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집 불복종으로 실천한 그리스도인의 사랑

한국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북한이 한 것으로 결정 짓고 나서 남북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한미군사합동훈련을 서해안에서 벌이면서 중국까지 나서서 패권주의를 경고하고, 북한은 지난 8월 9일 북방한계선으로 100여 발의 해안포를 발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중 사목헌장 82항을 통해 "평화는 무력의 위협으로 여러 국가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들의 상호 신뢰에서 태어나는 것이 분명하므로 모든 사람이 마침내 군비 경쟁을 종식시키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군비 축소가 실현되려면,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협정으로 공동 보조를 맞추어, 진실하고 효과적인 보장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밝힌다.

공교롭게도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한 8월 9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의 '제복'을 입어야 한다"며 나치 정부의 군인이기를 거부해 1943년 베를린 게슈타포 감옥에서 참수된 프란츠 야거슈테터의 기일이다. 이에 교회는 2007년 10월 프란츠 야거스타터를 복자로 시복했다.

복자에 대해 가톨릭 대사전은 "가톨릭 교회가 죽은 사람의 덕행성(德行性)을 증거하여 부르는 존칭으로, 그 경칭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복자는 성인의 바로 전 단계이다.

화해보다는 갈등과 대립이 반복되는 남북의 현실에서 신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사랑과 비폭력을 실천하다 죽은 프란츠 야거스타터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모범으로 살아내야

 

▲ <프란츠 야거슈테터: 감옥으로부터의 서신과 글들(Franz Jagerstatter: Letters and Writings from Prison (Paperback)>(Putz, Erna 지음, Orbis Books 출판) 표지

"말씀은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말들의 실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모범이다. 사람들은 현대세계에서 … 모든 암흑 속에서도 명료함, 통찰, 그리고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 증오 한 가운데에서도 마음의 가장 순수한 평화, 용기, 헌신을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싶어 한다."

프란츠가 감옥에서 쓴 편지글 중 일부이다. 신앙을 통해 배운 바를 그대로 실천한 그는 한낱 젊은 농부에 불과했다. 1907년 오스트리아의 오지에서 태어난 그는 주먹싸움을 좋아하는 산만한 젊은이로, 알 수 없는 출생의 아이를 키우는 젊은이로 알려졌었다.

진지한 측면도 가지고 있던 프란츠는 친구들과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이를 입양하려는 노력도 하곤 했다. 1936년에 그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나는 산을 돌아오는 멋있는 기차를 보았다. … 아이들이 기차로 흘러가고 있었고 제재를 받지 않았다. … 그러자 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기차는 지옥으로 가고 있다.'" 기차는 나치주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격해지고 몇 차례 징집문서를 받고 군대와 집을 오가던 프란츠는 결심한다. "하느님과 국가가 경쟁하고 대립하는 주장을 할 때, 먼저 하느님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총통의 군대에서 근무하는 것은 히틀러에게 필수적으로 충성을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됐고, 그는 1943년 2월 22일 징집문서를 받았을 때 가까운 부대에 근무거절을 통고했다.

3월 2일 프란츠는 린츠에 있는 군대감옥에 보내졌고, 5월 4일 베를린 감옥으로 이송됐다. 6월 6일 프란츠는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8월 9일 형이 집행됐다.

에르나 푸츠(Putz, Erna)가 쓴 <Franz Jagerstatter: Letters and Writings from Prison (Paperback)>(프란츠 야거스타터: 감옥으로부터의 서신과 글들)을 통해 우리는 프란츠의 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사랑이라는 겉옷은 예수의 제자들이 입는 '제복'이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들이 지닌 사랑으로 알려질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사랑을 가장 중요시한 프란츠에게 사랑의 제복 대신 나치 정부의 군복을 입는 것은 불가능했다.

매 순간 서로 섬기고 사랑

프란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감방에서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는 동료에게 "커피 한잔이면 나는 충분하다"면서 자기 몫의 빵조각을 건넨 것은 유명한 일화다. 사형선고를 받은 동료가 연인에게 에델바이스 꽃을 선물하고 싶어할 때도 프란츠는 자신의 아내인 프란치스카에게 에델바이스 꽃을 부탁하는 편지를 쓴다. 그는 매 순간 서로 섬기고 사랑하려고 애썼다.

나치 지배에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한 고위 성직자들에게도 농부 프란츠는 연민의 말을 던진다. "나는 우리의 주교들과 신부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처럼 살과 피를 지닌 인간 존재들이다. … 아마도 그들 역시 이 투쟁을 받아들이기엔 그리고 그들이 살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를 스스로 결정하기엔 너무나 작은 사람들일 것이다." 판단보다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 1943년 4월 세 딸이 부활바구니를 들고 집에서 만든 큰 플래카드 앞에 서 있는 사진이다. 플래카드에는 "사랑하는 아버지, 빨리 집에 오세요."라고 쓰여 있다.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프란츠의 고통 역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거짓말을 해서 내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가? 당신(프란치스카 부인)은 '누구든지 아내와 아이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알고 있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라고 처형되기 전날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프란츠 야거스타터가 나치에 합류하지 않기로 선택한 결과는 비참했다. 그의 가족은 모범적인 남편과 아버지를 잃었다. 군인 가족들에게 나치 정부가 지급하는 보상금이나 식량보조도 받을 수 없었고, 시민으로서의 평판과 지위도 모두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내 역시 프란츠의 행동에 함께했다. 프란치스카는 이렇게 회상한다. "처음에 나는 남편에게 목숨을 바치지 말라고 간청했지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와 싸우고 그를 꾸짖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더 간청하지 않았어요. … 내가 그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정말 그에게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프란츠는 아이들을 싣고 지옥을 향해 달리는 기차의 꿈을 꿨다. 그는 "나는 국가사회주의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에게 울부짖고 싶다: '당신의 생명을 바쳐야 하는 마지막 종점에 도착하기 전에 그 기차에서 뛰어내려요!'"라고 썼다.

오늘날에는 지옥을 향해 달리는 기차가 멈추었는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쳤음에도 인류는 21세기를 전쟁으로 시작했다. 군비경쟁은 멈추지 않고, 개인의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기차에서 내려 아직 내리지 못한 이들에게 프란츠처럼 '뛰어내려요!'라고 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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