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라우렌시오(39세)

그를 만나기로 한 전날 핸드폰이 울렸다. 약속한 시간에 티베트평화연대에서 기자회견이 있으니 그 자리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아마 이번엔 티베트평화연대와 뭔 일을 기획하고 있는 모양이다. 중국대사관 앞에 가니, 이미 각 신문 방송사에서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취재 준비를 하고 있다. 취재 장소 앞에 여러 대의 방송용 카메라가 기관포처럼 평화연대 사람들을 향해 도열하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다른 사진기자의 사다리를 빌려타고 올라가 나도 사진을 몇 방 찍었다.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대열 속에 그도 있었다. 아마 평일 낮시간이라 기자회견 때 시간이 나는 평화연대 사람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고, 그래서 비교적 시간이 널널한 그도 동원되었다 싶었다. 그 사람을 박성준 선생이 새로 여신 ‘길담서원’에서 만났다.

이종수 라우렌시오, 39세. 수유동성당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였지만 지금은 상계동에 산다고 했다. ‘문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제호로 얼마 전부터 그에게서 날아오기 시작한 웹메일(www.artizen.or.kr)에는 “문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 아래 생활 속의 문화를 지향하는 비영리 단체”라면서 열린 문화를 만들고 나누기 위해 현장을 뛰며 소박하지만 좋은 공연, 강좌의 기획, 교육사업 및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이 읽히는 판을 여는 문화기획을 위해

그는 그동안 생명평화결사의 순례길에서, 새만금 갯벌살리기의 외침속에서, 우토로마을을 살리자는 여정에서, 빼앗길 위기에 처한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지켜내자는 호소속에서, 노숙인을 위한 무료진료소 건립을 위한 사업속에서 그리고 인혁당 사건 관련 추모제 등에서 기획을 맡아서 일해 왔다. 그런데 그가 기획한 문화행사에는 이른바 유명인들의 자리는 별로 없다. 대개 자기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그러나 끊임없이 노래를 생산하고 문화활동을 해오는 사람들이 주류 출연자가 된다. 이종수씨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 자리에 유명인을 초대하면 흥행이 된다. 그리고 그 행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단한 출연자에 묻혀서 정작 그 사건이나 일하는 당사자들은 소외되기 쉽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며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며 행동해온 아티스트들을 공연장으로 불러내고 싶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마당이 없어서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그들에게 장을 열어주고, 그동안 이런저런 운동을 해온 사람들과 관객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읽히는’ 판이 되기를 바란다.”

그는 그동안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한 공연기획이 범국민대회 식으로 대규모로 진행되어 왔는데, 이러한 물량주의와 연예인 중심의 공연은 아무리 그 취지가 좋다고 해도, 내부의 작은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사라지고, 후원자는 늘겠지만, 운동의 성과물은 대부분 거대단체가 가져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조그만 공연에서는 실제 그 일에 몸담아 왔던 가수들이 참여하곤 하지만, 행사규모가 커지면 이런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종수씨는 이런 이들이 참여하는 삶이 있는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투박하더라도 잰 체 하지 않아서 좋을

진솔한 삶이 묻어나는 공연이란 무엇인가? 인간적인 맛이 묻어나는 공연이다. 그는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영화에서 뒤집어진 배 위에서, 살아남은 몇 사람을 위해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밸브에 매달리며 스코트 목사가 하느님께 던지는 마지막 말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한다. “도와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방해만 하지 말아요.” <천국의 열쇠>에서 치셤 신부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숱한 고초를 참아내며 선교활동을 하고 돌아와서, 옛사랑이었던 여인의 손자 안드레아와 더불어 연어낚시를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지만 착실히 성공의 계단을 밟아 마침내 출세한 안셀모 밀리 주교에게 부탁을 해 보지만, 안셀모 주교는 치셤 신부가 가고 싶어하는 시골마을을 떠올리며 “그곳은 경치가 좋아서 내가 은퇴하면 가려고 했소.”라고 말을 막는다. 그때 치셤 신부가 돌아서며 이렇게 하느님께 중얼거린다. “한번만 당신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자못 불경스럽게 들리는 이러한 말들은 정상적인(?) 성직자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이런 발언이 오히려 가식적이지 않아서 좋고, 투박하더라도 잰 체 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한다. 최근에 그가 문화모임에서 상영한 <어둠속의 천사>라는 영화에선 도로시 데이가 환대의 집을 운영하며, 술 취한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이 일이 하느님의 뜻이겠지만 평생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인간적인 욕구를 그대로 표현한 도로시 데이가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가 좋아하는 공연이란 가식적일 수밖에 없는 보여주는 공연보다 소박하지만 솔직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연이다.

그는 이 영화의 상영이 최근 일이어서 그런지 특별히 도로시 데이에 대한 호감을 표시했다. “그렇게 대단한 여성이 경험한 자유연애도 흥미로왔지만, 성직자가 장땡인 가톨릭교회 안에서 지도신부도 없이 가능한 가톨릭운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새로웠고, 교회 제도권에서 압력이 들어와 가톨릭일꾼운동에서 ‘가톨릭’ 간판을 떼라고 하였을 때에도 그걸 거부하는 걸 보고 감동했다. 하느님의 사업은 성직계층만 하는 게 아니라는 ‘발견’이었다. 사실 예수도 성직자가 아니었고, 칼 라너의 말대로 구태여 가톨릭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을 할 수도 있고... 이 영화에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운동은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종수씨는 이 영화를 집에 와서 혼자 다시 보며, 영화의 독백을 세세이 읽으며 정밀하게 관찰했다고 한다. 그의 귓가에 여전히 쟁쟁한 것은 “여생을 화장실이나 닦으며 보내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던 참사람 도로시 데이의 말이었다. 인간적 욕구에 갈등하면서도 거룩한 길을 기어이 걸어갔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웃사이더, 소수의 목소리를 담아

그가 인권실천시민연대 강의실을 빌려 한 달에 한 차례씩 열고 있는 ‘문화 나눔마당’에는 그동안 류상태, 황대권, 이찬수, 임영신, 안승문, 표명렬, 오창익, 임영인 신부 등이 초대되었다. 어쩌면 요즘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가는 소수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정형근 같은 사람도 불러서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묻고 싶단다. 그가 추구하는 세상은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다. “이번 티베트 사태를 보면서 중국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도 어릴 적부터 단일한 백의민족이고 순수혈통이라는 식의 자못 폭력적인 생각을 강요받아 왔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나 그런 길로 빠져들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다.”

이게 사랑이야

그가 이제 와서 다시 문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상 속에서 즐기면서 새로운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지금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는 가수 이지상을 좋아한다. 그동안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해서, 우토로마을에 대해서, 특히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왔던 이지상의 노래는 주제는 남다르지만 곡은 따뜻하고 정서적이다. 이지상은 “나한테는 이게 사랑이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사랑가(歌)이다 보니, 아무리 내용이 운동권판이라 해도 곡은 음유시인의 그것 같다. 이종수씨는 “현장에서 으쌰 으쌰 하고 나면 그만인 노래가 아니라, 집에 와서도 조용히 들을 수 있는 민중가요 음반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현재 음반 제작 사업도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는 이종수씨는 민중가요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자기만의 고유한 아이템을 갖고 성과를 내어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김영남, 방기순, 신현정씨 등이 참여한 <소풍가는 날>, 박창근씨, 연영석씨, 전경옥씨 등을 그 사례로 들었다.

문정현 신부와 박준 토마스 같은 분들과 만나면서 그런 문화기획 일을 하고 싶어졌다는 그는 다른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투쟁하던 시절에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그들처럼 “피의 순교는 하지 못하지만 땀의 순교는 하고 싶다.”고 말한다. “주워가는 여자가 없어서”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다는 이종수씨는 <Disc4U>라는 음반사이트를 만들어 수익사업을 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다고 하는데, “싼맛에 문화공연 기획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일거리를 갖고 있다고 말하며 웃는다. 이른바 “거마비나 하세요.”라며 내미는 몇푼으로 만족하고 있지만, 예전엔 자신을 보고 “쟤 뭐야?”하던 분들이 이젠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아, 그 친구!”하고 알아봐주는 게 고맙다.

이종수, 그는 좋은 민중가요를 계속 듣고 싶어서 일을 시작한 사나이다. 대안문화, 대안공연 하는데, 음악만 하면 시야가 좁아질 것 같아서 강연회도 마련하고, 영화도 보여주며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그가 소통하고 싶은 사람을 나도 소통하고 싶어진다.


/한상봉 200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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