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이시우를 찾아서 강화로 가다

강화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순무골 간판이 있는 곳에서 내려달라고 택시기사한테 이야기하면 안다던데, 어디요? 기사는 몇 번 반복해 묻더니, 순무공장요? 거길겁니다, 한다. 전화 통화하며 그이의 발음을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무작정 택시에 몸을 맡겼다. 알고 보니 순무공장 이름이 ‘순무골'이다. 피식 웃으며 전화를 넣었더니 바로 아랫녘에서 북실한 수염을 날리며 이시우씨가 뛰어온다. 근처엔 밥 먹을 데가 없다. 한 군데 oo가든, 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갔더니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찬이 없어서 그런데... 그냥 간단히 먹어도 될까요?” 한다.

그날 라면에 김치를 얹은 소박한 밥상을 받았다. 마침 찬이 없어 밖에서 대접하고 싶었다는 이시우씨. 어제 밤새 작업을 한 탓에 졸음기로 몸이 눅신한 상태에서 그 사람을 만나러 갔던 참인데, 라면의 매운 맛이 몸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서재엔 ‘陰雨堂’(음우당)이라고 쓰인 서각이 걸려 있었다. 이 집 당호인 모양이다. “그늘지고 어두우면 비가 올 것을 생각하라”라는 시경(詩經)의 말씀을 옮겨놓은 것이란다. 그는 한때 명동에서 글방선생으로 있던 조남권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운 적이 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미국 9.11사태를 겪는 와중에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침울해 있던 그가 서책을 읽다가 눈에 뜨인 글귀라고 한다. 

그늘지고 어두우면 비가 올 것을 생각하라

 

사진작가로 알려진 이시우씨는 용산고를 나와 신구전문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하였지만 1987년 6월민주항쟁 당시에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서 복교조치가 내려졌으나,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된 것도 맘이 안 좋은 데, 그 덕택에 학교로 돌아가는 게 싫어서 여지껏 복학하지 않은 채 그저 고졸(高卒)로 만족한다는 그였다. 그 후로 시위가 있을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가, 그가 속해 있던 한국문화운동연구소 사람들과 청계 피복노조와 인쇄노조에서 사진반을 운영하며 조직사업을 도왔다. 노동조합에서 처음 사진반을 열자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카메라는 그가 가진 것과 나머지 단 한 대 뿐이었다.

카메라 없는 사진 작업

그들은 카메라도 없는데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 그들의 갈망, 이건 그가 살면서 받은 첫 번째 큰 충격이었다. 카메라 없이 무얼 할까? 그래서 처음엔 사진말 놀이를 했다. 최민순씨가 찍은 ‘인간’이라는 사진첩을 뜯어서 늘어놓고, 맘에 끌리는 사진을 골라 보이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진짜배기 삶을 배우는 첫걸음이었다. 그 다음엔 노동자들에게 현장에서 카메라를 돌려가면서 한 번씩 사진을 찍어오게 하였다. 그 사진을 현상해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보게 하였다. 한 친구는 어디서 벽에 박혀 있는 못 하나를 찍어 왔다. 그는 어려서 구두닦이를 하였는데, 코너에 구두통을 걸어놓는 댓가로 라면값 정도만 남기고 전부 빼앗겨 왔던 경험이 있었다. 그에게 구두통걸이 못은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상징이었다. 이들을 통해 기존에 학교에서 배운 사진에 대한 관념이 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사진은 누가 찍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달려 나왔다.

그 후 십여 년 동안은 사진을 찍지 않았다. 노조에서 풍물이 유행하면서 사진반은 없어지고, 이시우씨는 새로 풍물을 배우고 마당극과 공동체 놀이에 전념했다. 그는 여전히 지금도 예술의 역할이 크다고 여긴다. 사람들에게 감성을 울리기 위해 정서적 접근이 필요한 데, 그걸 설명하는 게 미학이다. 그는 통일운동을 하면서 맨날 데모만 하였지만, 북한바로알기 운동을 위해서도, 통일운동이란 놀면서 할 수 있는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통일미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통일미학을 해야 한다

이를테면 금강산은 남북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대상인데, 몇 년 동안 공부하는 것보다 금강산을 한번 다녀오는 것이 의식을 바꾸는데 효율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금강산에는 민족미학적 에너지가 담겨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에 금강산을 ‘산천 만다라’로 삼았던 것과 맥락이 통한다. 그들은 법당에서 가람으로, 가람에서 이 절집을 둘러싼 산천까지 하나의 불국토를 보여주는 만다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봉우리마다 부처 보살의 명호가 붙여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송강 정철 등이 금강산에 유교적 질서를 세웠다. 제일 먼저 남북 사이에 금강산 개방을 합의한 것도 그런 민족미학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이시우씨는 바라본다. 오늘날 금강산은 비무장지대를 거쳐서 가야 하는데, 이 경로 역시 통일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여행을 하는 동안에 분단의 구조와 전 세계 냉전체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속 풍경과 조응하는 바깥 풍경

이런 이시우씨가 다시 사진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93년이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 대부분 활동가들이 현장활동을 접는 분위기였다. 그때 친구가 놀러가자고 했다. 돌아보면 그동안 저 한 몸 위해 놀았던 경험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간 곳이 철원평야. 눈이 잔뜩 내린 뒤에도 벌판은 잿빛이었는데, 그 위로 철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친구 카메라를 빌려 사진을 찍었다. 그때 처음 마음 속 풍경과 바깥 풍경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을 하였다. 어쩌면 그때서야 이시우씨는 처음으로 진짜 카메라를 발견한 것이다.

두 번째 찍은 인상적인 사진은 연천의 한 동굴에서 발견한 광경이었다. 간신히 묻고 물어서 인민군이 총살당했다는 동굴을 찾았는데, 그 음습한 냄새란... 막다른 곳에 닿아서 다시 돌아서 보니, 어둡고 갑갑했던 동굴의 입구의 빛이 얼마나 눈부시게 환한지, 놀랐다. 어두운 곳에 있으니 더 환한 빛을 보게 되었다. 통일운동이 가라앉고 암담하게만 여겨졌는데, 깨닫고 보니, 문제는 우리가 잘못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구나, 생각했다. 낮은 곳에 더 고통스러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민통선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유엔사의 눈으로 비무장지대를 보다

정작 분단이 피해자들은 민통선 지역 안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는 서울에서 구호만 외치고 있었다고 여겼던 것이다. 비무장 지대를 ‘유엔사’의 눈으로 보니, 이게 단순한 분단의 상징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군사분계선 이남은 여전히 유엔사령관의 관할이었던 것이다. 이시우씨는 2004년에 두 달 동안 강화에서 고성, 부산을 거쳐 나가사키를 거쳐 오키나와가지 도보순례를 하면서 ‘유엔사 문제를 어찌 다루어야 할지 참구(參究)하는’ 걷기 명상을 하였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한강하구’였다.

한강 하구의 문제는 유엔사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수 있는 장소였다. 법적으로 아무런 금지조항이 없으나 유엔사에 의해 왕래가 금지된 강이었다. 강화군과 협의하여 정전협정이 맺어진 7월 27일이면 매년 지역민들과 더불어 이 한강 하구에 배 띄우기 행사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엔사와 국방부에게서 제재를 받고 갈등을 빚고 있지만, 법적 명분이 없는 그들에게 법적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고소할 생각이다. 2006년에는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를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하자, 미국은 전시작전권을 한국에 돌려주고 대신 유엔사를 강하하려고 시도해 왔다. 이시우씨는 당시 이러한 사실을 계속 폭로하는 글쓰기를 해왔다. 이게 화근이 되어 그는 2007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유엔사에 관련된 글을 써서 이적단체를 고무찬양하였고, 군사기밀을 탐지 누설했다는 등 28가지 위반사항을 걸었다. 그러나 2008년 1월 마지막 공판에서 ‘완전 무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국가보안법 관련 사안에 대한 전향적인 선례를 남겼다.

이시우씨는 지금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그의 서재에는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여 주인이 읽어주길 기다린다. 가족들은 강화읍내에 사는데, 그는 몇 년 째 매일 아침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새벽길을 걸어서 작업실에 오고, 밤이 내리면 집으로 간다. 그가 동굴에서 바라보았을 빛무리가 떠오른다. 그는 매일같이 그날을 기억하며, 어둔 밤길을 걸어 새벽으로 열린 길을 따라서 아침햇살을 맞이하러 가고 있다. 그곳에서 그의 작업이 다시 시작된다.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 지뢰로 발목을 잃은 조만손 씨는 자다가 가끔 있지도 않은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눈을 뜹니다. 묻어둘 순 있어도 사라질 순 없는 것. 진실입니다. 파주 금파리 ⓒ이시우




/한상봉 200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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