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문익환 옥중 서한집』(삼민사, 1991)

200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새로이 취임하는 사람이 있으면 퇴임하는 사람도 있는 법. 동교동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식이 있었다. 앞으로는 이 역사적 인물을 직접 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휴가를 내고 동교동으로 향한다. 퇴임식은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데, 밥때가 되어 같이 같던 일행들은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식당에서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재현되는 듯하다. <초록 물고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석규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린 문성근의 모습을 기억하는지. 딱 그 장면이다. 그러한 자태로 식당에 문성근 씨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 옆에 그의 어머니이자 문익환 목사의 부인이 계시다. 늦봄 문익환 목사가 ‘봄길’님이라고 했던 그분이. 나는 문성근 씨를 통해 문익환 목사를 떠올렸지만, 문익환 목사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졌던 일행들은 봄길 님을 통해 문익환 목사를 떠올렸다.

사실 그랬다. 문익환 목사가 세상에 계실 때에 그분에 대해 그다지 존경심을 가지고 있거나, 그분이 이 땅의 큰 어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가서 김주석을 얼싸안고, 어찌 되었던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해 용감하게 투쟁하던 한 투사쯤으로 인식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반성하자면 그것은 생각이 어린 시절 '정파놀이'의 소산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PD냐 NL이냐로 가르던 어이없던 시절, 과의 교조적인 NL 주사 분위기에 학을 띠어 NL에 대해 반감을 많이 가졌던 그때 그 시절. 문익환 목사는 그쪽 사람이 아니냐하는 짧은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러한 정파놀이가 얼마나 무의미했던가(또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비둘기라고 믿었던 까치”가 자기가 까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듯. 비록 김일성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조차 NL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1994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 흘러갔다. 그 사이에 나는 문익환 목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의 많은 혼란 속에서 그런 큰 어른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다시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라는 옥중서한집을 펼치게 되었다.

문 목사는 처음부터 적극적인 투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데모하러 나간다고 수업 빠지면 짤 없이 대응하는 보통 대학 교수라고 한다. 한신대 출신의 전도사에게 들었는데, 오죽 했으면 한때 별명이 ‘문익황’이었겠는가. 문 목사가 적극적인 투쟁의 길을 나선 것은 그의 생애 말렵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였다. 문 목사가 자신을 ‘늦봄’이라고 불렀던 것도 늦게 운동에 참여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본격적인 투쟁의 길에 나서기 전에 문 목사는 구약을 공부하는 신학자로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교회일치의 차원에서 펼친 공동번역 성서작업에 참여했던 이력이 있다. 구약의 40퍼센트 이상이 시였던지라, 구약을 공부하다 보니 시인이 되기도 했다. 떠도는 삶 속에서 희망을 찾아나선(그 의미는 현재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와는 분명히 달랐을) 히브리 민중들의 삶 속에서 고난가득한 우리 민족의 삶을 투영시켰던 것이다(문 목사의 생애는 『한국가톨릭대사전』 5권, pp. 2860~2862: <문익환> 항목에 깔끔하게 소개되어 있다).

옥에 갇힌 문 목사는 편지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 고난의 시대를 같이했던 부인, 김남주 시인, 박원순 변호사, 임수경 등등. 그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이 민족이 나아갈 길을 드러내 보인다.

민중신학자 고 안병무 선생에게는 “가톨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몇백 년 동안 저지른 죄악을 속죄할 양으로, 참회하는 심정으로 발전시킨 해방신학이 한국에 와서 민중신학으로 발전했다는 건 하느님의 깊은 섭리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p. 195, 1989. 08. 05)라며, 한국에서의 새로운 신학적 방향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또 언젠가 《말》지에서 도 본 기억이 나는 대목인데, 문 목사는 한글 풀어쓰기(일종의 문자개혁으로, 가령 ‘말’을 ‘ㅁ ㅏ ㄹ’ 이런 식으로, 단 새로운 글꼴을 개발하여, 최현배 선생의 『글자의 혁명』 참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던 대목이 나온다.

“76년 이날을 기해서 장봉선 씨와 같이 풀어쓰기보급회라고 만들고 회보를 내려고 계획까지 짰었는데, 그새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군요. 지난번 평양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김두봉 씨(풀어쓰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분)가 일찍이 그 제안을 했는데, 김 주석이 그건 통일된 다음에 하자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p. 204, 1989. 10. 09-당신께)

그리고 옥중에서 어머님의 부고를 접하고는 돌아가신 어머님께도 편지를 띄운다. “앞으로 어머니를 보고 싶으면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밝은 새 날을 향해서 온몸으로 밀어붙이며 전진하는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의 얼굴에서 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겁니다. 그들을 어머니로 알고 부둥켜 안고 같이 몸부림치며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천국의 복락을 누릴 겁니다.” (p. 247, 1990. 09. 22-어머님께)

조국 통일의 열망을 안고 이 늙은 목사는 혈혈단신으로 저 북녘 땅으로 흘러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정권은 수구 반동세력은 그를 ‘빨갱이’로 몰았고, ‘국가보안법’으로 옥에 가두었다. 감옥은 분명 몸을 가두는 곳이다. 그러나 마음까지 가둘 수는 없는 법이다. 수많은 다른 옥중서간집에서도 어떠한 억압이나 탄압에도 가둘 수 없는 처절한 양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겠다. 어찌보면 문 목사는 단순하고, 바보 같고, 막말로 꼴통이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위대한 바보, 꼴통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의 진전이 있었을 것이며, 우리의 정신적 유산은 얼마나 빈곤했을까. 하나의 서간집으로 그저 단순히 이해했던 이 위대한 바보, 꼴통을 만나고 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 시정잡배들이 난무하는 요즘, 아름답고 위대한 꼴통이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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