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덕진]

지금으로부터 500여 일 전, 2009년 1월 20일 영하의 추운 겨울날 새벽, 민족의 명절이라는 설 명절을 일주일도 남기지 않은 날, 용산 국제빌딩 옆 남일당 건물 옥상에 세워진 철탑 망루에서 여섯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각기 다른 삶의 곡선을 가지고 저마다 행복한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던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 명이 죽었다. 그가 철거민이었든, 경찰이었든, 이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잔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었다.

2010년 1월 9일, 1년 가까이 치르지 못했던 용산참사 철거민 다섯 분의 장례를 치르고 또 5개월이 지났고 용산 망루 농성 철거민들은 항소심에서도 징역 5년과 4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동안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는 4대강 삽질, 지방선거, 남아공 월드컵 그리고 천안함 침몰이라는 안타까운 비극까지 크고 작은 다른 일들을 향해 있었다.

이제 용산참사를 화재로 떠올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항소심 선고 소식도 단신으로 처리될 수 밖에 없었고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다섯 열사의 묘비 제막식을 취재 온 기자들은 없었다. 가끔 뉴타운, 재개발로 철거되는 현장 이야기가 언론에 나올 때 용산참사를 언급하는 정도로, 그보다 더 가끔 유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의 기억 속에서나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마석 묘지 제막식

수도권에서만 1,200 곳이 넘는 동네에서 뉴타운이니,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용역회사 직원들은 여전히 욕설을 내뱉으며 협박을 하고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은 쉴 사이 없이 건물을 부수고 잔재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원래 살던 주민들을 쫓아내고 집을 사는 ‘곳’이 아닌 사는 ‘것’으로 만든 이 땅의 건설자본들과 그 자본의 달콤함에 취해 자본을 위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며 서민들에게 등 돌린 대한민국의 권력은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던 여섯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아니 그들은 여섯 사람을 죽였다. 용산참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줄어들겠지만 매섭게 추웠던 2009년 겨울 새벽 용산에서 있었던 '죽음'과 '죽임'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게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알려진 것처럼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대정부 협상을 담당했던 협상 대표였다. 그러나 여름이 될 때까지 5개월 동안 난 협상대표로서 단 한 차례의 협상도 할 수 없었다. 정부의 어느 기관에서도 ‘용산’을 만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은 용산을 외면했다. 처음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1년 동안 장례도 치르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국민 여섯 명이 공권력의 진압작전 중에 사망한 이 참혹한 사건을 정부가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냉동고에 모셔 둔 다섯 분이 부담스러웠는지 정부관계자들은 앞을 다투어 용산문제 해결을 들고 나섰다. 이후 ‘용산’은 국무총리를 만났고 서울시장도 만났다. 서울시 책임자들과는 스무 번이 넘게 만났다. 정보기관의 인사들은 물론 경찰, 용산구청의 직원들과 셀 수 없이 만났다. 야당대표들과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용산’의 유족들과 철거민들, 그들과 함께 1년을 살아낸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과 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람의 '힘'으로 살아... 쌀포대와 라면,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4층, 명동성당 영안실 그리고 용산 대로변 남일당 건물 맨바닥에서 1천 끼가 넘는 밥을 지어먹고 은박 돗자리 하나 깔고 371일 동안 잠을 잔 진정한 이유를 몰랐다. 아들보다도 어린 용역회사 직원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고 뒷덜미를 붙잡혀 질질 끌려다녀도, 단 한 번 우리 편이었던 적이 없는 경찰에게 아무 이유 없이 잡혀가고, 그림과 현수막을 빼앗기고, 온갖 협박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용산을 떠나지 못했던 우리들의 진심을, 잠시 남일당에 들렸다만 가는 이들은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사람이 죽어서 처음 용산에 모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용산참사의 해결은 유족들과 철거민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1년을 하루처럼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은 ‘사람’의 힘이었다. 용산을 기억하고 용산을 찾아왔던 수많은 사람, 용산에 와서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 후원금을 보내고, 쌀을 보내고, 김치를 보내주던 사람들의 힘, 꼭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용산참사가 발생하고 강제로 부검 된 다섯 분의 시신이 한남동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로 모셔지고 유족들과 우리가 장례식장 4층에 들어섰을 때는 모든 것이 막막했다. 한꺼번에 다섯 분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니 모든 것이 일반 장례보다 다섯 배가 더 들었다. 고인들께 올리는 음식과 술, 냉동실 사용료, 상복 대여비는 물론 조문객들이 소비하는 음식값도 다섯 배였다. 합동 분향소에 설치된 초와 향 말고는 모든 것이 다섯 배였다.

참사가 발생하고 닷새 만에 설 연휴가 찾아왔고 고향 대신 순천향병원을 찾은 이들은 유족들과 설 연휴를 보내면서 이 싸움이 길어질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어렵게 장례식장 측에 양해를 구하고 모든 음식을 지어먹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 추운 겨울 아스팔트 위에 스티로폼을 깔고 천막을 쳐서 간이 주방을 만들었다. 그러나 매일 수 백 명이 드나드는 영안실의 음식을 직접 마련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필요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영안실의 살림을 맡고 있던 나는 전국의 천주교 성당과 수도회에 용산참사의 참혹함과 유족들과 철거민들의 애닮은 사연을 담아 이메일을 보냈다. 나뿐 아니라 설 연휴를 함께 보낸 많은 이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나처럼 전국각지에 연락했다. 몇몇 인터넷 신문들은 그런 사연을 게재해주었다. 용산을 생각하는 이들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대단했다. 그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며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 중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밥을 지어먹기 시작하자 당장 쌀이 급했다. 쌀을 사서 먹자니 이틀에 20kg 한포대가 소비되는 쌀값을 감당 못하겠고 쌀을 보내주겠다는 농민회들은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인천에서 민들레무료국수집을 운영하시는 서영남 선생께서 직접 트럭을 몰고 순천향대학병원으로 오셨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햅쌀 스무포대와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울 만큼의 김 상자들이 장례식장 생활 초반을 을 넘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부산에서 공부방을 운영하시는 안젤로 수녀님이 보내주신 A4용지와 라면은 또 얼마나 요긴했는지 모른다.

니 놈이 쓴 편지 읽고 너무 마음아파서

문규현 신부께서 순천향대학 병원에 처음 방문하신 날은 두 번째 오체투지 순례를 떠나시기 3일전이었다. 전주에서부터 손수 차를 운전하고 올라오신 신부님은 본당 바자회를 준비한 성당 신자들이 내어 놓은 것이라며 떡국 떡 50kg과 양파즙 300봉지에 거액의 후원금을 모아오셨다. 유족들과 철거민들, 범대위 식구들은 정말 맛있게 떡국을 끓여 먹었다. 이 땅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아무도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오체투지의 길을 준비하시면서 짬을 내시어 올라오신 신부님께서는 내 어깨를 툭 치시며 “니 놈이 쓴 편지 읽고 너무 마음아파서 왔다”라고 내 어깨를 툭 치시며 영안실을 나서셨다.

문규현 신부의 그 한마디가 날 1년 동안 용산에 붙잡아두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문규현 신부는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생명평화 단식기도를 이어가시던 중 열하루 째 쓰러지셨다가 예수님의 부활처럼 사흘 만에 깨어나셨다. 난 신부님께서 혼수상태에 계실 때 강남성모병원 앞 벤취에 앉아 결심했었다. 만일 문규현 신부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이 정권의 끝을 보기 위해 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고 다짐했었다. 다행히 신부님은 깨어나셨고 심장에 보조 장치를 부착하시고 퇴원하시고도 용산을 잊지 않으셨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농담을 건네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보여주셨다. 신부님의 쾌유는 용산 참사 싸움의 승리만큼 기쁜 일이었다.

찬영아, 유찬아.. 정말 고맙다

▲찬영이, 유찬이가 보내준 저금통에서 나온 귀한 마음
어느 날 용산 남일당 분향소에 가니 영정들 앞에 작은 돼지 저금통 두 개가 놓여있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분향소를 방문한 초등학생 아이들이 영정에 절을 하고나서 가지고 온 돼지 저금통을 하나씩 꺼내 종종걸음으로 영정 앞에 놓고 갔다고 전해 들었다. 찬영이와 유찬이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 저금통 두 개는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아이들이 저금통을 다 채우면 꼭 갖고 싶은 무엇인가를 사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저금통을 들고 집을 나설 때 아이들은 망설이지 않았을까? 도대체 이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용산참사를 무어라 설명하며 이 저금통을 들고 나오게 했을까? 찬영아, 유찬아.. 정말 고맙다. 난 너희들에게서 세상을 배우는 구나.

크리스마스에 남일당 분향소를 찾았던 광주의 한 여고에 다니는 이동언이라는 학생도 기억에 남는다. 이 친구는 망설이다가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돌리고 모금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학생은 다른 친구들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그런다며 조용히 교실 밖에서 만원짜리 지폐를 건냈고 어떤 학급은 학급생 전체가 동의하여 남은 학급비를 통째로 내었다고 한다. 선생님들도 기특하다며 흔쾌히 동참했다고 한다. 이동언 학생은 편지에 “역사는 항상 정의의 편입니다. 여러분이 정의의 편에 계십니다.” 라고 썼다.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살아왔던 말이지만 이동언 학생에게 들으니 새삼 힘이 솟았다.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리고 용산을 떠올리셨다는 한분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갑자기 닥친 어머니의 죽음이 너무 억울해서 똑같이 억울한 죽음을 맞으신 용산참사 철거민들을 찾아오셨다며 조의금을 놓고 가셨다. 일주일 쯤 후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가 미사가실 때 들고 다니시는 가방 안에서 천원짜리 신권 한 뭉치를 발견했다며 이렇게 정성을 모아 봉헌하시고 싶으셨을 어머니의 마음을 대신해 용산에 봉헌하신다며 두 번째 봉투를 놓고 가셨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앞에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셨을까? 이름도 적혀있지 않아 누구신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지면을 빌어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내 생애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선물해 준 사람들

어찌 기억나는 분들이 더 없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어 주었던 전국 각지 방방골골의 사람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제일 먼저 추수한 쌀로 용산 식구들의 밥을 지어먹이고 싶다고 들고 오신 분, 결혼식에서 화환대신 받은 쌀을 보내주신 분, 김장김치 50포기를 손수 가져오신 분, 주방이 딸린 차를 직접 가져오셔서 짜장면 100그릇을 만들어 주신 분, 매일 미사에 오셔서 미사 안내를 맡아주셨던 분들, 오실 때마다 김밥과 떡을 싸오시고 나물이며 장아찌를 손수 담구어 오신 수녀님들, 매주 화요일마다 저녁식사를 도맡아 주셨던 서울의 한 성당 신자들... 그 작지만 따뜻한 마음을 도대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자본과 공권력은 내게 가장 시리고 눈물 나는 용산에서의 1년을 살게 해 주었지만 이 분들은 내 생애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선물해 주었으니 용산에서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종회, 박래군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이나 남경남 전철연 의장 등도 진작부터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10개월 가까운 수배생활을 견디어 냈고, 용산범대위 상황실 활동가들도 기존의 일과 사생활을 모두 버린 채 용산에 오롯이 1년을 바치며 살아준 고마운 이들이다.

 

▲기도와 함께 마음으로 후원한 신권 지폐

 

세상을 위해 할 일이 있음을 증거 해 준 사제들

전종훈, 이강서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남일당 본당 신부를 자청했던 이강서 신부, 천막을 짓고 삭발을 하고 단식기도를 하며 전국에서 시국미사의 바람을 일으키고 시청광장에서, 남일당 앞 용산대로에서 경찰에 가로막히고 팔이 꺾이면서도 남일당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는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과 함께 했던 오체투지의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 채 다시 용산에 천막 기도처를 지었다.

멀리 원주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달려오는 유이규 신부, 용산 천막을 지키다가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현장까지 달려가 매일 미사를 봉헌했던 강정근 신부, 영원한 사제들의 대변인 김인국 신부, 묵묵히 용산 현장을 지키며 천막기도처의 살림을 맡았던 나승구 신부, 10년간의 이태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바로 다음날부터 용산천막을 지켜 온 장동훈 신부 등 용산에서 정의가 살아있음을, 여전히 종교인들이 세상을 위해 할 일이 있음을 증거 해 준 사제들의 이름을 다 불러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 사제들은 또 지난 5월 4대강 삽질 중단을 호소하며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보름동안 노숙 단식기도를 진행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로 밖에는 달리 드릴 말이 없다. 전국의 성당과 수도회에서 모인 정성은 그 후원금의 액수도 엄청났지만 물품 후원도 대단했다. 천주교인들이 용산에서 보여준 힘은 오만명을 다 배불리 먹이고도 일백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였다. 오래전 주일학교 교사를 그만두며 성당과의 인연을 끊었던 나를 다시 성당에 가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종교의 힘, 그리고 위로

기독교인들과 불교인들 역시 용산을 위해 큰 힘을 보태주었다. 서울 봉은사 명진스님은 천일수행 중 모으신 시주금 1억원을 유족들 후원을 위해 쾌척해 주셨고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선출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용산 현장을 찾았다. 김삼환 목사가 이끄는 한국교회봉사단은 유족들을 위한 지원금 1억원과 모란공원의 묘지대금을 부담해 주었고 매주 목요일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평화 예배를 이어갔다. 전국의 사찰과 교회에서 각종 후원 물품들과 후원금들이 답지했고 용산참사 철거민들과 유족들을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종교의 힘이 라는 것에 다시금 경탄하는 순간들이었다.

용산 남일당을 이야기하며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용산을 지킨 미디어 활동가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이 1년 동안 찍은 필름을 한 줄로 이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촬영만 한 것이 아니라 남일당에 생명력을 가져왔다. 그들이 레아 미디어팀을 꾸리고 카페 레아를 시작하면서 용산은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가끔 그들이 직접 볶아서 뽑아준 원두커피를 맛보곤 했다. 용역회사 직원들하고 시비가 붙거나 경찰이 철거민들을 잡아가려고 하고 현수막을 떼어가고 천막을 부술 때도 카메라를 들고 와서 그 폭력의 현장을 찍어 증거를 남겨주었다. 추모집회마다 영상을 만들어 주었고 인터넷 UCC를 점령했다. 이들은 지금 또 청테이프를 칭칭 감은 카메라를 들고 소외된 이들의 눈이 되고 기억이 되어 주고 있다. 특히 미디어팀의 최고령 작가로 용산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담아 “용산 남일당 23×371”이라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낸 오두희 여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현장을 찾아 시를 쓰고

아마 용산에서의 1년 동안 양심과 혼이 살아있는 모든 문화예술인들은 용산을 다녀갔을 것이다. 그중 송경동이라는 걸출한 시인을 우리는 만났다. 평택 대추리에서,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그를 만나왔지만 용산에서 송시인은 대(大)시인이 되었다. 민중시인 송경동은 시를 지어 낭송할 때 마다 사람들을 울게 했다. 그는 경찰들과 싸우면서 시를 지었고, 술 마시며 시를 지었고, 회의하면서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우리 모두의 절규였고 희망이었다. 그는 투사로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그가 시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공선옥, 도종환 등 유명한 문인들이 현장을 찾아 시를 쓰고 글을 썼다. 이 문인들이 엮은 책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는 두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글에서 글쓴이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감동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글이 눈물을 흘리고, 글이 절규 하고, 글이 속삭이고, 글이 분노하는 책을 만들어 준 작가들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

안치환, 한동준, 노래를 찾는 사람들, 박준, 꽃다지, 최도은, 윤미진, 지민주 등 수십 명의 노래꾼들은 수시로 용산에 불려와 열악한 음향시설에서 최고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차비 한번 보태드리지 못하고, 된장찌개 식사 한번 대접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말로만 고마움을 표하고 말았다. 연극인들은 매주 금요일 ‘끝나지 않는 연극제’를 열어 대부분의 철거민들에게 생애 첫 연극 관람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제주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부산에서 한 걸음에 달려온 이 연극쟁이들에게 편안한 잠자리 한번 준비해 드리지 못한 죄송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과정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꼼꼼하게 챙겨 준 극단 한두레 김경화의 노고 역시 무엇으로도 보답하기 힘들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정말 중요한 순간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준 고마운 사람이다.

김순옥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

무엇보다 전미영, 이윤엽 등의 미술가들은 용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다 망가져서 폐허가 되어있던 김순옥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 남일당 건물과 레아 건물을 커다란 설치미술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들이 붓과 페인트 통을 들고 벽에, 유리창에, 샷시에, 간판에, 아스팔트에 붓질을 하면 그 자리가 미술관이 되고 박물관이 되었다. 미술가가 아니라 마술사 같은 그들은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며 용산을 지켰다. 그들의 그 끝없는 열정은 ‘끝나지 않는 전시’라는 책으로 탄생했고 망루전(亡淚戰)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이들의 활동으로 생긴 모든 수입을 백원짜리 하나까지 용산범대위에 기부하여 예술가들이 왜 배고프게 살 수 밖에 없는가를 이해하게 해 주었다. 지금도 현장미술가들의 두목 전미영 서울 민족미술인협회 대표가 시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작가들이 모여 ‘미영이가 시킨 전(展)’이라는 이름으로 용산을 기억하는 전시회를 계속하고 있다.

모두 다 너무나 감사드리고 눈물 나게 반가웠지만 ‘거리의 신부, 깡패 신부’ 문정현 신부께 가장 애틋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어깨 수술에서 채 회복되지도 않은 노구를 이끌고 홀로 기차에 몸을 싣고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을 찾아 오셨다. 유족들의 손을 잡고 말없이 한참을 우시고는 군산으로 돌아가자마자 전국을 누비던 ‘꽃마차’를 이끌고 용산참사 현장으로 오셨다. 그날부터 매일 저녁 7시 남일당 참사현장에서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겠다 선언하셨고 장례가 결정되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사를 집전하셨다. 용역회사 직원들과 경찰들의 무례함과 폭력을 문정현 신부만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는 이가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아프고 억눌린 이들과 이렇게 쉽게 하나가 되어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이가 이 땅에 또 있을까? 문정현 신부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오지만 흐뭇한 미소와 함께 든든한 마음이 드는 것이 어디 나 혼자만일까? 이 노 사제가 오래오래 지금처럼 우리 곁에서 기도하고, 밥 먹고, 잠 잘 수 있기를... 불의한 권력에 호통을 치고, 가진 자들의 오만을 꾸짖고, 막걸리 한잔에 행복해 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시청광장을 오백번쯤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한순간의 흔들림 없이 고인들의 곁을 지켜 온 유가족들, 돌아가신 분들과 옥에 갇힌 동지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단 한명의 이탈자 없이 끝까지 함께 한 용산 4구역 세입자들에게 감사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 곳곳에서 외롭고 처절하게 자본과 싸우고 있는 철거민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아직 용산참사 싸움을 끝내지 않았다. 항소심이 끝났지만 대법원에서 다시 한번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혀 볼 것이다. 이 정권하에서 진실을 밝힐 수 없다면 십년, 이십년이 지난 후에라도 꼭 밝혀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우리를 끝까지 가게 할 것이다. 또 자본과 권력에 의해,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부당하게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용산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산참사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이 싸움을 계속하기를 다짐하고 있다. 용산의 다섯 철거민들이 먼저 시작한 이 싸움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 제도개선 위원회 발족식

 


용산참사 현장과 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난 송경동처럼 사람들을 가슴으로부터 울게 하는 시를 짓고 싶었고 박준처럼 막힌 속을 뚫어주는 노래를 하고 싶었다. 전미영이나 이윤엽처럼 천마디 말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예술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박래군처럼 글을 잘 쓰고 싶었고 이종회처럼 동지들을 잘 챙기는 사람이고 싶었다. 충청도 이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지어 동지들을 먹이고 싶었고 박도영처럼 무엇이든 다 만들어 내고도 싶었다. 신유아처럼 용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나서고 싶었고 이원호처럼 성실하고 선한 활동가가 되고도 싶었다. 이 모든 이들이 만들어 낸 묘한 조합이 용산 승리의 유일한 힘이었다. “2009년의 용산”에서처럼 사람의 기도를, 사람을 위한 싸움을, 사람에 의한 하루하루를 다시 만나 볼 수 있을까?

여전히 가려져 있는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열사들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우리들의 끈질긴 의지와 반드시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기고 말 것이라는 태산 같은 믿음이 먼지만큼도 변치 않고 1년을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심장의 절반쯤을 시큰거리게 만들었던 이 땅의 사람들, 양심들 덕분이다. 시간이 흘러 용산참사가 사람들 기억속에서 잊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사람이 가장 큰 희망이고 사람이 가장 큰 힘을 가졌다”는 진리를 깨우쳐 준 용산의 승리는 기억하자. 그리고 그 승리의 기억으로 4대강 삽질도 막아내고, 오만과 독선의 정권도 정신차리게 해 주자. 용산의 승리는 당신의 승리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용산범대위 대정부 협상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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