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이야기 하나 -아침이슬

"긴- 밤 지새-우며 풀잎마다 맺힌 진주- 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 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 … …"

아직 서울에 개발의 붐이 일어나기 전인 1972년의 한여름, 7, 8월의 오후 두 시쯤이면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의 고요를 깨우는 청년이 있었다. 어김없이 날이면 날마다 옥상에 올라와 목청이 터져라 같은 노래를 부르며 동네의 적막을 흔들어대던 그 청년은 내 기억에 이름 모를 재수생으로 남아있다.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울분으로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제 설움을 달래는 모양이라고 너그럽게 넘어가는 어른들의 지나는 이야기를 귀동냥했을 것이다… …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 노래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그 노래를 고등학생들도 가끔 부르며, 금지된 노래를 부르는 아슬아슬한 묘미를 즐기기도 할 무렵 10. 26으로 시작되는 우리 사회의 대 파국이 시작되었다. 그 노래를 더 이상 숨어서도 부르기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는 내 어린 시절의 뜨거운 오후와 함께 엮이고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 뭉치에 끼어들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기억의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수십년의 시간을 건너서, 어느 변두리 동네에서가 아니라 서울광장의 한복판에서, 국민가수가 된 양희은씨가 선창하며 수십만이 함께 부르는 그 노래 '아침이슬'을 다시 들었다. 그 뜨거운 여름, 슬레트 지붕꼭대기를 달구던 태양보다 더 뜨거운 목소리로, 목청이 터져라 부르던 그 노래를, 초등학생이던 내가 낯선 귀로 영문도 모르고 듣던 1972년의 그 노래를, 40 여년이 지나서 쉰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또다시 목이 터져라 부르는 것을 듣게 되다니… 그것은 감격이 아닌 비통함이었다. 흘러간 그 노래를 여전히 현재형으로 불러야 하다니! '아침이슬' 을 부르던 그 이름 모를 청년이 되어서…

이야기 둘 -축구전쟁과 붉은 악마

▲ 예수의 소송 재판에 앞서 솔로몬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춤을 추는 악마 벨리얼.(from the German Book of Belial, 1463)
오늘이 지나면 긴-밤을 지새우며 한여름 밤의 재미를 보던 이들은 흘러간 밤들에 길들여진 그 잠버릇에 남은 여름내 잠 못 이루는 고통을 겪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잠 못 이루게 될 밤에 무엇을 할지는 내일부터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오늘 밤의 마지막 재미를 즐겨야 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대신 축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결정이다. 남미의 어느 멍청한 축구광들은 축구 하다가 전쟁으로 승부를 가리려 했다지만, 올해는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에 자리한 곳에서 축구전쟁이 치루어질 뿐만 아니라, 남미의 과격파들도 미녀의 나체쇼 이외에는 별다른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채 각기 제 나라로 조용히 돌아갔단다. 오늘밤이 지나면 오렌지 군단이 점장이 문어의 효험에 따라 여지없이 무너졌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월드컵 축구대회를 아무도 전쟁이라 부르지는 않지만 전쟁에 못지 않은 큰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역시 아무도 반대하지 않으리라. 이 축구 덕에 천안함 침몰 사건도, 나라호 발사의 실패도, 세종시의 원안복귀도, 사대강 개발 문제도 다 묻히고 말았다. 온 힘을 다해서 무엇인가 해보려던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힘이 빠지는 일이겠다. 멍청하게 축구에 넋이 나가서 한낮에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과 함께 이 심각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의 일들을 어떻게 함께 의논하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멍청한? 축구의 열기와 붉은 악마군단의 광기 덕에 제대로 전쟁을 하려던 사람들은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빨간색을 좋아하는 인간들은 언제나 수상하다. 섹스나 맑스에 관심이 많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악마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느 구석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축구전쟁 동안에는 금지된 악마의 이름으로 빨간색 옷을 입고서 대로를 활보하고 밤새 소리를 질러도 괜찮은 해방구가 사방에 생겨난다. 주님의 이름으로 박카스의 향연을 함께 벌일 수 도 있다. 그렇게 여러해 쌓인 우울증을 풀어내기 위해서 목청이 터져라 shouting 하기에 한달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나마 금지된 수상한 짓들을 다 모아서 한풀이 하듯 shouting Korea를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붉은 악마의 군단은 모종의 승리를 약속하면서 큰 태극기를 만들고,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따라 가듯이 남아프리카 전선에서 벌어지는 축구전쟁에 참전했다. 어떤 이들은 붉은 군단의 호칭인 “악마”를 “천사”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직도 호국기독교의 발상으로 전쟁을 재단하려던 일부 인사들의 꿍꿍이는 여지없이 스러졌다. 여전히 까만 피부의 천사들은 로마의 마리아 대성당 제단 위에서 한여름에 내린 눈을 열심히 쓸고 있지만, 빨간색의 천사는 역사에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여전히 “붉은” 그 “악마들”은 발랄하고 상업적인 재치를 발전시키며 이번 축구전쟁을 나름의 승리로 이끄는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그렇게 새빨갛게 차려 입은 악마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동안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붉은 십자가도 등장하지 않았고, 세상에는 어떤 다른 심각한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온 세상은 축구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버렸으니까. 축구 과부들도 생겨났고, 축구 베이비들도 생겨났을 것이며, 물론 축구 스타들도 여럿 탄생했다. 그래서 오늘밤 내가 하는 고민은 단 한가지뿐이다. 현장감을 즐기며 이 마지막 전쟁에 12번을 달고 참전할 것인지, 한잠 잘자고 참전보고를 받을 것인지... 왜냐하면 응원하면 진다는 펠레의 저주 비슷한 징크스를 나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자고 내일 아침,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언할 것이다.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신은 늘 전쟁에서 이긴 팀의 편이라 했단다. 그리고 나는 늘 그 이기는 신의 편이 되기로 했지! 자 이제 준비한 부적을 붙이고 잠드는 것이 우승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이다.

이야기 셋 -자전거

▲ 영화 ET의 한 장면
아니, 이럴 수가? 몇 주일 전 한강 둑길에서 눈앞을 스쳐 지나가던 그 많은 자전거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 자전거가 내 손에 잡혀있다니! 흰 몸체에 연두색으로 안쪽 마감을 해서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오던 그 물건 위에 다른 이가 아닌 내가 올라 앉아있다니! 이건 분명 꿈이구나! 꿈이 틀림없구나!!!

어쨌거나 좋다. 이렇게 부드럽게 물 흐르듯이 달려나가니 저만치 흐르는 물살보다 달리는 내가 더 빠른 느낌이다. 어릴 때 배운 것은 평생 잊지 않는다 하더니 그 말이 옳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게다가 어느 한곳 막히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강을 마주하며 달리다 보니 오래 전에 잊었던 흥분이 되살아난다. 다가오는 물결마다 눈길을 주면, 찰나의 눈빛으로 대답하듯, 빛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사라지는 물결들의 그 찬란함! 지금 내 눈앞에 그 맑은 강이 다시 펼쳐져 노래하고 춤추고 바다를 향해 막힘 없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굽이굽이 돌아서는 곳마다 숨겨진 아름다움이 펼쳐 숨이 막힌다. 이런 만남을 인연이라 할까? 이 다음 굽이를 돌면 어떤 마을이 나오고, 어떤 꽃이 피어 향기를 뿜어낼까? 강 따라 잘 만들어진 이 길을 따라가면 어디쯤에 이를까?

어! 왜 갑자기 이 자전거가 하늘로 솟아? ET와 아이들이 탔던 자전거는 밤에만 하늘을 날았는데 이 한낮에 왠? 그런데 옆의 자전거들도 이 동네는 다 날아서 다니네…. 이 정도면 햇살을 받으며 이 예쁘고 흰 자전거를 타고 하늘 끝까지 가볼 만도 하겠네! 이 꿈에서 영 깨어나지 않는다 해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겠다. 아래를 보니 흙이 보이지 않게 울창한 숲이며 강이 보이는데, 그 강을 따라 달리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바로 새들의 나라인 모양이다. 환갑을 넘긴 그 오래된 전쟁 이후에 비무장 지대라는 이름으로 금을 긋고 뿌린 지뢰들 때문에 이곳에서는 모두 새처럼 날아다닌다더니, 두 날개가 없는 자전거도 새처럼 하늘의 길을 갈 수 있다더니… 그렇다면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건너편 나라까지 가 볼까.

“그래, 역시 철조망이 없어지니 자전거 바퀴를 터뜨릴 일이 없어 좋구나. 진작에 그 고철덩어리들을 걷어치우고 분단의 불안과 부담도 걷어버리고 각자의 나라를 세웠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부모형제가 살아있는 동안에 나라를 두동강 낼 수는 없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지. 그러니까 그리 오랜 세월을 이산가족으로, 형제애로, 분단국가로, 통일노래로 흘려 보냈겠지. 한나라 한민족이라 하면서도 가슴에는 한가지씩 무기를 숨겨두고, 땅에다 금을 긋고 철조망을 치고서, 죽일듯이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 또 엄청난 군사비를 물 쓰듯이 낭비하면서….”

“지금처럼 이렇게 딴 나라를 만들고 영세중립국으로 함께 살기로 했더라면, 진작에 그 애증의 가슴앓이를 걷어치웠다면, 발 내딛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이 자유의 가벼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을 것을, 또 가끔씩 한밤중에 모여 붉은 악마의 탈을 쓰고 소리지르지 않고도 멀쩡히 잘 살 수 있었을 것을 … 이제 국경선에 금을 긋는 것은 국제법으로 금지되었다지 … 그럼 축구 하느라 금을 긋는 것 말고는 땅에 쐐기를 박는 일은 없겠구나. 모든 전쟁놀이는 누가 불꽃놀이를 좀더 멋있게 하는가로 결정하기로 했다니, 정말로 잘한 일이야. 물론 밤에 자전거로 새들의 나라를 방문할 수 없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자고 있는 새들을 놀라게 하거나 깨우지 않으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겠지: ‘새들의 나라는 해가 떠있는 밝은 낮에만 방문할 수 있음’. ‘모든 종류의 불씨 사용을 금지함, 폭발물 주의’”.

“전쟁을 위해 준비한 모든 무기들을 저울에 달아보고서야 그 무기들보다 미워하는 마음이 더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니 … 악마의 뿔이 아니라 악마의 마음이 진짜 악마가 되는 자리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다행이지 뭐야. 그리고 이제 붉은 악마가 초록색 도깨비로 얼굴을 바꾸어서 슈렉처럼 되었다니 그것도 재미있네…. 자, 이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묘향산까지 달려볼까…”


그런데 강들은 밤새 안녕하신지?

한참을 달리다 다시 잠시 쉬는데 나비 한마리가 날아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해가 솟은 아침의 첫소식은 점장이 문어의 100% 적중으로 내가 응원하던 팀이 드디어 이겼다는 승전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반칙을 하지 않는 자랑스러운 나의 용사들! 역시 무적함대답다. 잠시 잠든 사이에 바뀐 세상을 돌아보고 오니 이세상도 바뀌었구나. 역시 신과 함께 하면 어느 전쟁에서든지 이긴단 말이야! 근데 언제쯤 초록테의 하얀 자전거를 타고 막힌데 없고, 경계 없는 세상의 모든 길을 지나 굽이굽이 사람들이 사는 곳을 구경하러 떠날까? 세상이 바뀌니 해야 할 것도 바뀌네. 그런데 강들은 밤새 안녕하신지?
 

최우혁/ 미리암,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원, 로마 떼레지아눔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고 마리아눔에서 마리아론을 공부하고 최근 귀국했다. 현재 서강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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