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교회에 있을 만큼 있어봐서 인지 이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구별이 되는 편이다.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래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어 온 것이 이십년 이상이라면 그것도 열심히 공부하며 보내서 얻은 결론이라면 아직 내 신앙이 부족하든지 아니면 없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나만 이런 것을 느끼는 게 아닌 것을 보면 ‘안 되는 게’ 있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러한 일 가운데 하나가 제도와 카리스마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필요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

교회생활에서 웬만큼 노력하다 안 되면 결국 책임자인 ‘누구 탓’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사제의 입장에서는 교구장 주교, 신자-본당수녀-보좌신부의 입장에서는 주임신부, 평수도자는 장상, 그리고 위계가 설정되어 상하관계로 묶여 있는 교회 조직 대부분의 곳에서는 비책임자가 책임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수없이 쇄신 논의를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아직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고 있다. 이러한 책임전가의 결과는 구성원들이 소극적이고 방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 생활 하면서 “내 생각은 필요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괜히 창의적이랍시고 열심히 해봤다가 몇 번 좌절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래서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돼. 시키면 하고 일 없으면 놀면 되는 거야.”하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고, 지금 이 순간도 듣고 있다. 더러 협의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리더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는 잠시일 뿐 다시 단단한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처음에는 노력하다가도 머잖아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 또는 의도적으로 ‘명령’이라는 손쉬운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 위계에서 낮은 곳에 있으면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다들 불만 없이 수용하면 그만이겠지만 대통령도 끌어내리는 시대에 참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때문에 ‘평화’를 추구하는 곳에 ‘불화’가 만연하다.

‘평화’를 추구하는 곳에 ‘불화’가 만연하다

이러한 상황이 복음적이지 않으니 누구도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이 상황을 개선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제도의 벽에 부딪힌다. 문제는 일부가 아니라 모두가 이러한 벽에 부딪힌다는 사실이다. 당장은 누가 더 나은 자리에 있고, 덜 나은 자리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궁극에는 누구도 제도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면에서 같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물어도 가톨릭은 ‘위계제도’가 특징이라고 하는 답을 손쉽게 들을 수 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이천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이 세상의 어느 제도도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이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된 것이다.

이런 틀에서 개인은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카리스마를 통해 교회의 불을 밝힌 수도회 창설자들이 고목나무에 새로운 싹을 틔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카리스마도 두 세대를 넘기지 못하였다. 카리스마와 제도가 긴장관계에 있으면 언제나 제도가 카리스마를 일상화(routinization)시키는 까닭이다. 카리스마를 통해 더러 영양제를 보충 받기도 한다. 하지만 보충일 뿐 나무 전체를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카리스마적 운동을 시작한 누구도 교회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것이든 한 세대를 지나면 자체에서든, 제도가 갖는 보수성에서든, 그도 아니면 신앙인들이 갖는 보수성에서든 기존 질서에 통합되는 것을 역사에서 수없이 보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희망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쇄신을 부르짖고, 또 그 방법을 찾고, 다시 좌절하고, 또 다시 쇄신을 시작한다. 아마 이것이 교회의 숙명일 것이다.

쇄신, 교회의 숙명, 한계를 넓히는 것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였다면 선택이 필요하다. 1) “역시, 안 되는 거였어. 그래 떠나든지 아무 생각 없이 지내든지 둘 중에 하나야.” 2) “이런 상황에서도 성령은 빈틈을 찾아 들어오고 고목나무에 생명을 주실 수 있어. 나도 마찬가지잖아. 작심삼일 하면서도 늘 새롭게 결심을 하고. 더러 삼일을 넘기는 일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저 끊임없이 희구하고 노력하는 거야.” 3)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약하지. 강한 충격이 필요해. 강력한 쇄신운동을 전개해야해.” 또 등등의 해결책이 교회의 신원 모두의 머리에 맴돌고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정답이 없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안 바뀐다. 왜? 한계니까. 그저 한계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지 제도 자체의 근본적 개혁은 불가능하다. 카리스마를 강조한 방식은 개신교의 탄생으로, 소소한 카리스마의 충동은 신심운동이나 성령운동으로 표출되었거나 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큰 충격도 있을 수 있다. 앞으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도 교회에서 카리스마의 이탈을 막을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성령은 답을 갖고 계실 것이다. 교회관은 이 말고도 다양하니 나의 짧은 이성으로 제대로 못 보았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경험세계 안에서는 한계로 보인다.”는 잠정적인 결론이 되겠다. 그래서 큰 기대를 걸지 않고 누구도 탓하지 않으며 소신껏 선택한 신앙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박문수 200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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