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김수환 추기경은 유신체제가 등장하여 사회적인 충돌양상이 고조되던 1972년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더욱 깊이 고뇌하면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주여 우리 겨레를 돌보소서.
비록 이스라엘과 같이 선민(選民 필자 註)은 아니오나 역시 당신의 백성이 아니옵니까?
우리 길을 밝혀 주소서.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깨우쳐 주소서.」

분노에 찬 표정들입니다.

주여 우리의 진공상태를 채워줄
진리는 어디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마음의 공백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역사는 반복된다. 중국에도 요순(堯舜)시대처럼 덕으로 다스려 천하가 태평한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의 폭군시대가 있었다. 또한 역사의 맥박을 재면서 위기를 예고하고 해법을 제시한 백가쟁명의 시대도 있었다. 물론 현대사에도 그 흔적이 뚜렷하고, 오늘 우리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런 역사의 반복이 인간사회에서는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경제가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고, 주식 투자가 항상 이득을 가져올 수만은 없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 초래한 위기에 겸허해야 하고, 위기지수가 높아지면 해법을 찾기 위해 대척점에 서 있던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관계를 정치로 풀어낸 용어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것이 민주주의일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는 것 같다. 저마다 자신만을 고집하고 위기 해법의 통로인 소통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이 1972년에 보았던 ‘분노에 찬 표정들’이 오늘 우리 사회에 가득 차다는 게 이를 반증한다. 세종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누가 말하는가? 국회표결은 그 마침표가 분노로 매듭지어졌음을 확인할 뿐이다. 4대강 문제로 드러난 분노의 표심은 이를 외면하는 미숙한 정치에 의해 그 인내의 한계만 저울질하고 있을 뿐이다. 그 분노의 표정들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민간인 사찰’까지 서슴치 않는 미숙함, 또한 소통의 불통을 더할 뿐이다.

비전2020이 무색하다. 정부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비전2020의 청사진을 내걸지만 벌써 빛이 바랜 모습이다. 참여정부도 비전2030을 외친 적이 있다. 2010년까지 제도혁신을 이루고, 2020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해서 2030년에는 세계일류국가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 야심찬 계획은 정권교체로 수면 밑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도 그와 유사한 목표를 앞세우지만 비전2030이란 말은 하지 않는다. 참여정부 시기의 용어는 금기사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가 분노의 대상으로만 포장되고 금기시되면 백성만 고달프다. 그 분노의 표적이 백성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애꿎은 민간인 사찰과 불심검문이 난무하고, 소통의 장은 금방 분노의 장으로 바뀌게 되어 이를 통제하는 전투경찰의 숫자만 늘어나게 된다.

해법은 무엇인가? 오로지 소통의 길을 찾는 것이다. 분노의 원인을 찾고 백성의 마음을 달래는 소통의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물론 한번 길이 꼬이기 시작하면 해법을 찾기 힘들다. 그래서 때로는 통치권자의 쾌도난마(快刀亂麻)식 결단이 필요하다. 제도개혁도 가능하고, 인사쇄신도 가능하다. 일본처럼 내각책임제 경우는 행정부의 색깔을 바꾸는 연정의 방식도 가끔 보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는 대통령중심제가 고착되어 그저 인적쇄신 정도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만약 대통령이 소통을 원하고 변화를 바라는데 밑에서 받들지 못하면 당연히 취할 방법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눈가림에 불과하다. 인적쇄신의 대상인 사람들은 하나의 도구요 부속물에 불과한데 사람을 바꾼다고 틀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특히 정직과 성실을 강조했다. 그는 민주화투쟁의 결실로 이루어진 문민정권의 성립을 바라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무엇인지 깊이 통찰했다. 특히 1995년 6월 29일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지면서 이를 총체적인 한국병의 결과로 진단했다.

그는 문민정부 출범 후에 표방된 ‘세계화’에 대해서도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이 결핍되어 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는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병폐와 의식 고착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담겨있다. 그러한 고뇌와 비판적 반성의 키워드는 세 번의 정권이 바뀐 오늘의 현실에서도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통치권자의 쾌도난마식 결단이 효력을 가지려면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가 국민들에게 느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마음의 공백’을 채울 방도가 없다. 오히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글쓰기마저 두려워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 한다면, 그것은 다만 슬픈 역사의 반복을 우려케 할 뿐이다.

변진흥 (가톨릭대 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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