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천주교뉴라이트 신도들의 신문광고를 보고

며칠 전 이웃에게서 전화 연락이 왔다. <동아일보>에 천주교 단체에서 실은 광고가 나왔는데, 내용이 재미있으니 한 번 보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동아일보를 구독하지 않는 까닭에 기사를 오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가져온 광고를 보니 “한국 천주교회는 더 이상 상처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뜻있는 “천주교 평신도 전국협의회, 천주교 뉴라이트 전국협의회, 천주교 북한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 회원 일동”으로 되어 있었다.

이 광고를 보면서 갑자기 이십년 뒤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문구들이 5, 6공 시절 정의구현사제단이 나서면 으레 등장하던 괴(怪) 단체와 괴 전화가 동원하던 어법(rhetoric)과 거의 같아서였다. 두 번째로, 그때나 지금이나 괴(怪) 자를 붙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신들의 신원을 꽁꽁 감춘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듯 말하는데, 그들이 동원하는 말투는 과거 군사정권이나 기득권층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늘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사제도, 교회도 안중에 없이 다 ‘친북좌파’라 몰아가는 태도이다.

이 분들이 한국 천주교회의 대다수 신자와 사제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용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도 꽤 있는 것처럼 읽힌다. 사제들에게 훈수를 하는 것을 보니 이 ‘뜻 있는’ 평신도들은 여러 면에서 지도급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교회의 흐름에 민감한 필자는 물론 교회 언론에서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큰 조직을 만든 것 같은데 교회의 공적인 영역에서는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교회내의 임의 단체 또는 그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유령단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07년 5월 19일 가톨릭뉴라이트 창립식. 이날 행사에는 이상득 국회부의장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 뉴라이트교사연합 두영택 상임대표 뉴라이트학부모연합 김종일 대표 뉴라이트청년연합 장재완 대표 뉴라이트전국연합 제성호 대변인 겸 공동대표 등이 참석했다.(사진-뉴데일리)
자신들의 행동은 비정치적이고 사제단은 정치적 행동을 했다고 우기는 괴 단체

이들이 어둠에 숨어서 그 어느 조직보다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신앙 보다는 특정 정당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조직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은 비정치적이고 사제단은 정치적 행동을 했다고 우기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잘 모르는 신자들인 것 같다. 혹시 안다고 해도 자기 식으로 해석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복음의 메시지가 갖는 예언적인 측면이 현실에서는 정치적으로 표현된다는 사실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교회는 불편부당하게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지만 어느 교회나 신자도 윤리적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이분들도 좀 아셔야 할 것 같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자신들의 선택이 복음적이라 생각한다면 <가톨릭신문>에도 <평화신문>에도 전면광고를 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기득권층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일부 언론(조선 중앙 동아일보)만이 아닌 모든 언론에 광고를 실었어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평신도와 대부분의 사제들’의 의견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 방법도 공개했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주장도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이 분들도 아시기를 바란다. 사회윤리에서는 중립을 가장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도 기득권자의 편을 드는 것이라고 본다. 자신들의 주장이 어떤 맥락에 있는지도 같이 볼 수 있어야 ‘뜻 있는’ 평신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격이나 비난이 아니라 참으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요즘 사제들이 과거와는 다른 위치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과거에는 무슨 강론을 하든 침묵하던 신자들이 이제는 종종 이의를 제기하는 모양이다. 강론 내용 뿐 아니라 본당의 일상 운영에서도 불만을 갖는 신자들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아무 말도 안 하던 신자들이 이런 말이라도 하는 것을 나름의 성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 보는 분들이라면 앞의 분들을 '뜻 있는‘ 평신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많은 신자들이 조용히 공동체와 사목자에 협력하는 것은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들은 침묵 가운데 공동체와 사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윽박지르거나 비난한다고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자식들에 대하여 무한책임의식을 가지고 조용히 기다려주는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다 필요하면 진심을 가지고 발언한다. 조용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격이나 비난이 아니라 참으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좋은 뜻‘을 가진 평신도들이 많으면 교회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뉴라이트 간부들이 미국 쇠고기 안정성을 보여준다면 시식하고 있다.
시청역에 노숙하는 분들은 야간에 사제단 천막을 지켜주었다

얼마 전 사제단이 단식하는 천막에서 다섯 시간 정도를 머문 적이 있었다. 저녁 시간이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신자가 아닌 분들이 꽃다발에, 종이학에, 생수에, 심지어 모기장을 가져다 놓았다. 어떤 분들은 사제단에게 하염없이 절을 하기도 하고, 천막 앞을 떠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격려와 감사의 말을 그 짧은 시간에 수없이 들었다. 심지어 어느 성공회 신부님은 ‘같은 신부지만 천주교 신부님들께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고 말했다. 시청역에 노숙하는 분들은 야간에 사제단 천막을 지켜주었다. 필자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 분들은 친북좌파가 아니다. 참으로 평범한 시민들이다. 이분들이 감사해 하는데 천주교 신자와 사제들 대다수가 사제단을 반대한다면 천주교는 기득권층이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대다수가 그랬을 리 없다. 대책회의 간부들이 조계사로 간 것도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제 명동성당은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70-80년대 사제단의 용기 있는 행동은 교회 내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톨릭교회를 가장 위신이 높은 종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교회내의 작은 반대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택하고,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였을 때 신자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먼저 알아보았다. 사제단이 거리에 나설 때마다 늘 악선전이 되풀이되었지만, 국민들은 입교(入敎)와 호감으로 평가를 대신했다. 거의 언제나 사제단의 말이 진실로 입증되었다. 이런 역사를 조금이라도 되돌아본다면 지금 우리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뜻 있는’ 평신도라면

참으로 ‘뜻 있는’ 평신도라면 자신이 현재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는지 잘 보아야 한다. 누구도 백퍼센트 옳은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식별이 필요한 것이다. 식별이 되고나면 나의 선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잘 보아야 한다. 그 상황에서 불의로 희생을 당하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복음이다. 이런 복음적 예민함이 없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누르는 자의 편에 서게 된다. 복음에 예민하고, 알아들었으면 그대로 사는 참으로 복음을 따라 사는 ‘뜻 있는’ 평신도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2008.7.9.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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