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누구인가-호인수]

▲ 강우일 주교 (사진출처/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추기경이 되셔서 한국천주교회에는 두 분의 추기경이 계시더니 작년에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셨다. 정 추기경의 연세가 80에 가까워지자 과연 새 추기경은 누가 될까? 에 관심이 지대하다. 이 주교, 저 주교의 이름들이 심심찮게 하마평에 오르는 것을 나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주교임명의 선례를 보면 무수히 거론된 이름과는 전혀 엉뚱한 인물이 저 하늘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하마평이 무슨 소용이랴.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고 하시는 일이라고 믿을 수밖에.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후임으로 강력하게 거론되던 분은 단연 오랫동안 그분을 바로 곁에서 보좌하던 강우일 주교였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세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은 화려하게 입경하고 강우일은 바다 건너 제주교구장 김창렬의 후임으로 가게 된다. 봉황의 뜻을 참새가 어찌 알 수 있겠나. 알 수도 없거니와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경죄인 것을. 그 후로 강우일은 간혹 만나는 제주도 신부들을 통해서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작은 교구의 장으로 강녕하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교구장으로서 강우일은 교구 사제들과 함께 제주도 해군기지설치반대운동에 앞장서서 언론의 주목을 받지만 실제로 일반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되게 된 계기는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 TV생중계가 아니었나 싶다. 그 날, 그 미사에서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의장 강우일의 절절한 추도사는 김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며 TV를 지켜보고 있던 온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후볐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추기경님이 무슨 잘못이 그리 많아서 이렇게 긴 고난을 맛보게 하십니까? 추기경 정도 되는 분을 이렇게 족치시니 우리 같은 범인은 얼마나 호되게 다루시려고요? 겁나고 무섭습니다. 이제 그만 편히 쉬게 해주십시오.”

특히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아껴주셨던 강우일이 인사 올립니다.”라는 마무리였다. 자신을 주교 강우일이 아니라 그저 한낱 평범한 인간으로 소개한 것이다. 이런 자기소개는 주교가 아니라 신부들에게서도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우일은 올해 춘계주교회의를 마치면서 주교단의 이름으로 mb정부의 4대강사업 강행을 가로막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노골적인 반대입장 표명은 주교단으로서는 전례 없던 것이다. 눈치만 보며 주뼛거리던 교회와 시민사회에 천군만마의 지원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기다렸다는 듯 불교와 개신교가 속속 뒤를 잇고 결국 mb정권과 국민과의 한 판 승부는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강우일의 행보는 계속된다. 직접 양수리 미사에 참례하여 사자후를 토하고 시위대열의 선두를 마다하지 않는다. 인천교구 정신철 보좌주교서품식에서 한 그의 직설적이고 솔직담백한 축사(인터넷 포털사이트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참조하시라.)는 특별석에 앉은 여러 주교와 신부들을 숙연하게 한 반면, 서민교우(?)들의 갈채를 자아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강우일의 결정적인 발언은 <경향잡지> 7월호에 기고한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그는 이 글에서 “교회는 영육으로 안락하거나 편안한 인생만을 추구하는 친목동아리가 아니다. 세상과 씨름하며 평화를 선포하지 않으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결코 새로울 것 없는 당연한 가르침이지만 고위성직자에게는 근래에 들어보지 못한 강론이다. 우리 교회에도 보수를 자처하는 원로, 유지 등 그의 요즘 언행을 못마땅해 하는 열혈신자나 성직자가 적지 않을 터, 강우일은 그걸 어찌 다 감당하려고 이러시는가? 그에게는 추기경의 꿈이 없을까? 주제넘고도 방정맞은 걱정을 다 한다. 그건 그렇고...나는 모처럼 신난다. “파이팅! 강우일. 강우일, 파이팅!”이다.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고강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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