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5년짜리 비정규직공무원에 불과하다

▲ 사진/한상봉

전문가들이 극구 반대하고, 종교인들이 아무리 사정을 해도, 그는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해야 강이 살아난다고 믿는다. 그의 4대강 프로젝트는 한반도의 생태계를 영구적으로 변형시키고 수백억만 년 동안 자연이 간직해온 생명의 힘을 멸절시키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군의 이름은 사라질지라도 그의 이름 석 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임기의 절반 동안 이 정부가 야심차게 벌인 사업들은 대개 사회적 공유자산을 팔아치우는 어처구니없는 짓들이었다.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결국 5년짜리 비정규직공무원에 불과한 그가 영영세세 사람과 자연이 공동의 유산으로 삼아야 할 선악과에 손을 댔으니 장차 그가 치를 비극적 결말은 개인의 운명으로 돌린다 치더라도 화려강산의 낙원에서 쫓겨나야하는 겨레 전체의 불행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의 ‘실용’이 지지층을 향한 충성 혹은 일방적 편들기 정도로 짐작한 바는 있으나 강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영역까지 약탈하자는 신호였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작년 용산에서 들켜버린 그의 속물적 욕망의 넓이와 깊이는 올해 강폭을 확 넓히고 바닥을 긁어내는 4대강사업 현장에서 완전히 드러났다.

주교회의를 필두로 정부의 위계를 두고만 볼 수가 없던 종교계가 나서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정재관언학(政財官言學) 오각동맹의 든든한 엄호에 비하면 뒷심에서 너무나 밀렸다. 아니나 다를까 즉각 역풍이 불었다. 4대강사업 반대 메시지 때문에 “미사 드리기가 무섭다”는 해괴한 소리가 주교단 전체의 걱정에 맞서려들더니 조중동 등 수구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종교의 현실참여가 온당키나 한 일인지 따지고 나섰다. 종교인들이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드느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마구 터져 나왔다. 그래서 그랬을까? 명동성당에서 생명평화기도회를 진행하려던 신부들이 그 즈음에 명동본당 신자를 자칭하는 자들과 교구청 관리국 소속의 직원들에게 차례대로 봉변을 당하고 결국 천막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은 다음 결국 “영업방해”라는 꾸중 한 마디에 그만 기가 꺾이고 말았다.

수구기득권 세력은 개혁진보진영이 자신들의 사업에 이의를 제기할 때마다 빨갱이 시비를 걸듯 교회가 어렵게 사회적 발언을 내놓을 때마다 부당한 처사라고 공격을 해대면서 성속의 경계를 넘지 말라며 엄중하게 나무란다. 그게 무슨 이야긴가 하면 교회는 숫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도, 교회의 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꾸할 일은 아니지만 하느님은 초장부터 세상에 대해 관심을 보이셨다. “보니 좋았다!”고 하시는가 하면 예언자들을 시켜서 “눈뜨고 볼 수가 없다!”고 하기도 하셨다. 이런 찬사나 탄식은 따지고 보면 엄연한 현실발언이다. 조중동의 눈으로 보면 매우 불쾌하고 못마땅하겠지만 그런 분이 성경의 하느님이시다.

세상이야 좋든 나쁘든 하느님이 웬 참견이냐고 대들고 싶겠지만 모세의 경우 하느님을 만난 다음 비로소 세상의 불의와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강생은 또 어떤가? 이 일은 하늘의 하느님이 땅의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아니던가. 하늘의 일은 교회가, 이 세상의 일은 국가가 맡는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어느 악령 들린 자가 했던 소리였다.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마르코 1,24) 무릇 교회의 일탈을 꾸짖고자 한다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심으려고 했던 예수님을 먼저 나무라야 할 것이다.

주교단의 올바른 판단에 크게 힘입어 한국천주교회가 4대강 파괴를 정면으로 문제 삼게 된 것은 천만다행의 일이었다. 작년의 경우 불로 빚어진 참사를 어루만져주었다면 올해는 물로 말미암을 재앙을 지적하고 창조질서의 온전한 보존을 호소한 셈이다.

고작 돈 한 푼에 하느님의 천리를 무시하고 사람의 도리를 망치는 세태 속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태산 같다. 고라니와 수달, 개구리, 남생이와 나눠 마시다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받아 주는 바다에게 흘려보내야 할 물을 인간이 다 마셔야겠다며 보를 쌓는 저 잔인한 인간성을 고발하고, 극소수의 사회적 강자들과 대다수 약자들 사이에 형성된 약탈적 관계는 궁극적으로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점을 호소하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떠맡아야 할 당면과제다. 그런데 이는 권력의 눈치를 살피거나 압박에 굴하지 않는 뚝심에다 어린아이와 늙은 어머니의 가느다란 신음도 놓치지 않는 예민한 감수성이 아니면 참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나 교회는 탄생순간부터 그런 은총을 품속에 간직하고 있다.

* 이 칼럼은 <기쁨과 희망> 2010년 5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김인국 (신부, 청주교구 금천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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