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켈틱영성이야기' 필립 누엘, 대한기독교서회

▲ 에리우게나는 그리스도가 우리 사이에서 두 신발을 신고 움직이신다고 가르쳤다. 한 신발은 피조물이며 한 신발은 성경이다.
"그리스도 나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뒤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앞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옆에 계시고 그리스도 나를 이기시고
그리스도 나를 위로하고 새로이 회복시키며
그리스도 내 아래 계시고 나의 위에 계시며
고요함 가운데, 혹은 위험 가운데 그리스도 현존하며
나를 사랑하는 모든 마음 안에 그리스도 계시며
친구와 낯선 이들의 입속에도 그리스도 계시네."

성 패트릭의 찬송 7절이다. 켈트 영성은 하늘과 땅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볼 수 없다. 그분은 어디에나 현존하시고, 마리아도 하늘의 여왕이 아니라 짐승들 사이에 있는 맨발의 시골처녀로 그려져 있다. 베드로는 교회론적으로 드높여진 교황이 아니며 소박한 어부로서 바다로 행한 길에서 늘 만날 수 있다.

필립 누엘이 지은 <켈트영성이야기>(대한기독교서회)는 창조 안에서 하느님의 심장 박동소리를 듣던 켈트인들의 영성을 노래하고 있다. 4대강을 농단하는 마음결은 찾아볼 수 없으며, 4대강 안에서 그분의 숨결을 알아듣는 이들이 켈트인이다. 도로테 죌레의 <신비와 저항>이란 책을 번역했던 정미현 교수가 이번엔 '켈트인의 영성'을 소개한다.

영국에서 664년 열린 휘트비종교회의에서 요한의 전통(켈트영성)과 베드로 전통(로마전통)이 대립했고, 당시 노섬브리아 왕인 오스위가 고대 켈트교회의 영성을 금압함으로써 교회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켈트교회는 요한의 전통을 따른다. 요한은 최후의 만찬 때 예수에게 기대어 있던 사랑받는 제자였으며, 삶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심장 박동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로마전통은 그리스도가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한 베드로의 권위를 주장한다. 이들은 신실한 행동과 규범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  

신약성서에서 요한의 전통은 <요한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서두에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3-4) 하였듯이, 우주적이다. 그러나 베드로 전통은 <마태오 복음>에 잘 나타나 있듯이, 서두에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하며 예수의 족보를 다룬다. 이처럼 요한이 그린 도화지는 우주 전체이며,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서 삶 전체를 바라본다. 그러나 베드로 전통은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혈통을 통해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를 다룬다.

요한의 전통은 모든 창조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감지한다. 아침에 해가 뜨는 데서, 밤에 뜨는 달에서, 전혀 다른 종교전통 안에서도, 심지어 종교와 상관없는 누구에게서라도 그 빛을 감지한다. 그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전통은 네 벽을 가진 교회 안에서, 그 전통과 전례 안에서 그 빛을 감지하며, 그런 점에서 협소하지만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 켈트영성을 가르쳤던 에리우게나는 이 두 가지 영성이 통합되길 희망했다. 

▲ 성 요한의 십자가와 성 마틴의 십자가

6세기 골롬바 성인이 세웠던 아이오나 수도원은 이 둘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잘 보여준다. 그 섬의 성 마리아 교회의 중앙 입구 바깥에는 성 요한과 성 마틴의 거대한 켈트 십자가가 서 있다. 사람들은 이 앞에서 우주적 하느님을 느끼고 나서, 돌로 쌓은 베네딕토 수도원 식의 성당에 들어가 예배한다. (본래 켈트교회는 나무로 지어졌다.) 요한 전통의 창조적 아름다움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성인들과 교감을 나누기도 하는 것이다. 

말씀과 전례와 교회법 안에서 안전한 길을 걷는 것도 좋겠지만, 창조의 선함을 믿는다면, 하느님이 주신 성적 매력과 친밀감 안에서 얻는 기쁨도 중요하다. 그러나 요한 전통을 배제한 로마교회는 성(性)과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죄(罪)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요한 전통은 '완전함이란 본래 하느님이 부여하신 선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았으나, 베드로 전통은 '죄에 대항해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요한은 죄인이 '사랑을 통해 변화'된다고 보았으나, 베드로는 '죄를 경계하고 죄인을 벌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요한 복음에선 수없이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거듭 말하고 있지만, 마태오 복음에선 의로움을 강조해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요한이 관상적이라면, 베드로는 실천적이다. 창조의 선함을 믿고 자연과 자신 안에 깃든 하느님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굶주린 이를 먹이고 병든 자를 돌보며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가 주어야 한다. 즉, 요한의 사랑은 베드로의 정의와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켈트종교/요한이 갖는 우주적 차원의 사랑을 배제했기 때문에 '교회법'이 발전하고, 어둡고 불안한 종교가 되었다. 그래서 데이야르 드 샤르댕이 '우주를 제단으로 삼아' 미사를 올린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켈트영성의 기초는 펠라기우스가 놓았다. 펠라기우스는 창조의 선함을 믿었기에, "짐승들이 숲에서는 거니는 것을 보라. 하느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 머무네. 새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라. 하느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 머무네. 잔디에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가는 것을 보라. 하느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 머무네... 하느님이 당신의 창조가 좋았다고 말씀하실 때, 그 손은 모든 피조물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숨이 모든 피조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추한 것은 없으리."라고 노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교회의 교리와 전통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며, 친구나 적을 포함한다. 교리 역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원죄를 믿지 않았다. 아기들은 죄를 안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축복 속에서 하느님의 선함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수태되는 것은 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켈틱영성에서는 우리가 할 일은 곧 하느님이 우리 마음 밭에 뿌려놓은 것을 되찾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본질적인 것은 하느님뿐이며, 하느님의 선을 갈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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