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다른 작가들처럼 자기이름으로 발간된 책도 없고 어느 작가협회에 등록되어 있지도 않건만, 나는 누가 물으면 그냥 작가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떤 작품을 썼냐고 물어온다. 별로 답할 말이 없어 드라마 몇 편을 썼다고 말해주면, 이미 오래 전에 방영된 드라마들이라 고개를 갸웃하거나 아 정애리가 나온 거, 최진실하고 김희애가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 하면서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을 정도다. 이런 반응을 보며, 내 머리속에선 글을 쓴다는 건 무얼까, 하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져보거나 왜 다 내던지고 다른 일에 몰두하지 못하는가 하는 자괴감이 스민 감정에 힘든 하루를 보내곤 한다.

무엇을 알고 싶었을까

대학시절, 전공으로 사학을 선택하고 부전공제도가 있어 불문학을 공부했다. 외국어를 공부해서 외국으로 나가 공부하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다른 선택을 했다. 학부과정의 전공이 뭐 대단할 건 없지만 우리가 결혼할 무렵 저마다 선택한 배우자를 보면 비로소 그 배우자를 선택한 친구들의 스타일이 더욱 명료해지는 것처럼, 전공 선택도 그 사람의 지향점이 드러나는 결정인 것은 분명하다.

역사학을 공부하고픈 내 안에 숨어있었던 마음은 아마도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도대체 삶이 무언가를 현실의 무대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통해서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짧은 기간 역사개설서와 사료강독, 여러 시대사, 그리고 역사철학으로 이어지는 강의를 통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부딪침을 보았을 뿐 가쁜 숨결을 진정시켜줄 위로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새벽에 무엇을 보았을까

지금도 종종 9시 뉴스를 끝까지 못보고 잠이 드는데, 예전엔 참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그래서 남들이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하는 일들을 나는 새벽녘에 일어나 하곤 했다. 유년시절에도 새벽 서너 시면 일어나 책을 읽으며 아침을 맞았던 것 같다. 그 시절쯤 한겨울이면 집 근처에 있던 눈에 덮힌 보리밭과 그 둘레의 야산에 우뚝우뚝한 서 있던 상수리나무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겨울 새벽, 마당에 서면 신작로와 보리밭과 야산에 며칠 전부터 내려서 다져진 눈 위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가고 있었다. 눈이 뿜어낸 찬기운에 더욱 냉랭해진 겨울바람은 푸른 보리싹들을 죽일듯 아우성치며 불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이 녹으면 보리싹들은 겨울바람을 다 이기고 봄을 맞았다. 그러나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지거나 매달려있던 나뭇잎들은 바람에 불려 허공을 떠다니다 사라지곤 했다. 하늘의 별도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듯한 겨울새벽, 가랑잎들이 바람결에 휩쓸려 가는 모습은 인간의 무기력함을 생각하며 떠올리는 풍경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새벽마다 그 시공간 속으로 어김없이 지나가는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내가 사는 곳보다 더욱 깊은 산골에 살던 어르신인데, 한결같이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손전등을 밝히거나 더러는 남포등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교회를 향해 우리집 앞을 지나가셨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니 주는 높은 산성 내 방패로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 하는가... 거룩한 밤, 별빛이 찬란한 밤 거룩하신 우리 주 나셨네, 하는 노래들이었다.

그랬다. 빛나던 푸른 잎사귀가 비존재가 되어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뚜렷하게 묻고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 여로에 의문을 품었을 법한데 그 의문은 의문이 드는 시공간에서 즉각 답을 얻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등불을 들고 새벽예배를 가는 아저씨를 통해서. 통째로 그 순간이 내게 스며들어 갈증을 일으켰고 한편 해석을 제공하곤 했다.

하늘로 가는 길을 밝히는 것

얼마 전, 강릉에 있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生家)를 찾아간 적이 있다. 여러 문인들과 정치인들의 생가를 보았지만, 강릉의 초당에 있던 허균의 생가처럼 보자마자 정이 드는 집은 보지 못했다. 높다란 소나무들이 늘어선 솔밭 사이에 마을이 있었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허균의 집은 넓은 터를 차지하고 햇볕을 듬뿍 받는 곳이었다. 그의 가문은 이들 남매뿐 아니라 윗대와 형제들 중에도 문인들이 많이 나온 집안이다. 그 곳에서 나서 자라고 살아가다 이들은 고인이 되어, 솔밭 사이에 묘비를 세우고 솔바람을 맞고 있었는데, 이들의 글 가운데에서 글월 문(文)을 설명한 게 마음에 남았다. 글월 文의 뜻풀이는, "하늘로 가는 길을 밝히는 것"이라고 문집 안에 쓰여 있었는데, 세대를 이어 내려오며 글에 대한 사유를 거듭해온 허균 집안의 문집에서 읽은 탓인지 그 울림이 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꽤 오랜 세월을 교회문화와 접하며 살아온 셈이다. 왜 그리스도교를 의지하며 살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장 외로울 때 불러보는 이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것들을 접하는 곳이어서도 아니고 성당의 미사가 장엄해서도 아니었다. 더러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런 순간들은 다른 것들로 대체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해질녘 우리로 들어오지 못하고 길을 잃고 헤매일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이는 주인을 생각하면, 그 애틋함에 취해 눈가부터 황혼이 스며들듯 벌겋게 물이 든다.

글을 쓴다는 것과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

글을 쓴다는 것과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건 내게 있어 거의 동일한 파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내가 쓰는 글이 세상과 행복한 만남을 갖지 못하며 추락을 거듭해온 것처럼, 내 안에 큰 자리를 차지하던 교회는 점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변해갔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안에 그리고 현실 교회 속에.

조선 후기 처음으로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는 위계질서가 분명한 봉건체제의 불평등한 사회에 혁명과 같은 평등정신에 사람들은 소스라쳤을 것이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며 조선사회는 점점 신분제도가 붕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양반들의 세상이었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펼쳐지며 인간 이성의 힘에 의지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권을 강조하고 종교-천주교-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18세기 조선사람들 중에는 유럽에서는 벗어버리고자 했던 천주교을 통하여 평등정신을 알게 되며 새롭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권을 알고 주장하다 순교에 이르는 시기였다. 동서양으로 나뉘어 있지만 같은 시대에 천주교 신앙 안에서 이율배반의 파장이 있었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율배반의 두 국면에 공통으로 들어간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내게는 두 개의 천당이 있다

순교자 중에 황일광(알렉시오 1756~1802)은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소, 돼지를 잡는 백정촌에서 태어난 천민이었다. 대갓집의 하인들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는 이들이 백정들로서 이들은 어린 아이들로부터도 하대를 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백정 황일광이 1798년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의 인도를 받아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교우들은 그가 천민 중에 천민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조선 초대교회 평신도들은 그를 형제로 받아들여 평등하게 대우했다고 한다. 백정인 황일광은 난생 처음으로 양반 교우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예대를 받자, 비로소 사람의 대접을 받는 기쁨에 "내게는 두 개의 천당이 있다. 하나는 천주학을 믿어 평등해진 이 세상이요, 또 하나는 죽어서 갈 하늘 천당이다"라고 기뻐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초대교회에서 교우들 간에 어느 정도의 평등성이 이뤄졌는지는 불투명하지만 황일광의 예에서 보면 상당한 정도였던 것 같다. 대표적인 여성 순교자인 강완숙 골롬바와 윤점혜 아가다 같은 분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 두 여성순교자는 양반가의 서녀들로서 신분으로 차등지위가 주어지는 위계질서의 조선사회에서 고통을 겪다, 천주학의 평등사상에 마음이 열리고 순교에 이르렀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는 분들이다. 박해시대 순교자들 중에는 많은 수의 서자 서녀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제도로 보면 불평등에서 "불"자가 탈락한지 오래된 일이건만 평등하지 않은 것 같은 의식에 삶이 제한되어지고 가로막히는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자격지심은 아닐 것이다.

가톨릭과 위계질서의 아이러니

많은 외부인들이 가톨릭교회를 바라보며 떠올리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교계제도가 엄격한 위계질서(hierarchy)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머무는 대개의 신자들에게 있어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로 결정하는 순간들은 이런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곳에서 느끼는 감동의 순간들이지 싶은데 말이다. 4복음서를 채우고 있는 내용은 거개가 위계질서를 부숴버리는 예수님의 평등의식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들이건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교회를 찾은 이유도 그러했다. 성인이 청년시절, 그가 살던 지방의 주교님을 찾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대단한 신분도 아니고 이렇다 할 직책도 없는 그를 주교가 만나줄까 하여 고민하다, 부딪쳐 보며 길을 찾아보자는 막연한 심정으로 주교관을 물어 찾아갔다고 한다. 떨리는 마음을 가누고 주교님을 만나뵙고자 한다는 말을 전하자 주교관의 노인이 선뜻 아우구스티노를 들어오라고 하였다. 알고 보니 그 분이 바로 암브로시오 주교였던 것이다. 그 주교님은 어떤 무형 유형의 울타리도 없이 사시며, 그를 만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어보이는 소탈함을 지니셨던 것 같다. 그래서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주교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이 만남으로 인해 그는 여러 사상과 종교를 찾아 헤매던 방황을 접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런 주교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으니 참 행복한 분이시다.

중환자실에서,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성경도 읽지 못하는 할머니 신자셨다. 그런 분들이 그러하듯 하루도 빼먹지 않고 미사에 참석하셨는데, 어머니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맞을 때였다. 어머니는 수녀님을 성모님으로 여기는 분이라, 마지막 여정에서 어머니를 만나듯 수녀님을 만나고 싶다는 청을 하셨다. 그래서 성당 구역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수녀님이 짬을 낼 수가 없다며 오지 못하신다고 전해왔다.

중환자실을 지키던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살아가다 보면 저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입지에서 겪는 이러한 아픔은 어쩌면 그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만이 그 어려움을 통하여 세상의 어둠에 빛을 드리울 수가 있을 것이다.

불문학을 공부하다 포도주를 마시고 프랑스문화를 이해한 것처럼 행동하거나 글을 쓴다며 커피나 마셔대는 나처럼, 종종 교회는 그리스도교 문화의 겉껍데기인 십자가를 장식한 채 그 내용을 잃어버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잠시 교회와 일하며 느꼈던 순간들이 그러했고 교회의 언론기관에서 일해 보려다 부닥친 모습이 그러했다. 물론 교회다운 긍정의 순간들이 일반사회보다 더 많았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일반사회보다 도덕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글(文)이 지향하는 바가 "하늘로 가는 길을 밝히는 것"이라 했으니, 이는 교회가 세워진 뜻과 일치한다. 어느 작가나 그 자신의 삶은 엉터리일지라도 그가 쓰는 글은 그런 엉터리 삶의 시행착오에서 건져올린 진실의 파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사람들의 애증을 담고 펼쳐지지만, 그 지향점은 진리의 길에 서고자 하는 꿈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화의 전파는 제도나 물질문명 같은 하드웨어가 먼저 전해지고, 그 본질에 해당하는 정신은 후에 받아들이는 것이라 한다. 하느님 나라의 문화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조선시대보다 더 엄격했다는 유대사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 바닷가로 가시어, 스승을 잃고 옛날의 일터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자 그물질을 하는 제자들을 부르기 전에 손수 떡과 생선을 구워놓았었다. 참으로 다감하신 분이시다.

/2008.10.7.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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