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순교와 자살 사이

요즘 들어 여고시절에 문고판으로 읽었던 황순원 선생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떠오른다. 제목이 소설의 내용을 잘 표현한 소설이었다. 육이오 전쟁 당시 참혹한 전장과 후방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풍경을 그려놓은 것인데, 그들의 삶은 위태롭기가 꼭 비탈에 선 나무들 같았다. 그저 소설 제목이 요즈음의 풍경을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았나 보다.

어느 시대나 마이너리티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의 삶은 비탈에 선 나무처럼 불안정하다. 혼자가 되면 메이저리티 역시 자신을 마이너리티로 여기며 비탈에 선 느낌에 휘청거릴 때가 있을 것이다.

서녀 출신, 강완숙 골롬바

조선 후기,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만 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1760 영조 36,~1801 순조 1)는 여성 순교자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성녀는 충청도 내포지방 양반가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덕산에 사는 양반가의 서자(庶子)이며 이미 전처소생의 아들이 있는 홍지영(洪芝榮)에게 후처로 시집을 갔다. 그 후, 성녀는 천주학을 알게 되어 믿음을 키워가다, 거처를 얻지 못하고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6년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지내는 등 박해시대의 상황에서 보면 목숨을 건 행동으로 신앙의 모범을 보여 준 분이다. 그러기에 주문모 신부의 신임을 얻어 (여성)회장에 임명되어 최초의 여성수도회를 설립하는가 하면, 정조대왕의 이복형인 은언군 이인의 처와 며느리를 천주학으로 인도하는 등, 지위고하는 물론 남녀의 차이를 뛰어 넘는 전교활동을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성녀의 행적이 드러나자, 천주학의 괴수로 지목되었고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에서 처형당했다.

전체적으로 두드러진 삶이지만, 성녀의 일생에 몇 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다. 시대상황을 잘 알지 못해서 무리한 추측이긴 하지만, 그녀의 출신이 양반가의 서녀였기에 처녀로서 서자출신 남자의 후처로 시집을 간 게 아닐까 하는 점이다. 서자 집안에서 태어나면 삼대에 이르기까지 서자로 지목되어 사회활동에 지장을 받았던 시대라, 강완숙 성녀의 어머니가 곧바로 첩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첩이 아니었다면 할머니나 증조모님이 첩으로 일생을 사신 분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시대의 통념에 따라 서녀로 태어났으니 그 그늘이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서녀, 서자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시절에 태어난 서녀 강완숙 성녀의 사회적 위치는 당연히 차별받는 위치였을 것이다.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또 다른 특이점은, 내포지방에 천주학 박해가 있었을 당시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성녀와 남편 사이에 불화가 생겼던 것 같다. 그 후 남편 홍지영과 결별하고 시어머니와 전처소생 아들을 데리고 성녀는 덕산을 떠나 서울로 주거지를 옮긴다. 이때 시어머니와 전처소생 아들 홍문갑이 아들과 아버지를 떠나 며느리와 새엄마를 따라 나서는데 그런 정황은 그 시대의 정서와 맞지 않는 일이지 싶다. 아내가 남편 곁을 떠나, 시어머니와 전처소생 아들을 데리고 타지 살림을 한다는 게 보통 있는 일은 아니었을테니 성녀의 개인적인 성품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민중들의 삶이 많은 소용돌이를 일으켜 이전과는 다른 행태가 생겨나고 있었지만 강완숙 성녀의 경우는 희귀한 예일듯 싶다.

어떠한 성녀의 성격이 시어머니로 하여금 삼종지도에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 아들을 떠나 며느리에게 의지하며 사는 길을 택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진다. 아마, 강완숙 골롬바 성녀는 친정어머니가 첩으로 일생을 서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고 똑같은 삶을 살아왔을(?) 시어머니를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돌보자 아들을 두고 며느리를 따른 게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당시 서자, 서녀들은 이전보다는 삶의 입지를 허락받는 형편이었지만 사회적 자아를 실현할 길이 막힌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권력에서 이탈된 남인 시파들이 주로 천주학을 공부하여 그들이 초대교회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는 점과 같은 맥락이다.

마이너리티의 사유, 그리고 신앙

양반가의 서녀 강완숙 골롬바는 조선후기, 시대의 마이너리티로 태어나 마이너리티로서 그녀의 삶에 대해 충분히 사유했을 것이고, 그 감성이 바탕이 되어 천주학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삶을 펼치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성녀를 신문한 기록에서 성녀는, "저는 이미 천주학을 배워 스스로 믿었으니 죽으면 천당에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형벌을 받아 죽더라도 조금도 후회는 없다... " 라고 답하고 있다.(사학징의) 이런 담대함이 있었기에 초대 조선교회에서 강완숙 골롬바 성녀는 초대교회를 세우신 성모마리아만큼이나 큰 역할을 해내셨다고 본다. 조선후기 편협한 신분질서를 부수며 등장한 천주학은 성녀와 같은 이들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나갔다.

여배우 이미숙을 닮은 그 언니 생각

내 눈에는 여배우 이미숙을 닮아 보이는데, 나와 세대차이가 나는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옛날 배우 문희를 닮았다고 했다. 남편이 그녀와 결혼한 이유는 오로지 아내가 여배우를 닮았다는 데 있었다. 누가 봐도 그녀가 미인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느 자리에서나 그녀가 등장하면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살아 있으면 오십 중반인 그녀의 가정형편을 잘 몰랐지만, 그녀의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에 받침이 제대로 갖춰있지 않은 글자가 많았던 걸 보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그녀와 알게 된 건 기차집이라 불리던 길다란 무허가 건물에서 바로 옆집에 세들어 살았기 때문이었다. '찔레꽃 장갑'이라는 소규모 가내수공업 체에서 미싱사로 일하던 그녀는, 그 때 어느 군인과 펜팔로 사귀고 있었다. 남자가 K대에 다니다 군에 입대한 인텔리(그녀가 그 남자를 지칭할 때 늘 쓰던 표현이다.)라서 한글받침을 제대로 갖춰서 쓰지 못하는 그녀는 종종 내게 편지를 부탁하곤 했다. 맨입으로 부탁하기가 민망했던지, 으레 시장에서 파는 도너츠를 사들고 내 방으로 들어와 연애편지를 부탁하는 그녀가 귀찮고 버거우면서도 도너츠 먹는 재미에 빠져 나는 종종 그녀를 기다리곤 했다.
여배우 이미숙
도너츠를 먹으며, 그녀는 K대 출신 인텔리 군인아저씨를 향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남자와 펜팔하는 데에 자신의 전 존재감을 부여하는 듯 열성적이었고 들떠 있었다. 그녀와 나 누구도 합성세제처럼 부풀어 오르는 감정의 거품을 거둬낼 힘은 없었던지, 우리는 도너츠를 먹고 취한 듯 종이 위에 사랑의 감정을 쏟아 부었다. 픽션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우리는 공모하여 그녀의 촌스런 이름도 멋드러진 도시풍으로 바꾸었고 의심스러운 학력도 명문여고 출신으로 업그레이드해서 인텔리 군인아저씨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군인아저씨는 픽션이 가미된 편지와 그녀의 외모에 푹 빠져버렸던 것인지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하였다. 그녀는 결혼 이후 대필사건이 드러날 것이 염려되었는지 나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내고자 하였다.

핫도그를 굽는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 간식거리 핫도그를 굽는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그녀를 만났다. 명문대 출신 남편을 둔 그녀가 거리 모퉁이에서 핫도그를 구워 팔고 있었다. 뭔가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건네주는 핫도그를 먹으며 보니, 그녀는 어딘지 마음의 고뇌가 스며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뇌로 인해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기름솥을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하루종일, 길모퉁이에서 핫도그를 굽던 그녀는 서둘러 밥을 안치고 반찬을 장만하여 밥상을 차려냈다. 회사원이던 남편이 퇴근하여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다. 그 때 그녀의 연립주택에 사는 초보운전자가 주차하느라 애를 먹는지 후진할 때마다 울려대는 신호음 <엘리제를 위하여>가 시끄러웠다.

그녀가 무심코, "아이. 시끄러! 차 샀다고 동네방네 광고하고 있네" 하는 정도의 말을 내뱉었던 거 같다. 그러자 남편이라는 사람이 한다는 말이, "저 음악이 뭔 줄 모르니, 무식한 귀에는 시끄럽게만 들리겠지? 모르면 물어서라도 배워. 배워서 남주냐 ?교양머리하곤." 라고 했던 것 같다. 남편의 냉소와 비아냥을 들으며 그녀는 뭐라 대꾸를 못했다. ...부부의 삶이 아니었다. 보글보글 끓던 찌개와 달리, 그날 우리 사이의 밥상 위에는 냉랭한 바람이 불어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대통령인지 국회의원인지를 뽑는 투표를 하고 지나다 포장마차에 들렸더니, 더욱 초췌해진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게 만든 원인은 남편을 인텔리라고 표현하던 그녀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투표장에서 붓뚜껑을 찍고 나온 그녀가 무심코 남편에게, "이렇게 하는 거 맞지요?" 하며 자랑스럽게 투표지를 펼쳐 인텔리 남편에게 확인받고자 하였다고 한다.

갑자기 터진 해프닝으로 투표위원들 사이에 가벼운 웃음과 심각한 실갱이가 오고갔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그의 체면이 손상(?)된 만큼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갔던 연애편지의 수식어들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인텔리, 인텔리 군인 아저씨의 이름이 '00빈'으로 이름까지 인텔리틱해서 더욱 좋아했던 그녀의 사랑은 죽음으로 끝이 났다. 바람결에 들려온 이야기로는 부부싸움 끝에 그녀가 메니큐어를 지우는 아세틴과 다른 여러 화공약품을 마셔 병원으로 옮겨져 곧 바로 위세척을 했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의 무지함과 남편의 인텔리 성향이 부조화를 이루던 어느 날이었다. 이혼을 권하자, 그녀는 자신의 꿈은 '일부종사(一夫從事)' 라며 그녀 어머니의 삶을 슬쩍 내비쳤다. '일부종사'... 그 낯선 그 어휘에 그녀가 성장해온 가정의 붕괴이야기가 맞물리자, 이미 사라진 듯했던 어휘는 힘을 발휘하며 현재형이 되었다. 결혼으로 가는 길이 잘못되었건만 그녀는 '이혼'을 '죽음'보다 더 무섭게 생각하는 아픈 가족사를 지니고 있었다.

순교와 자살...?

강완숙 성녀는 순교자 현양회가 드높이는 여성순교자를 대표하는 분이다. 여성신자의 모델이 될 만한 분이기에 여러 문화단체들이 성녀의 생애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시대를 달리하는 사람들이고 비교대상으로 놓기 어색한 면이 있지만, 강완숙 성녀와 옆집언니의 일생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죽음이 오더라도 천주학이 지향하는 평등하고 자애로운 세상과 바꾸지 않겠다는 성녀의 신념과, 공순이에서 인텔리 남자의 사모님으로 살고 싶었던 옆집언니의 행로와 죽음은 비슷한 호소를 담고 있었다. 자신을 한계지우는 삶에서 벗어나고픈 갈망, 사랑이 없는 삶, 자신의 정체성이 훼손당하여 의미를 잃어버린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는 항변이 두 사람의 삶과 죽음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옆집언니의 소망이 허영을 품고 허무하게 소멸된 것이기에 그 울림이 작지만, 두 여자의 삶은 여자인 내게 똑같은 애틋함과 안쓰러움을 전해준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순교자를 현양하는 마음의 한 자락이라도 내어 자살하는 이들의 비애를 짐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 '생명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며 자살한 이들의 장례식을 허락하지 않는 교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들 앞에 '성도'라는 표현을 깎아내리고 싶어하는 일부 목사님들을 하느님이 반기실까?


무지한 어미도 자기 자식을 예뻐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기우는 법인데, 만물을 낳은 어미인 하느님이 자식의 불행한 죽음을 비난하는 이들을 어여삐 여길 리 없다. 스스로 죽은 사람들에겐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한 비애가 있었을 것이다. 순교자들처럼,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도 교회의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닐까... .

/2008.10.22.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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