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호수로 가는 길은 모두 막혀 있다, 마의 성처럼.
그리로 가는 길목엔 어디에나 금지 팻말이 붙어 있다.
가로지른 단순한 선이 말없이 그어져 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길을 가다가 이 선을 보거든 돌아서라.
이 선의 뜻은 타고 가지도, 날아가지도, 기어가지도 못함, 이것이다...
(솔제니친의 詩 ‘섹덴호수’ 중에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갖는 마음은 한결같다. 더 좀 먹었으면 더 좀 웃었으면 하는. 그런데 그 고운 마음을 풀어낼 대상을 잃어버리거나 찾지 못하는 경우 이러한 감정은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사람의 눈동자에 휑한 빈자리를 새겨놓고 그 사람의 움직임에서 서늘한 바람을 일게 만든다.

북에 남겨두고 온 어린 딸을 부르며

팔순을 넘긴 지 몇 해가 지난 작은엄마는 정신이 맑은 분이심에도 종종 실수를 하곤 하신다. 사촌 자매가 이제 엄마가 돌아가실 것 같다며 전화 속에서 울먹였다. 며칠 전에는 아침에 샤워를 하고 속옷을 챙겨 입는 걸 잊고 하루를 지내다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비로소 당신이 속옷을 입지 않은 채 하루를 지냈음에 허탈해하며, 이미 정신은 저 세상에 갔나보다, 라며 서글퍼하셨다고 전한다. 깔끔한 성격을 지녀 집안에서도 양말을 벗는 일이 없으셨고 딸들이 속치마를 입지 않은 채 치마를 입고 외출하면 혀를 차며 속상해 하시던 분이셨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사위어 가는 정신은 이제 당신의 몸과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계신 듯하다.

작은엄마는 유명한 개신교회에 적을 두고 계신지 오래되어 평소에도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이다. 요즘 들어서는 더욱 박차를 가하여 기도를 하시는데 눈물이 넘쳐흐르고 목소리가 상할 정도로 간절해서 자녀들은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이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드리고 싶지만 기도내용이 그들의 능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라 안타까울 뿐이다.

작은엄마는 1.4후퇴 무렵 서울로 내려온 피난민이셨다. 이른바 함경도 또순이신데 고향에서 결혼을 하고 5살 짜리 딸을 두고 계셨는데, 잠시 아이를 시부모님께 맡기고 부부만이 먼저 이남으로 내려오셨다가 남편과도 헤어지고 홀홀단신 서울에 남게 되신 분이었다.

득현이를 위해

시간이 흘러, 작은 아버지를 만나 재혼을 하신 셈인데 재혼해서 얻은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혼자 남아 인생을 정리하고 계시다. 연로하셔서 자녀들은 어머니를 보내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신데, 작은 엄마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의무인양 북에 남겨두고 온 어린 딸을 부르며 하느님의 자비가 어린 딸에게 임하기를 간구하셨다.

그동안 자녀들은 북한에 남겨진 큰언니를 찾아 어머니와 만나게 해드리려고 이산가족찾기에 신청을 해왔지만 북쪽에서 큰언니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번번히 헛수고로 돌아가는 걸 보며, 작은 엄마는 아마 전쟁통에 아이가 죽었나 보다, 하며 하느님께 그 영혼을 받아달라고 매달리셨다. 그러다 죽지 않았을 거라며 북에 남겨진 자식의 이목구비를 그리듯 설명하며 혹시라도 자신이 죽은 후 서로 만나면 어미에게 준다고 생각하고 돈을 주기를 부탁하신다. 첫 결혼의 시아버지가 첫 손녀를 얻고 기뻐하며, 아이가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얻을 득(得)에 어질 현(賢)을 골라 이름을 지어주신 딸이었다고 한다. '득현이... .'

가진 것을 다 잃어본 사람들

가진 것을 다 잃어본 사람들이 바로 실향민들일 것이다. 상실의 과정에서 이 분들은 인생의 한계를 좀더 일찍 성찰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품이 너그럽게 펼쳐져 다른 이들을 끌어안는 여유를 갖게 되신 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편집적으로 더욱 물질과 가족들에게만 마음을 두었던 분들도 있었지만.

그런데 우리 작은엄마의 성격은 성품이 너그럽다기보다 유난히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으셨고 인생을 포기(?)하고 사는 것 같아 출신만 함경도지 함경도 또순이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분이다. 첫 결혼이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자식과 남편을 잃자, 그 하위 단계인 물질쯤이야 욕심내는 것부터 어리석어 보였던 것인지 그악스러운 욕망덩어리로 보였던 사람들 속에서 좀 독특한 일화를 만들어내는 분이셨다.

소를 잃어버리고

이러한 작은엄마의 처신에 대해 집안 아주머니들은 여자가 손이 커서 살림을 다 거덜낸다며 쑥덕거리곤 했다. 장날 사온 갈치를 나눠 먹지 않고 한 번에 다 구워서 애들을 먹이더라는 둥, 갓 담근 고추장 단지를 이웃이 훔쳐다 먹는 일이 있었는데 도둑을 잡고서 항아리도 돌려받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를 흉처럼 이야기했다. 작은엄마의 이런 성격은 작은아버지를 종종 곤혹스럽게 했던 것 같다.

한 번은 집안의 재산 1호인 소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무렵이었으니 소는 귀한 재산이었다. 도둑을 잡으러 남자 어른들이 근처 우(牛)시장을 돌다 들어와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오셔서 작은 엄마에게 용한 점쟁이에게 가서 소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자고 제안하셨다. 그러자 작은 엄마는 점쟁이가 무슨 재주가 있어 방안에 앉아서 소가 간 곳을 알겠느냐며 거절하셨다. 이때 마루에서 늦은 아침을 드시던 작은 아버지가 밥상을 들어 작은 엄마를 향해 내던졌다. 평소 아내라면 신주단지 위하듯 한다며 동네에서 좀 모자라는 위인 취급을 당하던 작은아버지셨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은 작은 엄마에게 그다지 애착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일이었나 보다. 아니면 그분의 말씀처럼 점쟁이가 소를 찾아준다는 게 어이없어 그러셨던 것인지 속마음이야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본 작은엄마의 세계관을 헤아려 짐작해보면, 잃어버린 소는 작은엄마의 가슴에 커다란 상실감으로 작용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런 아내의 세계관에 작은아버지는 아픔과 울분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작은엄마의 마음은 소를 잃어버린 것에 불과(?)하건만 온 집안이 난리가 난듯 법석이는 모양이나 점쟁이를 찾아가자는 시어머니의 제안이 모두가 우스꽝스러웠던 것인지 모르겠다. 소를 찾아 나설 수 없도록 이미 작은엄마의 마음은 늘 어린 딸 득현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을테니... .
작은엄마의 마음은 늘 어린 딸 득현이를 찾아 헤매고

작은 아버지 입장에선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만큼이나 이미 다른 곳에 빼앗긴 아내의 마음을 되찾을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 앞에서 밥상을 내던지는 것으로 울화를 표현하신 것이리라.

이제 작은엄마는 죽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이 세상이 싫고 슬퍼서만이 아니라 노구(老軀)로 하루하루 숨쉬고 사는 게 힘들어서라고 말씀하신다. 몸 자체가 삶보다 죽음에 더 편안해지는 상태가 되신 듯하여 그저 조용히 듣고 있을 뿐 뭐라 첨삭할 말이 없다.

그런 몸으로 북에 두고 온 어린 딸 득현이를 그리며 애처롭게 기도하시는 모습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욕망의 산물인 분단으로 인해 작은엄마는 한 생을 뭔가에 들씌운 듯 혼을 잃고 사셨다. 옷을 사다드리면 이제 입을 날이 없다며 도로 가져가라고 하시고 어디에 모시고 가서 좋은 음식이라도 대접하려면 너무 먹어서 탈이 났다며 손사래를 치신다.

북한에 퍼다주느라 우리 경제가 파탄난 것이라고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지난 잃어버린 10년 동안 북한에 퍼다주느라 그리고 경제라면 ‘경’자도 모르는 그쪽 사람들과 생각을 맞추느라 경제가 파탄이 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분들에게 넌지시 작은엄마의 얘기를 비치며 어린 딸을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운운하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갈래로 번져 월남한 분들이 전재산을 북에 남겨두고 내려온 탓에 고생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돈을 알아야 세상을 아는 것이고 제대로 철이 드는 거라지만 돈으로 치중된 마음을 변화시키기는 산을 옮길 믿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분단현실은 돈, 물질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만들어낸 산물이고 관점의 차이를 이용하여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지 않은가.

20세기 초반 하버-보쉬의 암모니아 합성법의 발견으로 사람들은 화학공장을 세워 질소비료를 생산해냈다. 급속한 곡류생산량의 증가로 인류는 기아에서 벗어났고 세계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지금도 곡물생산량의 절대치가 부족해서 많은 이들이 굶주리기보다 편중되어 분배되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다.


더 갖고 싶은 인간의 욕망

올해 초 행해진 우주여행에서, 최초의 한국 우주인 이소연은 우주에서 여러 실험을 했는데 그 중에는 곡물의 씨앗을 우주로 가져가 우주의 빛을 쪼여 가져온 게 있다고 한다. 지구에는 오존층 등에 의해 차단된 우주의 강렬한 빛을 받은 씨앗들은 유전자변형을 일으켜 대량생산의 길을 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향상시켜왔고 그 가능성을 열고 있지만 그보다 더 성큼성큼 인간의 욕망은 상승하여 우리는 늘 경제가 안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다. 아무리 경제가 회생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도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가 안좋다는 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상대적인 가난과 더 갖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하느님의 빛으로 정신적 변형이 이뤄져야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빛에 감응하여 가치관의 변형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을 보면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에 둘러싸여 그의 정신적 유전자가 완전히 바뀌는 경험을 한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도 하느님의 빛으로 정신적 변형이 이뤄져야 경제에 매인 우리들이 억압에서 풀려날 것이다.

...호수는 하늘만 쳐다보고 하늘은 호수만 내려다보는, 어디에도 길은 없고 길이 모두 막혀버리고,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그래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단지 비 오는 날 한낮에 소방울의 무딘 소리를 따라, 소 가는 길을 따라, 소 가는 길을 밟아 호수까지 가는 방법밖에 없는 외로운 호수, 정든 호수, 나의 고향 같은 곳...(솔제니친의 ‘섹덴 호수’ 중에서)

구소련의 통제와 억압을 고발하며 자유를 갈구했던 솔제니친의 시 <섹덴호수>는 현실에 있는 지명이 아니라 그가 그린 자유의 세계를 은유하는 무릉도원 같은 곳인지 모르겠다. 섹덴호수로 가는 길은 산사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를 연상시킨다. 현실의 네비게이션으로는 잡히지 않는 곳... .

소방울 소리를 따라서만 갈 수 있는, 사람의 정이 저절로 길을 내는 고향처럼 아늑한 호수는 어머니의 품일 것이다. 평생 그 기억만으로도 행복한 곳. 그런데 전쟁과 분단으로 형상화한 우리들의 욕망은 이 길을 통제해 왔다. 겨우 이 길이 열리는가 싶었는데 다시 문이 닫혀가는 것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현만 거듭나온다.

전쟁으로 북에 남겨진 다섯 살 짜리 득현이는 꿈속에서만 엄마를 만나며 자랐을 것이다. 살아있다면 이제 노년으로 접어들었을 가여운 언니... .

 

/2008.9.8. 이규원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