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최근 자살한 연예인 박용하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또 한 사람의 연예인이 자살했다. 걱정이라곤 별로 없을 것 같은 밝고 선한 얼굴의 청년이 전기줄에 목을 매 자살했다. 매우 성공한 한류스타이고, 배우뿐 아니라 가수로서도 큰 성공을 거둔 이가 돌연 대중의 열망과 자기 자신을 영원히 분리하는 극단적 선택을 유서도 남기지 않고 단행했다.

벌써 죽음을 선택한 대중스타가 몇 명인가. 수를 헤아리기도 지칠 만큼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러고 보니, 자살한 유명인은 그들만이 아니다. 정부 관료, 재벌기업총수, 심지어 전임 대통령까지......

유명인사만이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자살자 숫자는 가히 세계적이다. IMF 재앙이 최절정에 있던 1998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최고를 기록한 이래 줄곧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게다가 2위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어, 2006년에는 OECD 평균치의 두 배나 되었다.

통계치를 노년으로 옮겨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OECD 국가 중 단연 1위인 한국의 자살자 비율이 2008년 통계로 인구 10만 명당 26명꼴인데, 60대로 오면 47.2명, 70대는 72명, 그리고 80대는 무려 112.9명이나 된다. 전체적으로 증가 속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지만, 노년층으로 갈수록 상승곡선의 추이는 훨씬 가파르게 치솟는다.

실은 노인복지 관련 기구에서 일하는 활동가 한 사람이 그 문제를 얘기해줄 때까지는 자살에 관한 심각성을 떠올릴 때도 내 생각에서 노년의 문제는 줄곳 벗어나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자료를 찾아보고 나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욕망을 바라보느라 이웃을 볼 틈이 없다

왜 이렇게 자살이 난무하는 것일까. 또한 노인의 자살은 왜일까? 사회적 발전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실존적 고뇌가 깊어지고, 죽음이 삶의 질을 선택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설명은 우리에게는 거의 사실을 담고 있지 않은 듯하다. ‘자기를 파괴할 권리’를 말하는 포스트근대적인 실존적 자살관은 분명 우리의 현실에선 너무 사치스럽다.

명백한 사실의 하나는, 20세기 말에서 오늘에 이르는 십여 년의 기간 동안 한국사회의 삶의 질은 극도로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이 기간에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신의 권리에 대한 감수성이 역사상 가장 왕성한 시기라면 바로 지금이 아닌가? 풍요롭기도 지금 만큼인 때가 또 있었을까? 영양과잉의 육체로 고민해본 시간은 도대체 언제 또 있기나 했단 말인가?

이런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절망의 현실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한데 바로 이것, 그 풍요의 논리가 죽음을 부르는 사회인 이유이기도 하다는 설명, 그것이 위의 노인복지사가 말하고 싶었던 우리의 진실이다.

상담소도 병원도 교회도, 다르지 않다

욕망은 하늘로 치솟고 있는데, 일상은 늘 거기에 미치지 못해 결핍감에 빠져 버린 사람들, 그런 이들의 사회에서 ‘이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을 바라보느라 이웃을 볼 틈이 없다는 게다. 더욱이 노인은 불편한 존재이기까지 하니 더욱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 사이 어떤 이웃은 절망에 빠졌다. 죽을 것 같은 아픔이 그이를 엄습했다. 한데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아니 많은 이들이 서성이고, 여러 말들이 오가지만,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각자 자신의 결핍감에 시달리는 이들은 그이를 살필 여유가 없다.

상담소도 병원도 교회도, 다르지 않다. 서비스 산업이 되어버린 탓이다. 서비스업은 비용이 지불될 때만 관심이 생기는 관계의 양식을 보여준다. 물론 비용 지불 능력이 없으면 관심을 받을 수 없다. 또한 능력이 있는 경우도 문제는 여전하다. 왜냐면 의료비 지출 추이를 보면, 심리적 삶의 질을 위해 사용하는 지출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매우 낮기 때문이다.

반복된 상실감과 고독감은 종종 자아를 파괴한다. 파괴된 자아는 자기 표현을 왜곡하여,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다. 이제 어떤 이들은 사람들에게 너무 불편한 이로 남는다. 앞의 노인복지사는 종묘 앞길을 지나는 젊은 여성에게 소리를 지르는 노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또 지하철 안에서 주위 사람을 향해 호령호령하는 노인에 대해 말해보라고 한다. 모두에게 불편한 그이를 사람들은 외면한다. 마치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 앞에서 손을 씻듯, 모두는 그이들의 불편함을 목도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것은 이웃 부재 사회의 모든 책임이 부적절한 행동의 노인 자신에게 있다는 시민적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이로서 시민의 죄의식은 사면받는다.

고통의 구조를 묻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우울증이라는 병증이 그렇게 많은 것은 필경 이웃 부재의 현실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은 자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대개 우울증 등으로 자기 조절 능력이 상실된 상태가 아니면, 자살의 시도는 실패율이 높다고 한다. 반면 우울증은 자살을 실행에 옮기게 하는 강한 계기가 된다. 고통은 이런 식으로 죽음을 부른다.

이제 교회 얘기로 마무리하자. 교회는 자살을 어떻게 생각할까. 말할 것도 없다. 한류스타의 죽음 직후, 한 신자가 내게 그 답을, 이미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답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이는 말한다. 그가 죽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신앙은 자살을 허용할 수 없지 않나요? 교회는 자살에 대해 그것이 옳은 행동인지를 신학적으로 판단하는 데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살피려 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아니 우리 모두를 둘러싼 고통의 구조를 묻지 않는다. 이웃 부재의 현실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살이 하나의 추세가 되어버린 사회, 가장 심각한 죽음의 요인의 하나로 부각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신앙에 대해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할 때가 되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