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 신부의 <무지개 원리>를 읽고

참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 한 권이 있다. 이리도 진도가 안 나가는 이유는 새로울 게 없는 글을 부득이 한번쯤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겉표지 부터 나 같은 사람은 필수적으로 꼭 읽어야 한다는 눈짓을 보낸다. 우리는 이제 ‘전인적 자기계발 원리’가 필요한데, 이 책에서 필자는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책을 읽은 뒤에 드디어 그 원리를 자신이 발견하였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정도 공력으로 얻은 지혜라면 누구라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으리라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45년 동안 그다지 부유한 축에도 성공한 사람의 축에도 끼지 못한 채 어찌 보면,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부 인생들이 지니기 쉬운 ‘실패하기 쉬운 인생관’을 켜켜이 몸에 마음에, 필자의 언어대로 ‘뇌’에 쌓아둔 채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인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내 인생관과 내가 그동안 존경해 마지않던 스승들을 옆으로 밀쳐 두어야 가능한 것을, 좁아터진 마음에 그렇게는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성공’하는 삶을 목표로 두고 훈수를 두고 있는데, 내가 사귀던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실패’를 자초해왔던 사람들뿐이다. 결국 사람이 잘 되려면 친구를 잘 만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존경해 마지않던 인물 중 하나인 토마스 머튼은 수도자들이란 주변머리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중세 이후로 수도자들은 하나같이 주변머리만 남기고 머리의 가운데 부분을 비어두었다. 이를 두고 머튼은 수도자란 자고로 세상의 주변에서 세상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실상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스스로 주변인으로서 중심에 있는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니 신실한 제자일수록 그분처럼 세상의 주변에 머물려고 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서울에서 일을 보지만, 주말엔 식구들이 사는 경주로 내려간다. 강풍이 몰아치는 경주, 그날 저녁에 갑자기 아내가 영화를 보자고 한다. 언제 한번 봐야지, 하고 밀쳐두었던 비디오가 한 편 있었던 것이다. <티벳에서의 7년>. 장 자끄 아노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산악인이었던 하인리히 하러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우여곡절 끝에 달라이 라마를 만나서 경험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하러가 티벳에 와서 양복 재단을 하던 한 여인을 만나는데, 그 여인에게 암벽 타는 법을 선보였다. 자랑하는 하러에게 그 여인이 이렇게 말한다. “정말 우리와는 다르군요. 선생님들은 항상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모두 버리려고 애쓰니 말입니다.” 서구인에게 정상을 정복하려는 것이 ‘성공’이라면, 티벳사람들은 그게 다 무상함을 배우려 한다는 말일 게다. <무지개 원리>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성공과 행복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이 뜻을 거듭거듭 새기고 나아간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고, 넘지 못할 산이 없으며, 마침내 ‘성공’하리라는 것이다. 359쪽에 걸쳐서 필자는 우리가 세상에서 바라던 성공을 이루고, 남는 복은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어 더 큰 복을 얻어 누리라고 가르친다. 참 고마운 말이다. 누구나 바라던 바다.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 이 책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는 글을 쓰려 한다는 말을 듣고, 어떤 이가 대뜸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데 뭔 말을 하느냐”하는 것이다. 그 책 때문에 손해 본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사는 데 도움이 되고, 하는 일마다 꼬여서 힘든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정작 책을 읽어보면, 절로 수긍이 가는 이야기도 많고 평소 내 생각과 맞아 떨어지는 구석도 많았다. 그리고 세상을 신나게 살아가는데 보탬이 될지언정 해를 입히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도 책에서 여러 차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필자와 책에 대하여 고맙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보면 팬클럽에 속하는 이도 실제 많아보였다. 한 책이, 한 사람이 인기를 누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꾸 생각을 모으는데도 꺼림칙한 구석이 남아있다. 실상 <무지개 원리>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 태반이고, 여기저기서 ‘속독하면서’ 집어넣은 정보들을 다시 가공했을 뿐인 것 같은데, 어찌 이리 인기몰이를 하는지 참 요상하다.

나는 그 이유를 몇 가지 ‘상상’해 보았다.

(1) 필자가 천주교 ‘사제’라는 것이다. 개신교 목사들보다 더 신비하고 스님들보다 합리적일 것 같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제가 인생철학을, 더 정확히 인생 가이드북을 썼다는 데 있다. 책 제목이 ‘원리’이듯이 이 책은 결코 신앙서적이나 철학책이 아니다. 일종의 인생지침서다. 이런 류의 성공론 책은 필자가 주장하는 바와 다르게 ‘요즘 흔하다.’ 그렇지만 ‘단지’ 사제가 썼다는 게 메리트를 가질 수 있다.
(2) 대중적 관심에 호소하는 상업주의 정신에 투철하다. 천주교 신자이든 아니든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돈과 건강’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중에서 이 책은 ‘돈’으로 상징되는 ‘성공할 수 있다’는 미끼를 던진다. 물론 책에서 천주교 사제답게 성공은 돈이나 명예, 권력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말하지만, 본문에 다시 들어가면 현실적 의미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는 일마다 잘 되기를” 오매불망 바라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매력을 던져준다. 한마디로 돈 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3) 광고의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였다. 될 만한 일에는 과감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책이 나왔을 때, 그 즈음에 내가 펼쳐 본 가톨릭, 평화 등 교계신문에는 몇 주에 걸쳐서 계속 올컬러 전면광고로 <무지개원리>를 선전하는 책광고가 실렸다. 그 광고료 비싸다고 소문난 매일미사 책에도 광고가 실렸다. 뭐 하면 경품도 준다고 했다. 교계신문잡지의 주력 광고였던 돌침대를 밀어내고 한때 빛나는 광고주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더구나 항상 참신한 소재를 찾기 마련인 방송사에게도 사제의 성공론 강의는 잘 들어맞는 컨셉이었다. 적어도 <무지개원리>의 경우엔, 과연 “하는 일 마다 잘 되었다.”

필자가 머릿말에서 이미 예견하여 이야기하듯이 이런 무지개 빛 성공 앞에서 내가 지금 배 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있는 까닭이다. “되도록이면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이 책을 읽고 제발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파하지 말고’ 이 땅에 컨그레츌레이션 문화를 확산시켜 내실있는 3만불 시대에 진입하였으면 좋겠다.” 남 잘 사는 것 부러워하지 말고 투정 부릴 시간에 무지개 원리로 무장해서 너도 한번 성공해 보라는 말 같다. 그러나 보라. 우리 현실이 나 하나 바둥거린다고 신수가 훤하게 바뀔 수 있는지. 아무리 대한민국 경제가 3만불 시대로 돌입해서 나아간다고 해도 대다수 국민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남아, 사회 주변에서 배회할 것이다. 신화창조를 통하여 소수의 잘나가는 인생의 대열에 들어서라고 말한다면, 정말 필자는 실수하는 것이다. 필자에게 메리트로 작용했던 ‘사제’란 직함이 자신의 발목을 걸테니 말이다.

<무지개 원리>에서 예를 드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체로 한결같다. 필자가 이미 전인적 자기계발 원리를 “노벨상을 가장 받은 민족인 유다인이 매일 두번씩 암송해야 하는 ‘세마 이스라엘’ 속에서” 발견하였다고 말했듯이, 그는 탈무드를 무지개 원리의 기본틀로 삼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노벨상 받은 유다인들은 많으나, 주로 과학과 문학 분야이며, 그 중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는 별로 없다. 대개 세상을 위한 투신보다는 탁월한 지력을 통하여 자기실현을 한 사람들이다. 유다인 중에는 시몬 베이유와 도로시 데이 같은 가난한 이들과 노동대중을 위해 헌신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유다인적 뿌리와 전통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적 영성에 뿌리를 내렸던 사람들이다. 즉 탈무드가 별로 인생에 미친 영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다인의 탈무드를 운운한다는 것은, 실제로 유다인의 상인적 기질과 승부사적인 기질을 높이 산다는 것이다. 중세부터 자본주의적 정신을 살았던 유다인을 자기 원리의 바탕에 둔다는 것 자체가 무지개의 원리에서 말하는 성공의 색깔을 암시해주고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직접 유다인임을 암시하는 인물이 나온다기 보다 주로 출세한 미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모범으로 등장한다. ‘사치 앤 사치’사의 케빈 로버츠는 일찍부터 인생을 투자란 관점에서 바라본 인물로 칭찬받는다. 힐튼호텔 창립자 콘라드 힐튼, 마이크로소프사의 빌 게이츠, 미식축구선수 하인즈 워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 스타벅스 커피의 하워드 슐츠, 올림픽 육상선수 찰리 패독, 코카콜라 회장 아사 캔들러, 카네기, 록펠러, 그리고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인 코시바 마사토시, 와타미 주식회사의 창립자 와타나베 미키, 일본 마쓰시타 전기회사의 창립자 마쓰시다 고노스케 등등. 모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미국과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필자가 인용하는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미국인이듯이, 이른바 ‘성공학’에 대한 철학과 처세술에 대한 책들이 주로 미국에서 출판된 것들이며, 미국이야말로 기업의 지원아래 ‘실용주의 심리학’이 발전한 까닭이다. 미국은 이른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나라이며, 가장 세속적인 관심이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수입된 많은 이론과 사례를 <무지개 원리>에 차용하는 것이다. 어쩌면 저자 약력에서 피력했듯이, 필자가 한때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교환장학생’으로 공부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필자는 성공과 행복에 관련된 국내외 저술들을 두루 읽어보고, “그 저술들이 가진 부분적인 성공법칙들과 행복법칙들을 통합한 결과 마침내 만사형통의 7법칙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 만사형통의 7법칙이란 사람이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서 출세하는 방법을 꼭 집어서 일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말하는 성공과 행복은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완전함이나 지복(至福)과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 한번 묻고 싶다. 우리 신앙 안에서 온전한 의미의 행복을 살았던 사람들은 ‘성인’들이다. 그들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이 원하시던 자기를 실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천상의 복됨 안에서 살았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주듯이, 그들은 출세할 기회를 버리고 세상과 세상적 가치를 버렸다. 맘몬(재물신)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으로 떠나고,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마더 데레사는 -필자는 마더 데레사를 인용하기도 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출세가 아닌 가난한 이들에게로 갔다. 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처럼 실패자였다. 세상 속에서 주변으로 남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을 갈망했으며,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 그들은 결코 세상일에서 만사형통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만사형통한다면 천상에서는 사면초가일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열반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 부처되기를 거절했던 보살의 마음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이 바라는 이상형이다.

갑자기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내가 가마,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라고 쓰고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어린 시다들과 노동자들을 위해 분신을 했던 전태일이 설 자리를 빼앗아 가버리는 성공의 철학과 행복의 처세술은 ‘저들만의 천국’을 꿈꾼다. 스스로 완전하지만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삶이란 속빈 강정이 아닌가? 겉모습은 그럴듯하나 수수깡처럼 여물지 않은 생애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세속화 시대의 성공을 탐하는 이들에게 그 탐심(貪心)을 오히려 장려하고, 생태계와 지구환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절약해서 부자 되려고 수돗물을 아끼는 자들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성공의 방법이 아니라 성공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얼핏 고개를 쳐드는 생각은 필자의 <무지개 원리>가 단월드(단학선원)의 행태와 무척 닮아있다는 것이다. 한때 필자는 뉴에이지 운동을 박멸하기 위한 십자군을 자처한 적이 있었다. 단월드와 이승헌 선사는 영성을 상업주의와 교묘하게 결합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전국에 수련원을 세우고,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출판사를 차려 책을 보급하였다. 이 삼박자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주식회사가 되었는데, 논술세대를 맞이하면서 그들의 뇌호흡 열풍은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하나의 아이템으로 다방면에 걸친 성공을 이끌어내는 수완이 뛰어났다. 한 사제가 가톨릭교회 안에서 신호교론을 주장하더니, 요즘은 ‘성공론’의 전도사 되었다.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고 자책과 열등감에서 벗어나 혼신으로 몰두하면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는 논리는 사뭇 ‘뉴에이지운동’의 논리를 닮아 있다. 그리고 실상 우뇌, 좌뇌, 뇌량 운운하면서 온갖 실용심리학의 견해를 끌어대는 것은 뉴에이지의 학설과 상당히 중첩되어 있으니 참 아니러니하다. 매스컴을 이용하는 탁월한 능력도 단월드와 다르지 않다. 때로는 “한국판 탈무드”라는 식의 광고문안의 선정성조차 닮아있다. 이 모든 기우(杞憂)가 쓸데없는 것이길 바란다. 이 모든 넋두리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길 바란다. 성공을 위해서 제목만 떼고 이것저것 가져다 쓰는 국적불명의 인생담론이 아니길 바란다. 차라리 생면부지의 우리 교회와 전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면 나도 즐겨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군.”하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가 될 수도 있으련만, 툭 털고 맘 가볍게 그리 넘길 수 없음이 내 마음을 사서 고생하게 한다.(2007.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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