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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안식년, 언제까지?[시사비평]

몇 년 전 일이다. 2007년 10월 29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삼성의 비리를 제보하기 위해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찾은 김용철 변호사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때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들어줄 곳은 사제단밖에 없었다. 그는 왜 사제단을 찾아왔을까? 한국사회의 언론, 검찰, 권력의 왜곡과 부패 고리를 너무도 잘 알기에 그는 사제단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후 삼성특검이 시작되었고 이건희 삼성회장은 물러났다. 그리고 삼성의 조세포탈, 차명계좌 등의 불법과 비리는 정치권력도 어쩔 수 없는 듯 대충 얼버무리며 끝이 났다.

본질은 무엇이 진실인가를 판단하는 문제였으나 결국에는 반쯤의 진실과 반쯤의 거짓이 있는 것처럼 양비론으로 마무리되었다. 한 사람의 참회와 진실을 우리 사회의 주류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준이 '전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야 했다. 교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교회 지도층은 세상 문제를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시끄럽게 하는 사제단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이미 교회의 지도층과 주류에 속한 평신도들은 삼성의 문제는 양심과 성찰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물정 모르고 초우량 기업을 괴롭히는 철없는 짓 정도로 인식하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2년이 지나고 전 삼성회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면되고 다시 삼성에 복귀했다.

이것도 조금 오래된 이야기다. 2008년 5월, 광화문에 모인 몇 명의 어린 소녀들이 손에 든 촛불은 그해 여름 한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대통령은 청와대 산에 올라 광화문을 환히 밝힌 촛불을 보고 두려워했으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촛불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두 달이 넘게 촛불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심지어 해외의 주요도시에서도 지지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그러나 촛불이 줄어들자 정부는 촛불을 적처럼 대응했고 공권력의 폭력과 검거작전은 극에 달했다. 사제단은 그해 6월 30일부터 7월 6일까지 서울광장에서 천막을 치고 시국미사를 열어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그들과 함께 했다. 이후 촛불은 참여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촛불을 보고 놀란 권력은 촛불의 배후에는 좌경세력이 있다고 했다. 명동성당으로 모이는 촛불의 행렬에 대해 교회는 거부했으며 성직자와 수도자가 이러한 촛불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 2008년 8월 서울대교구 전종훈 신부는 느닷없는 안식년 발령을 받았다. 통상 천주교 사제들은 10년에 한 번 정도 본인이 신청하면 교구에 특별한 문제가 없을 때 1년 동안의 안식년을 허락한다. 그러나 전종훈 신부는 이미 2002년에 안식년을 보냈기 때문에 아직 3-4년은 더 기다려야 안식년을 청할 수 있으며, 이번에 안식년을 청한 바도 없다. 또한 사제들은 관례적으로 한 성당에서 3-5년 정도 재임하게 되는데, 전 신부는 수락산성당에 발령받은 지 1년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이례적인 조치였다.(사진/한상봉 기자)


이 두 사건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후 한국사회의 보수권력은 이러한 일을 심각하게 여겼고 민주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졌다. 교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두 사건의 정점에 있었던, 아니 국민의 소리를 들으려 했던 사제단 역시 교회 안의 친 정부적인 사람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어찌 됐던 그해 여름, 사제단의 대표인 전종훈 신부는 갑자기 원하지 않는 안식년을 지내야 했고 아직도 안식년 상태에 있다. 그 이후 오체투지를 돌아 2009년 용산을 넘어, 올해 다시 4대강의 생명을 위해 단식을 하면서 사제단 대표 사제가 걸어가는 길은 여전히 고통의 길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한 사제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안식년에 대해 침묵한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린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평신도든 사제든 수도자든 정당한 비판과 주장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의 공동체가 아니다. 평신도가 감히 교회 지도층이 행한 인사권에 왈가왈부하고 순명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회피이거나 외면이다.

 

행여 그 비판이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경청하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어찌 됐던 세상이든 교회든 불편부당하고 상식적이지 않으면 무엇이 옳음인지, 정당한 일인지에 대해 소리를 내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관계와 소통을 이루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잘못된 권위를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소리가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 지르거나, 또는 소리를 크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작게 속삭인다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광야의 외침’이 없다. 그래서 세상보다 더딘 교회의 불소통(不疏通)은 이 여름을 더 답답하게 한다.

한상욱 /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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