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정중규]

언젠가 TV에서 ‘네 잎 클로버’만을 따로 재배·가공하여 액세서리로 만들어 국내시장만이 아니라 수출까지 하며 고수익을 올리는 농장을 소개하는 것을 보며 빙그레 웃음 머금었던 적이 있다. 우리가 행운의 심벌로 여기는 ‘네 잎 클로버’야말로 사실은 장애를 지닌 이른바 ‘비정상적’ 클로버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네 잎 클로버’를 행운의 심벌로 여기고서 온 들판을 헤매며 찾기도 하고, 앞의 경우에서 보듯 임의로 재배하고 상품화하여 젊은이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기도 한다.

장애인 문제는 다름 아닌 편견의 문제

인식의 편견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의 사물에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 전혀 다른 가치를 띠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장애인복지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키워드’를 오래전부터 여기에서 찾아왔다. 장애인 문제는 다름 아닌 편견의 문제인 까닭이다. 그날 TV를 유심히 보며 “장애를 저토록 행운으로 여길 수도 있구나!” 싶어 반가움과 함께 서글픈 감정이 묘하게 교차하였다.

우리나라만큼 편견과 차별의식이 유별난 곳도 없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만이 아니라, 선거철만 되면 불거지는 지역감정이나 가부장제하에서의 여성차별과 남아선호사상,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학연·지연·혈연으로 뭉쳐지는 집단 패거리 등등을 보라. 그 원인에 무슨 한반도의 독특한 지정학적인 요인이 있는지는 모르나, 그런 행태는 결국 이 사회의 천박함과 미성숙함 그 후진성만 드러내 줄 따름이다.

물론 인간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인 인식구조의 특성 때문에 편견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이 모든 편견이나 차별에는 이유, 더 정확히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오직 그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흑인이기 때문에, 외국인이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차별을 그냥 받는 식이다. 주관적 잣대의 억지가 아닐 수 없다. 장애인 당사자로 때때로 편견과 차별 그 벽 앞에 서게 되면 답답한 가슴에 말문조차 막힐 지경이다.

이러한 편견과 차별의 바탕에 깔린 ‘인식의 틀’은 장애인 문제뿐 아니라 인종차별과 성차별, ‘20대80의 사회’로 현실화되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 제3세계와 제1세계 간의 갈등, 지역·계층·산업간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사회민주화 문제, 남북문제, 지구생태계의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기만 하다. 그런 경직 되고 천박한 ‘인식의 틀’은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식을 확대·재생산하고, 제도적으로 고착화하면서, 장애인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차별받는 자 모두의 삶을 사회의 주변으로 끝없이 밀어내는 것이다. 이런 야만적인 행태가 또 어디 있을까.

장애인복지야말로 인류 최후의 복지과제

인류역사는 그런 ‘편견과 차별을 향한 투쟁’이었으며, 그것은 편견과 차별을 만드는 자와 그렇게 만들어진 편견과 차별의 벽을 부수려는 자 사이의 핏빛 어린 싸움의 기나긴 여정이었다. 역사의 진보란 것도 그런 과정 속에 이루어져 왔었다. 이른바 미개인과 이방인에 대한 몰이해로부터의 탈피, 노예제도나 계급사회 타파, 미신적 자연관에서의 해방, 우주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생태계에 대한 정복주의적인 태도에서 환경친화적인 인식 전환, 절대권력과 독재로부터 민주화로의 이행 등등, 거기엔 편견과 차별의 벽을 허물고서 ‘열린 사회’를 이루려는 인간 대중의 필사적 몸부림이 절절하고도 처절히 배어 있는 것이다.

물론 편견과 차별의 벽을 허물고 모두가 사회공동체 안에서 삶의 기쁨을 누리자는 인간 삶의 공동체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의 당위성은 아주 현실적인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혼자선 결코 살아갈 수 없는 공동체적 존재로, ‘혼자 살기’는 ‘혼자 죽기’일 따름이니 모두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의 연대망을 우리 사회에 구축하면서 궁극적으로 사회의 전체성(holistic)을 회복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장애인문제는 사회의 전체성 회복 그 중추적 핵심에 닿는 문제로, 장애인복지야말로 인류 최후의 복지과제인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사회 속에 태어나 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영위하고 그를 통하여 자아실현을 이루고 싶은 꿈은, 비단 장애인만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장애를 지니게 되면서 사회환경적 여러 가지 제약 조건들 때문에 인간다운 삶 자체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히 복지적 차원을 뛰어넘어 생존권과 인권 확보 차원에서도 참으로 소중하기만 하다.

장애를 ‘모자람’으로 판단하는 편견 넘어서야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장애인 독립생활운동(Independent Living Movement, 이하 IL 운동)이 현재 우리나라 장애인운동을 주도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근거한다. 그것은 지금껏 우리나라의 장애인, 특히 중증장애인의 삶의 현실이 전혀 독립적이지 못하였다는 것과 장애인도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희망하고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IL 운동은 장애인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한 자기결정과 선택, 기회평등, 그리고 개인의 존엄을 요구하는 가치관적 인권운동이며, 그를 통해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대리되고 대변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가장 고귀한 인간적인 욕구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애인 당사자에 의한 IL 운동이 확산하면서 이제껏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와 정책을 좌지우지해왔던 기존의 전문가 주도의 재활패러다임은 장애인 당사자 중심의 IL 패러다임으로, 장애인복지체계 역시 시혜적이고 대상론적 접근방식의 공급자 중심 전달체계(carer centered care system)에서 소비자주의에 입각한 개별욕구 접근방식의 수요자 중심 서비스 전달체계(consumer centered care system)로 급격하게 전환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IL 운동이 우리나라 중증장애인의 삶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와 같은 근본적이고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는 복지사회를 표방하는 우리 사회의 복지선진화에도 궁극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결국, 장애인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인간화를 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특히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시대를 맞아 획일적인 잣대로 장애를 ‘모자람’으로 쉬 판단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다름’의 고유한 삶으로 받아들여 주는 깨어 있는 인식이 요구된다.

‘네 잎 클로버’가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행운의 네 잎 클로버’라 하듯, 그런 인식전환을 통해 편견과 차별의 벽을 허물어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 역시 인간화와 성숙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정중규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