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필자는 이 글의 마감일이 다가올 때마다 곤경에 빠진다. 주제가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짧은 글인데 무슨 고민을 그리할까 싶지만 글을 싣는 매체가 매체이다 보니 생각이 복잡하다. 하도 주제가 안 떠올라 이런 생각도 했다. 너무 물을 많이 먹어서 문제의식이 사라졌나보다. 아냐! 그래도 가끔 할 말을 하고 있으니 완전히 물을 먹지는 않았을 수 있다. 그러면 교회와 종교에 대해 절망을 넘어 아예 포기 혹은 달관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도 변화가 없어 사실 포기한 구석도 생겼고, 종교현상을 공부하다 보니 어떤 것에는 달관한 측면도 있으니 말이다. 이것도 아니면 아예 교회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 그럴 지도 모른다. 누구든 이 병적인 증상에 좋은 처방이 있으면 조언을 부탁드린다.

과연 교회는 쇄신되고 있는가?

이렇게 한가한 생각을 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좀 심각한 생각도 많이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과연 교회는 쇄신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을 능사로 알고, 상황보다 교리를 중시하는 것을 목숨보다 소중히 하는 곳이 우리 교회인데 그나마도 잘 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 우리 교회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 인력, 부동산, 그리고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잔잔하게 국민들로부터 얻고 있는 신망까지 생각하면 남 부러울 것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러한 영향력이 짧은 시간에 약화될 것 같지도 않다.

종교사를 살펴보면 그래도 백년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종교는 ‘썩어도 준치’는 됐다. 그동안 한국인들이 종교에 보여 온 태도에 까지 이르면 앞으로 상당기간 호시절이 계속될 것도 같다. 몇 년 전에 한국종교사상사를 공부하다 삼국시대 때 한반도에서 당나라에 불법(佛法)을 배우러 간 유학생이 이만 명이었다는 기록을 보고 아연했던 적이 있었다. 그 유산이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로 이어졌고, 조선시대 유교, 서세동점 시기의 그리스도교, 일제시대, 해방 후 개신교 정권으로 이어지는 수난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어진다.

강자의 종교, 불편한 복음

유학도 오백년을 버티더니 본토보다 뛰어난 사상들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하나의 종교 세력으로는 쇠락하였으나 실생활에서 갖는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다 언제 다시 부활할지 모른다. 중국 공산당도 공자를 부활시키는 판이니 말이다. 이렇게 주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라들이 있으면 그들의 종교와 사상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긴 해도 추종하는 태도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요즘 개신교 큰 교회 목사님들과 그 교회의 신도들이 보이는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당분간 아니 상당기간 동안 그들의 ‘불편한’ 복음을 들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아주 불길한 예측이지만 그래도 종교 갈등의 무풍지대라고 평가되던 한국이 갈등의 수렁으로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라고 나을 것이 크게 없다. 지금 초대교회 때보다 공부한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숫자로 보면 수백 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그 때만큼 자유롭고 살아 있는 신앙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신학은 더 그렇다. 자신의 문화에 주체적으로 발을 딛고 연구하고자 하는 신자들이 거의 사라져 가는 까닭이다. 대신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안테나 신학만이 풍미하고 있다. 사회에서 이렇다 할 자극이 없고, 교회 내에서도 특별히 찔러대는 가시가 없는(있어도 다 잘라버렸거나, 스스로 나갔거나 해서) 상황이 되면 늘어지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람만 그런가? 식물도 동물도 경쟁자나 포식자가 없으면 나약해져 궁극에는 급격한 환경변화가 찾아올 때 도태되고 만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교회 뿐 아니라 한국 종교들이 다 이런 상태인 것 같다.

바깥에 볼일이 없으니 내부 일에 치중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로 바깥에 볼일이 거의 없으므로 내부 일에 치중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만큼 자신의 정체성을 더 강조하게 된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자기 절대주의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종교 갈등, 종교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개신교 큰 교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교회가 내부에 갇혀 있을 때는 기대와 달리 사제의 권한이 더 커진다. 외부에 대응할 일이 없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일에 치중하게 되고 교리도 더 강화한다.

그런데 신자들은 내적이고 영적인 도움을 바라면서도 교리가 엄격해지고 사제들이 내부에서 더 많은 권한을 갖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와의 갈등보다는 내부 갈등이 더 커질 수 있다. 반대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이를 철저히 지지하는 신자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아마도 사회적 강자들이 늘어나면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이러한 신앙을 받아들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경향이 심해지면 아예 권력과 손을 잡고(직접 잡기는 쉽지 않으므로) 자기와 다른 종교는 다 사탄으로 몰아가며 사실상 국교인양 행동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개신교에서 이 극단을 보고 있다.

적당한 약점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것

천주교회가 이런 정도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소극적으로 최악을 피해가는 소극적인 방법보다 사도 바오로를 따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몸 안에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가시(병이었을 수도 있다)가 있다고 고백하였다. 만약 가시가 없었다면 그는 교주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몸 안에 그런 가시도 없고 외부에서 찔러대는 칼도 창도 없으며, 웬만하면 좋은 평가를 해주는 상황에서는 성찰 능력이 떨어진다. 교회 안에 언론다운 언론이 없고, 쇄신을 주장하는 이들이 사라지며, 어느덧 나누기보다 지키기에 급급하는 모습 등이 더 커지면 반드시 이렇게 된다.

이런 모습을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덩치가 너무 커지고, 가지와 잎사귀가 많아지다 보니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또 어떤 문제를 키우고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설사 이런 문제를 보았다 하더라도 막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큰 권력과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 신앙을 선택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힘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기에 언제고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런 신자들이 많으면 사제도 같이 움직이게 된다. 그렇게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한국교회의 전체 모습이 된다.

이렇게 형성된 모습 가운데 당연히 좋은 것들도 있다. 아직 우리는 이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을 믿고 운동을 안 하는 이십대가 몸 관리를 잘 하는 사십대 보다 건강할 수 없다. 적당한 약점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약점이 많으면서도 약점을 보지 못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과연 우리는 쇄신하고 있는지, 그래서 정말 쇄신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부디 내 눈에만 안 보이는 현상이기를 바란다.

/2008.8.20.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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