으며, 퉁일에 대하여 논의했다고 국가보안법이라는 족쇄가 채워지는 현실을 뜬눈으로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반민족적이고 도대체 누가 애국하는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만이 진정한 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으며 한 민족이 함께 어울어지는 세상에서 평화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남북공동올림픽을 거부할 집단은 현 군사정부와 그 밑에서 민족을 팔아먹는 사람들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올림픽은 민족화해의 장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찢어진 우리나라를 하나 되게 해야 합니다. 진정한 언론자유의 활성화, 노동형제들의 민중생존권 싸움, 농민형제들의 뿌리 뽑힌 삶의 회복, 민족교육의 활성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문제를 쌓아놓고 있는 현실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우리의 형제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현실은 차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에게 더 이상의 자책만을 계속하게 할 수는 없었으며, 기성세대에 대한 처절한 반항과, 우리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을 남겨주어야 한다는 의무감만을 깊게 간직하게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른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출처] 18년 전 명동성당 조성만 열사의 할복투신, 그리고 5월 열사|작성자 한길


/한상봉 200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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