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으로도 허물지 못했던 분단의 벽을 어떻게 허물 것인가

▲ 지도 위에 양측의 군사분계선을 긋는 유엔군 연락장교 제임스 머레이와 북한 연락장교 장준산

이제는 벌써 아련한 꿈처럼 느껴지는 남북대화 시절, TV로 감동의 장면들을 보면서 ‘이왕 분단될 바에야 남쪽이 공산주의국가로, 북쪽이 민주주의국가로 서로 체제가 바뀌었더라면 오히려 좋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난다. 역사에 ‘만일’이란 ‘가정(假定)’은 있을 수 없겠지만 아쉬움은 이렇게 ‘만일’이라는 가정을 세우게 한다.

그때 북의 적십자사 대표로 나와 온화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던 이종률·손성필 같은 이들이 남쪽 출신이라는 사실을 접하고서, 북의 공산체제가 남한에서였다면 ‘프라하의 봄’의 그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처럼 될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하기야 남한 역시 지난 70-80년대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재야인사 가운데 함석헌·문익환 같이 북쪽 출신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으로 봐서 보다 완성도 높은 민주주의 국가 수립에는 북방계의 강인한 특성이 필요하겠다 싶어졌다.

동서냉전의 전위대인 정권들만 들어선 비극의 남북 현대사

하지만 북방계의 그 특성은 대단히 경직된 전체주의 국가를 낳는데 악용되고 말았고, 남방계의 그 특성은 우유부단함으로 나타나 해방 이후 친일세력 척결은 물론 수차례의 민주혁명조차 흐지부지하게 만들고 말았다. 따라서 이왕 분단될 바에야 차라리 남북체제가 바뀌었더라면 보다 이상적인 국가를 낳았을 것인데, 민족의 비극은 여기에도 있었다.

결국, 동서냉전의 전위대 역할만 할 따름인 정권들이 남북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어, 단순한 민족분단에 그치지 않고 분단 고착화마저도 필연적 운명이 되었다. 공산·민주의 좌·우정권이라지만, 조선왕조 5백 년의 봉건사회에서 곧장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36년 암흑기를 보냈던 이 민족이 언제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를 알았던가. 이 민족하고는 전혀 이질적인 이데올로기가 냉전시대와 더불어 낙하산처럼 내려와 한반도를 둘로 나누고 말았으니, 좌나 우나 제 방향을 찾지 못할 것은 당연했으리라.

그만큼 남북 모두 사상적 토대가 너무나 빈약했다. 북의 집권세력에게 과거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만큼의 정치철학과 인문적 감성의 토대가 있었다면, 남의 정치가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투철한 신념이나 사상적 토대가 있었다면, 남북 대치상황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들에 의해 독일처럼 분단위기에 처했지만, 좌우를 뛰어넘어 대동단결해 끝내 단일국가를 이룬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의 넉넉한 마음과 지혜로움은 어떠한가. 허울뿐인 공산·민주국가, 오직 비정상적인 권력들이 춤출 수밖에 없는 현실, 그 전통은 다시 김정일·이명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60년 전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간 남북대치 상황

▲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 평양을 떠나는 피난민들
그런 상황에서 발발했던 한국전쟁이 어느덧 60년이 흘렀다. 그간 남북관계는 롤러코스터 타듯 대화와 대결 사이를 오가며 희비극을 연출했다. 육십갑자로 치면 한 바퀴를 돌아온 올해 남북관계는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고 다시 ‘전쟁불사’를 외치는 60년 전 그때 그 시절로 돌아와 있다. 이데올로기의 허상에 쫓겨 분단상황을 무슨 기득권인양 챙기면서 동족 상쟁의 적대행위를 거듭해온 역사의 업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를 통해 초래된 ‘빈익빈 부익부’나 ‘절대빈곤’으로 지난 세월 남북 민초들이 겪은 고통의 총량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 아픔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민족 존망의 절체절명의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큰마음의 민족주의가 요구된다. 과다한 국방비로 나타나는 ‘고비용 저효율’의 냉전구조를 해체시키고, 인도적이고 문화적인 교류와 경제협력 위주의 ‘저비용 고효율’의 평화구조를 정착시켜가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처럼 동북아 주변국가와의 정책적 공조와 민족적 주체성을 절묘하게 하나로 살려가는 길을 지혜롭게 찾아가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민족공동체 전체의 새로운 상상력 필요

무엇보다 그릇된 민족현실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여 한반도 평화와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한 남북 지도자와 정치권, 민족공동체 전체의 새로운 상상력이 요청된다.

▲ 이승만과 김구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을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김구 선생이 꾸었던 이런 꿈을 지금 우리 지도자 어느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절망은 바로 이런 데서 온다. 차제에 남북대화 통로에 아예 어둠의 장막을 치려는 MB의 행태 앞에선 절망을 지나 분노마저 느낀다. 죽임의 정치 그 손길은 예까지 뻗치고 그 몸짓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절망의 끝 간 데서 희망의 꽃은 핀다 했던가.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오리라. 60년 전, 전쟁으로도 허물지 못했던 완고한 분단의 벽은 우리 가슴이 그 꿈을 끝내 지켜낼 때 결국 허물어지리라. 마른 뼈 같은 우리의 가슴에 숨결이 임하는 그날, 이 민족의 부활이 오리라. 이 민족이 부활하는 그날 진정 통일이 오리라.

정중규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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