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도다리>, 무심하고 무관심하고 무기력하고 무료한... 삶

극장에는 관객이 없었다. 나를 포함해 4명 남짓한 관객들이 서로 무심한 표정으로 각자 영화를 보고 각자 영화관을 빠져 나왔다. 전수일 감독의 영화 <영도다리>, 감독은 '인화'(박하선)라는 19살의 미혼모 이야기를 화면에 담으면서 청소년들이 많은 보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지만, 그들은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적막하고 느리고 말이 없는 까닭이다.

영화에서처럼 청소년들은 이 시간에 영도다리에서 싸움박질을 하거나, 낡은 창고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선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삭제되어 있다. 가족들의 울타리 안에서 충분히 보호받고 있거나, 피상적인 삶에 갇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미혼모(未婚母)를 다룬다기 보다 '가족이 없는 청소년'를 다루고 있다.

울타리 없이 영도다리 밑으로 부는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영화가 부산의 영도다리 주변 풍광을 여과없이 대사 없이 줄곧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 '인화' 역시 벌써부터 낡고 쇠락한 영도다리 주변의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인화'는 바다에 인접한 그 다리 주변의 허름한 방 한 칸을 빌어 살고 있으며, 정물(靜物)처럼 움직인다. 그 세계의 이미지는 '동정(sympathy)없는 세상'이다. 폐선에 아이가 버려지고, 10대들은 또래와 취객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지만,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심지어 '인화'가 낳은 아이를 입양보냈던 사회복지사 마저, 공적 장소에선 예의 바르지만 다른 사적 공간에선 '인화'에게 "너 같은 양아치같은 년들을 한 두번 본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윽박지르고 손찌검을 가하는 폭력이 연출되었다. 무력한 이들에 대한 어떤 돌봄도 발견할 수 없는 세계가 곧 영도다리의 무대다.

지난 7월 9일부터 열렸던 천주교 2010 전국 생명대회에서 강우일 주교가 기조강의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사회 전체를 어둡게 뒤덮고 있다"고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 죽음의 그림자가 '타인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으로 드러난다. '인화' 역시 다르지 않아서 선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다, 옆 자리에 서서 소변을 보다가 바다에 빠진 취객을 보고도 무심하다. 그냥 자리를 옮길 뿐, 타인의 죽음에 대해 마음을 주지 않는다. 이미 이 세상은 자신의 삶과 인연이 없다. 그저 환경일 뿐, 고독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그 자신뿐이며, 타인 역시 자신에게 냉정한 당신일뿐이다. 그나마 '인화'와 소통하고 있는 사람, 그래서 살아있는 '동물(動物)'처럼 느껴지는 것은 친구 '상미'뿐이다. 

'상미' 역시 '인화'처럼 세상을 인식한다. 남에게 기대지 않고, 또는 기대지 못하고 '필요'에 따라서 관계 맺을 뿐이다. 원조교제를 하고, 돈을 벌어서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상미', 남자 친구마저 배신하고 훌쩍 사라진 '상미'다. 이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신'에게만 몰두한다.

이런 동정없는 세상에서 19살 '인화'는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임신을 하게 되고, 삶이 주는 무력감 때문인지 '적극적으로' 처방(낙태) 하지 못한 채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영도다리 난간을 부여잡고 터질 듯한 배를 끌어안고 병원으로 향한다. 그 순간에도 다리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굉음은 소란스럽다. '인화'는 교회에서 말하는 '생명주의자'라서 낙태를 거부한 게 아니다. 세상과 단절된 상태가 빚어낸 무력감과 무료한 일상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 전부였다. 어쩌면 낙태할 의욕도 돈도 없었을 지 모른다. 친구가 전해 준 탯줄마저 자궁같은 모양의 수세식 변기에 던져버린다.

가톨릭 개신교 말할 것 없이 근본주의적 입장에 설수록 교회는 낙태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문제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어떤 성직자는 "일단 출산하라. 그럼 내가 키워줄 테니"라고 말한다. 태아생명에 대한 존중감은 훌륭한 것일 테지만, 미혼모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미온적이다. 미혼모의 아기 출산에 대한 관심과 시설은 갖추어져 있지만, 미혼모들이 지닌 사회적 환경과 상처에 대해 자못 무심하다. 그들은 미혼모라는 현실보다 '동정없는 세상'에 더 깊이 절망하고 있다. 그 소녀들이 출산하고 돌아서면 산뜻하게 일상에 복귀할 수 있는 현실은 우리 사회에 없다. 그들은 하루하루 위태롭게 빵을 벌고, 다시 거리를 헤메거나, PC방에서 반복적인 삶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무런 이유있는 사건도 없이 '인화'는 자신이 낳은 아기를 되찾고자 갈망한다. 친구 '상미'가 핸드폰에 찍어두었지만 한번도 보지 않았던 아기의 사진을 우연히 보게되고, 친구가 입원실로 아기를 위해 사다 준 '흔들개비'(모빌), 그리고 꿈 때문이었을까? '인화'는 보육원 출신이다. 그것도 '희망'보육원. 꿈에서 엄마의 손을 놓치는 자신의 유년을 발견했다. '인화'가 아기를 되찾겠다는 절박감에 휩싸이자, 처음으로 영화는 역동성을 갖는다. 복지사에게 찾아가고, 인화의 요구와 아기에 대해 무심하고, 결국 인화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그의 뒷덜미를 맥주병으로 강타한다.  그 행동이야 과격했다 싶더라도, '인화'가 처음으로 살아있는 존재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아기는 '인화'에겐 처음으로 '존재'가 확인된 '그 누구'였다. 유년기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헤어짐으로써 단절된 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인화'는 아기의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 무심하게 냉혹한 세상에 내주었고, 그처럼 자신도 한번 더 버림받았다. '버리지 않아야 할 것', 나처럼 호흡하는 생명인 존재, 나와 모태로부터 인연을 맺은 단 하나의 사람이다. 그 아기를 위해 돌진하는 '인화'다. 그 아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고, 학교도 그만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기가 '인화'에게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건네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상실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인화'를 둘러싼 환경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전히 냉정하다. 그러나 '인화'는 결국 복지사에게 입양된 아기의 주소를 물어 흰눈이 키보다 높이 쌓인 나라의 산골마을 찾아나선다. 거기서 푸른 눈의 부인과 마주 서서, 눈물을 삼키며 "아이컴프롬..." 더듬거리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영화는 거기까지다. 

'인화'에게 아기는 자기 몸에 남아 있는 수술자국처럼 자신의 흔적이다. 침대에 누워 '인화'가 수술자국을 어루만지는 장면은 곧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선 끝내 아무도 그녀를 위로해주지 않는다.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 뿐이다. 감독은 그 비애(悲哀) 속에서 스스로 희망을 건져올리는 한 10대 소녀의 안간힘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인화'가 다시 아기를 돌려받고 돌아왔는지 알 지 못한다. 10대 미혼모가 아기를 키울 수 없는 현실은 온존하고 있으며, 자신의 혈육을 타인에게 넘기는 자의 아픔은 어쩔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은 남의 일처럼 제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일상을 열심히 살 것이다. 그러나 '인화' 같은 미혼모는 '인화' 만이 아니다. 영도다리는 한국사회의 거친 한 측면이며, 온갖 아름다운 구호와 상관없이 무심한 세상과 교회는 실상 '아기만 가지려 하고' 그 엄마는 또 버려둘 것이다. 한국사회에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노령화사회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고, 정부에선 대책을 마련한다고 소란이다. 그 소란의 본질이 '단순히 생산인구의 감소'라는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에겐 희망은 없다. 또 교회에선 "태아도 인간이다"라는 원칙만 반복하며 교리수호에 열을 낼 것이다. 그 열정의 본질이 독신주의를 지키고, 육신과 여성, 그리고 성(性)에 대한 오래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역시 무망할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