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주교 <경향잡지> 7월호 게재 원고 전문

이 원고는 주교회의 기관지인 <경향잡지> 2010년 7월호에 게재되었으며,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에도 송부된 원고입니다.  -편집자

1. 교회의 존재 이유

▲ 사진/김용길 기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이어받아 추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구원이란 정신적, 영적인 구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인간 전체에 대한 구원입니다. 구원이 정신적, 영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인 ‘강생의 신비’는 인간과 그의 세상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구원을 전제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Doctrina Socialis)는 구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구원은 의인들이 죽은 다음에 얻는 새 생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경제와 노동, 기술과 커뮤니케이션, 사회와 정치, 국제 공동체, 문화와 민족 간의 관계와 같은 실재를 통하여 이 세상에도 현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구원, 곧 인간 전체와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는 구원을 가져다주러 오셨습니다.’”(「교회의 선교사명」, 11항; 「간추린 사회교리」 1항)

그래서 “교회는 현세 사물에도 구원과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복음을 쉬지 않고 선포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2항)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요한 3, 16).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구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땅 끝에 이르기까지 파견하시고 ‘가서 모든 민족을 내 제자로 만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사랑의 새 계명은 이 세상에 현존하는 온 인류 가족을 포함하며 한계가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교회가 이어받은 예수님의 사랑이 개인적인 사랑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교회의 사회교리의 핵심입니다. 이 교리가 제시하는 모든 책임과 의무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체의 종합이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 36-40 참조) ‘사랑은 인간이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맺는 인격적 관계의 참된 본질입니다.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이 됩니다.’”(「진리 안의 사랑」 2항)

“사랑은 광범한 분야의 활동과 마주하며, 교회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간 전체에 관한 사회 교리를 통하여 인류에게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수많은 가난한 형제자매들은 도움을, 수많은 억압받는 이들이 정의를, 수많은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수많은 민족들이 존중을 고대하고 있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항)

그리스도교의 계시의 출발점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 높은 곳에 좌정하고 계신 추상적인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에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다가오시며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울부짖는 이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고통을 속속들이 아시고, 그들을 그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그곳으로 파견하시는 분’이십니다.(탈출 3, 7-15 참조)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찾아오시어 개입하시고 정의로 구원을 실현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속의 구체적인 인간살이와 무관하고 초월적인 절대자 하느님이란 인간이 자기 이성이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철학적 또는 신화적인 神이지 계시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살아계신 하느님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과는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고 초연하게 산야에 묻혀서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면서, 그 시대의 세상이 차별하고 억압하고 외면하였던 보잘것없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 몸으로 느끼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 분입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탐욕과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지고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정의로운 세상으로, 압제자의 왕국에서 ‘하느님의 왕국’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며 도전하시다가 반대자들의 음모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내 개인의 마음의 평화,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에 포함된 불의와 고통, 슬픔과 연민, 다툼과 평화를 다 함께 끌어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함께 고민하고, 예수님과 함께 참된 의를 실천하고, 예수님과 함께 연민과 수난의 길을 걷는 고달픈 여정입니다. 물론 그 고달픈 여정을 걸으면서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에 신뢰하며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심으로써 세상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참 평화를 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사실 거저 얻어진 평화가 아니라 수난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신 다음에야 얻으신 평화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영육으로 안락하거나 편안한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만은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피곤하고 고달픈 삶을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의 현실이 과연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야할 올바른 길에 부합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도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피곤함과 도전을 마다하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생각이나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는 인생 ‘동아리’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수많은 종교 단체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진실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을 향하여 폭넓은 시야와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의 가장 구석진 곳, 잊혀 진 사람들까지 관심과 연민으로 다가가시고 그들을 보살피고 치유하는데 모든 노력과 시간을 쏟으셨던 것처럼 그분의 제자 공동체도 서로 서로 이런 삶을 살기 위하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된 모든 이는 세상을 향하여 세심한 관심과 배려와 연민으로 다가가고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비록 오염되고 타락하고 폭력의 도가니라고 해도 이를 도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한복판에서 씨름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태생적으로 처음부터 세상 속에서 사회적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2.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나?

교회는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 32-35)

“세월이 흐르고 교회가 더 널리 퍼져 나가면서 사랑의 실천은 성사 집전과 말씀 선포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인 영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죄수, 병자들과 온갖 궁핍 속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성사 집전과 복음 선포만큼 교회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성사와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듯이 사랑의 실천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다.」 22항)

복음에 감화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귀족과 노예의 사회적 신분 격차를 넘어서서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복음의 힘으로 여러 세기 동안 수도자들은 땅을 경작했으며, 수사들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병원, 보호 시설 그리고 자선 협회를 세웠으며, 여러 계층의 남녀들은, ‘너희는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3,40)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경건한 원의로 남아 있으면 안 되고 오히려 구체적 생활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궁핍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에 투신했습니다.”(「백주년」 57항) 중세에 탄생한 교육기관, 의료 시설, 복지 시설 등은 모두 교회가 세상에 관심을 갖고 대처해 나간 열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의 과정을 거치면서 19세기의 세계는 전혀 새로운 사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소비재 생산을 위한 새로운 사회 구조, 사회와 국가와 권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 그리고 노동과 소유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함에 따라 세계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을 직면하면서 반목과 불의와 갈등이 증폭되어갔습니다. 자산을 가지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킨 자본가들의 부(富)는 급속도로 축적되었으나, 산업의 저변에서 일하는 무산 계층의 노동자들은 말할 수없는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경제적, 사회적 모순과 잘못된 사회 구조에 대하여 더 이상 간과하거나 침묵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현대 가톨릭교회의 첫 사회교서인 ‘새로운 사태’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레오 13세 교황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점차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인정머리 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되어 왔습니다. 교회가 수차례 엄중히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리 대금업은 여전히 성행하고 파렴치한 모리배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형태로 그러한 불의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산과 상업이 소수에 의해 독점 장악되어 극소수의 탐욕스런 부자들이 가난하고도 무수한 노동자 대중들에게 노예의 처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멍에를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새로운 사태」 1항)

이러한 경제 사회적 불의를 치유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재화를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때 사회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과 반목을 극대화하였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폭력을 가져오고 있었기에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의 사회적 가르침을 통하여 합리적이고 복음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 중에서 가장 잘못된 견해는 한 사회 계층이 다른 계층과 본성상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은 성격상 상호간에 끝없이 투쟁하기 마련이라고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이성과 참된 진리에 완전히 상반됩니다. 인체에는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일치하며 좌우 대칭이라 불리는 균형 잡힌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본래 국가도 부유한 자들의 계층과 가난한 자들의 계층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또 그 결과 균형을 유지하기를 요구합니다. 두 계층은 각기 다른 계층을 절대 필요로 하는데, 자본은 노동 없이 있을 수 없고 노동은 자본 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화합이 만사를 아름답고도 질서 정연하게 만드는 반면에 끝없는 반목은 혼란과 잔혹만을 조장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분쟁을 종식시키고 나아가 분쟁의 뿌리 자체를 근절시키는 놀라운 힘을 풍성히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가 해석하고 수호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게 정의가 당당히 요구하는 의무들에서 출발하여 그들에게 그들 상호간의 의무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서로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강한 힘을 지닙니다.” (「새로운 사태」 13항)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진리 안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교황들은 무려 20여 편의 교황교서를 발표하며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와 관련하여 복음의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를 선포하여 왔습니다. 이 모든 사회교리가 집대성되어 2004년 ‘간추린 사회교리’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복합적인 사건들에 대한 도덕적 사목적 식별의 도구로서 제시됩니다. 곧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모든 사람이 더 큰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태도를 가지고 선택을 하게 하는 지침서”(「간추린 사회교리」10항)이며 “그리스도 공동체들은 이 문서의 도움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영원불변한 복음의 말씀에 비추어 이를 해석하며, 성찰원리와 판단기준과 행동지침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1항)

▲ 사진/김용길 기자

3. 교회가 왜 환경 문제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 가운데 일곱째 계명에는 ‘도둑질하지 마라’(탈출 20, 15 마태 19, 18)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계명은 단순히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말씀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땅과 그 자원, 자연계 전체는 온 인류가 공동 관리하도록 맡기신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모든 인간이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는 명령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02항 참조)

“일곱째 계명은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기를 요구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 등은 그 본성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류 공동선을 위한 것들입니다. 우주의 광물, 식물, 동물 자원을 이용할 때, 도덕적인 요구도 동시에 중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무생물과 생물에 대한 지배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지배권은 미래 세대들을 포함하여 이웃에게 쾌적한 생활환경을 물려주려는 배려로 제한을 받는 것입니다. 이 지배권은 피조물 전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15항)

그러므로 교회는 “지구 곳곳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유해 지역으로 만드는 생태 위기의 전망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또한 흔히 끔찍한 전쟁의 참상으로 위협받는 평화의 문제에 대해서나,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인권 침해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항)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의 ‘발전’에 대한 오해와 집착으로 자연 환경을 훼손하고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였습니다.

“인간은 존재와 성장보다 소유와 향락을 더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그리고 무절제하게 땅의 재원과 자신의 생활을 남용합니다. 자연적 환경의 무모한 파괴의 원인에는, 우리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인간학적 오류가 잠재합니다. 자신의 노동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그 노동이 언제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물들의 원초적 선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합니다. 마치 땅에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원초적인 형태나 목적이 없는 것처럼, 인간은 발전시킬 수는 있어도 배반하면 안 되는, 그 땅을 인간이 제한 없이 자의로 사용하고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면서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세계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며, 이렇게 인간은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고, 자연을 다스리기보다는 학대합니다.” (「백주년」 37항)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뜻있는 많은 이들의 우려와 지적에도 불구하고 하나 밖에 없는 지구의 환경은 각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의 장기적인 안목의 부재 때문에 급격한 파괴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금년 1월1일 평화의 날에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십시오.’ 라는 제목으로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지구상의 여러 나라와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책임 있게 관리할 의무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고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창조 재화는 인류 전체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환경 착취 속도는 현 세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미래의 모든 세대에게 자연 자원을 공급하는 일을 심각히 위협하고 있습니다. 환경 파괴는 흔히 장기적인 정책들의 결여나 근시안적인 경제 이익 추구에서 기인하고, 결국 이는 피조물에 비극적이고 심각한 위협이 됩니다.” (‘제43차 평화의 날 담화’ 7항)

“교회는 피조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신 선물인 땅과 물과 공기를 보호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를 자멸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공공 생활에서 그 책임을 행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제43차 평화의 날 담화’ 12항)

최근의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자연에 대한 인류 전체의 책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세상 끝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이도록’(에페1, 9-10; 콜로 1, 19-20 참조)예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도 하나의 <소명>입니다. 자연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 더미가 아니라 창조주의 선물로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이 자연을 ‘일구고 돌보는’(창세 2, 15) 데에 필요한 원칙들을 자연에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자연에 내재적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 자연환경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원료 이상으로 소중한 창조주의 놀라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연에는 그것을 무분별하게 착취하지 않고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한 목적과 기준을 알려주는 ‘공식’이 담겨 있습니다.”(「진리 안의 사랑」 48항)

인류의 문명은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강은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고 생태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강은 인간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있었습니다. 강은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강은 미생물에서 시작하여 온갖 벌레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고기들을 비롯하여 온갖 풀과 나무들을 먹이고 짐승과 새들과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 주었습니다. 또 강은 이 생물들이 내놓은 모든 오물과 쓰레기를 다 끌어안고 깨끗이 정화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탐욕이 도를 지나치면서 강이 오염되고 말라가며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둑을 쌓고 모래를 파가고 흐르는 물길을 막아 강의 숨통을 끊고 있습니다. 강물이 마르고 강이 고여 썩으면 생명체의 먹이사슬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먹이사슬이 끊어지면 인간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재 4대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규모 공사들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강우일 / 주교, 제주교구장,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