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 | 김진호

교회 유치부 교사 역할을 열정적으로 이루던 때가 있었다. 몇 달에 한 번 돌아오곤 하는 교사 설교 시간에 나는 유치부 아이들에게 구약의 인물들을, 아니 영웅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그 중 으뜸인 11명의 간택된 인물들을 영웅의 이미지와 각자의 줄거리와 어울릴법한 캐릭터를 떠올리며 아마추어가 할 수 있는 재간을 다해 일일이 도화지에 손으로 그려 넣었고 그림 윗부분에는 인물을 한마디로 요약할 만한 문구를 적어 넣은 다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음에 맞춰 플래시 카드처럼 넘기면서 목이 터져라 노래한 적이 있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백성 구한 에스더’로 끝나는 그 노래는 다름 아닌, 신의 일방적인 가호를 받는 이들만의 영웅담이었고 신자들의 열화와 같은 편애를 받는 이들만의 성공신화이며 내 자녀가 그렇게 되어 이름을 날려 주었으면 하는 원어비 피플의 스토리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김진호의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를 읽는다. 내가 부른 어쭙잖은 영웅의 이야기가 성공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의 재생산을 위한 ‘완결된 경구’였다면 그가 쓴 인물의 이야기는 성서 속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네거티브한 시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읽는 독자의 삶과 연계되기를 제시하는 저자만의 ‘완결되지 않은 성찰’이다.

미국의 유명한 개념미술가 부르스 나우만의 <의자 밑의 공간 주조>라는 작품이 있다. 얼핏 보면 그냥 네모난 시멘트 덩어리처럼 생긴 이 작품은 의자라는 일상용품의 밑 부분, 그러니까 우리가 의자를 보고 있다면 의자 이외는 집중하지 않았던, 비존재와 같던 의자 밑의 공간을 형상화한 것인데 “만약 의자를 그리고 싶다면 의자 그 자체가 아니라 의자 부분들 사이의 공기를 느껴야 한다”는 드 쿠닝의 말을 작품화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개념 밖으로 버려진 의자 밑의 공간을 물질화하여 시지각의 개념 안으로 보여지는 순간 네거티브한 공간은 존재감을 얻고 더욱이 의자를 떼어내고 홀로 놓인 그 공간 덩어리는 새로운 무엇이 되기도 한다. 의자와 의자 밑의 공간을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이미 주어졌던 단단한 형상과 개념에 묶여 있던 사고의 전환을 일으킨다.

언제부터인가 아니 처음부터 아마도 내 감각으로는 태초부터인 듯 성서는 이미 내게 단단한 형상으로 주어졌다. 영화 <인셉션>에서 타인의 꿈속으로 들어가 사건을 조작하여 무의식을 조장하듯 성서를 대하는 나는 누군가 이미 내 무의식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내 삶과 관계없이 주어진 해석에 맥을 못 추고 순응하곤 했었다.

이에 저자는 ‘정전’이라는 해석 독점의 폭력성을 거부하고 도그마를 확대 재생산하는 큰 줄거리를 직시하여 오히려 그것에 엇나가는 분열적 요소들에 또는 의자 밑의 공간처럼 네거티브한 공간들에 관심을 둔다. 이른바 저자의 ‘포스트 역사적 성서 읽기’로 유일무이한 과거의 사실에 반하는 ‘반역사’로 더 나아가 ‘문학적 서술’로, 성서의 행간과 행간을 독자의 상상력으로 대면하기를 제시한다.

저자는 책을 통해 신학이나 역사학의 높은 상아탑 고공 층의 아찔한 맛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 일상의 소소한 상식만으로도 또는 어젯밤 케이블TV에서 본 영화 한 토막만으로도 성서 인물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거뜬히 한마디 거들 수 있는 턱 낮은 해석의 문을 열고 있다.

거기에 하나 더 빼놓을 수 없는 작가만의 미덕이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에 숨어 있는데, 그것은 따뜻함이다. 자칫, 권력을 비웃는 그의 반골 기질 덕분에 또는 종교와 문화로 치장한 폭력의 화장발을 지우는 냉철한 그의 문장력 덕분에 작가의 따뜻한 감수성이 단번에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소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거대 혈통에 이스마엘을 낳아주고 쫓겨난 ‘사라’를 타인의 꿈으로 소모된 여인으로 이끌어내고 또 우리가 사사기를 아무리 읽어도 여전히 비존재로 머물러 있던 ‘딤나’를 가부장제와 종족 간 갈등의 폭력으로 난도질당한 여인으로 이끌어 내어 표현 부재였던 그들의 고통을 찾아 문장으로 형상화하는 배려심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이 누가, 그저 예수 기적의 조건 정도로 소품화되는 거라사 광인을 독서의 중심에 놓고 그의 정상적이고 따뜻했던 삶을 상상 할 수 있었겠으며 그가 평범한 동네 아이였을 적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짓밟히고 은폐된 자들에 대한 민중신학자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예수도 마리아도 영웅도 이 땅에서 수분과 같았던, 그들의 삶이 베인 신체는 하늘로 증발되어 버렸고 그들은 어느덧 너무 높이 고양되어 주술이 되고 이 땅엔 키 작은 '루저'들만이 남아 있을 때 작가는 그 패배자들을 모은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외칠 것은 주술이 아니다.

그들이 외칠 것은 하늘로부터 자유를 소망하는 ‘신체 해방’의 노래이다. 땅 위에 거하며 숨 쉬며 때로 기쁘고 때로 폭력 앞에 고통받는 관계적 유기체이며 사회적 욕망의 산물인, 강화된 종교적 표상 이전의 신체 모두가 그러했음을 말하는 노래 말이다.

너무 오랫동안 성서를 읽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책으로 읽는 방법을 모른다. 한때는 눈부신 권위의 성체이자 늘 내 죄악을 들추고 각인시키는 하늘의 빛으로 경배하기를 학습 받았기에 신화가 깨진 지금은 성서에 대한 아직 풀리지 않은 분노가 있는 듯하다. 성서가 깨질수록 신났고 추락할수록 고소했으니까.

그러니 분노도 경배도 성찰의 독서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극단적인 감정 상태가 아닌가. 하지만 조금씩 용기를 내어 봐도 괜찮을 듯싶다. 반드시 한목소리로 해석해야 하고 인생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강압만 없다면 뒤집어 읽어도 괜찮다는데 내가 성서를 거부할 이유는 없지 않겠나.

언제부턴가 늘 책꽂이에 얹혀 뽀얗게 먼지 먹은, 레자로 양장된 검정색 책이 이제야 보인다. 저 책 안에 그 옛날 신을 소망하며 치열하고 눈물겨운 삶을 살아간, 아마 우리의 모습과도 견줄 수 있는 인물의 이야기가 담겨 있겠구나 하는 평범하고 낭만적인 생각을 해 본다. 이 평범한 생각을 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벼려졌나보다.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조동진 노래 <어떤날>에 있는 ‘버려진 아름다움’이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그 것이 아름다움이 될는지 안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김진호는 성서 속에 몸을 부벼 있던, 버려진 인물, 버려진 관점, 버려진 다름, 버려진 역사가 어엿이 존재했음을 노랫말로 들려주는 듯하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았고 발길 가지 않았던 그 강변 어디쯤 쓸쓸한 자에게나 보일 법한 버려진 아름다움인, 들풀처럼, 갈잎처럼, 조그만 물고기 떼처럼….

오종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회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