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일을 마치고 근처 이마트에 들러 오이지 다섯 개와 멸치와 풋고추를 사들고 돌아와 저녁밥을 지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오이지를 조카 녀석은 한 번도 먹질 않았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지아비와 아이들을 위해 오이지를 무치고 저녁밥을 짓는 행복을 맛보려던 들뜬 마음을 혼자 삼키고 꿈속의 사랑처럼 아련한 기분에 잠겼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한여름이면 오이를 사다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끓여 부어가며 오이지를 만드느라 바쁘셨다. 양재천변에서 짱돌을 주워다 소금물 위로 떠오르는 오이들을 눌러놓으면 생오이는 그 안에서 오이지가 되었던 것이다.

친구의 반찬

독특한 성씨의 친구 '위'는 어린 중학생 무렵에도 왠지 일가(一家)를 이룬 듯한 느낌의 애어른이었다. 한여름, 몇 명의 친구들이 어울려 단추와 스프링을 감는 공장을 다녔었다. 일행 중에 어느 집에서 먹다 남은 김장김치를 얻어다 먹느라 도시락 반찬으로 늘 쉰 냄새가 후끈 코를 자극하는 신김치를 싸오던 친구가 있었다. 그때 친구 '위'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이라 밥 위에 달걀 후라이를 얹고 반찬도 여러 가지로 마음을 쓴 것이었다.

그런데 '위'는 신김치를 싸오는 친구와 반찬을 늘 바꿔 먹었다. 반찬을 내놓고 같이 먹지만 자기 반찬을 주로 먹으며 식사를 하는데 ‘위’는 아침에 엄마가 만든 반찬을 먹고 오니까 점심에 신김치를 먹어도 된다며 아침에도 신김치를 먹고 왔을 친구의 반찬과 바꿔 놓고 도시락을 비우곤 했다. 우리의 공장생활 처음부터 끝까지 ‘위’는 그렇게 밥을 먹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우리 중에 모난 성품의 소유자는 없었던지 '위'의 너그러운 마음을 편안히 받아들여 우리의 점심시간은 소녀들만의 종달새를 닮은 웃음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장로 사장님의 숟가락을 괴롭게 훔쳐보며

그 공장은 개신교 장로님이 경영하시는 작은 업체였다. 공장과 가정집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한편에선 공장기계가 돌아가고 다른 쪽에선 가정의 일상사가 펼쳐지는 구조였다. 우리의 사장님 곧 장로님은 매 수요일마다 30분을 할애하여 예배를 드리는 신앙인이셨다.

겉보기에도 고기를 뜯는 모습은 연상이 되지 않는 순한 외모를 지니셨는데, 이 장로님은 자재구입이나 영업상 외출을 했다 들어오시면 으레히 우리들이 일하는 일터와 마주한 안방에 걸터앉아 양푼에다 밥을 비벼 드시며 기계부속품인 스프링을 감고 있는 우리를 향해 주경야독의 고귀함을 설파하셨다. 그리고 자신은 고기보다 나물 특히 고사리나물을 좋아하신다며 제사 때나 보는 고사리나물이 섞인 비빔밥을 드셨다. 이발소의 단골 명시인 푸쉬킨의 시를 곁들이며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씀으로 늘 우리에게 정신적 양식을 제공하셨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분의 정신적 양식을 흡수하지 못한 채 양푼에서 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던 장로님의 숟가락을 괴롭게 훔쳐보며 뱃속에서 나오는 꾸르륵 소리를 숨겨야 했다. 노동하는 소녀들에게 단촐한 도시락은 너무 빈약한 양식이었다.

그집, 식모아줌마와 오이지

어느 일요일 오후, 우리들과 친하던 그 장로님댁의 식모겸 공장여공인 아줌마가 우리들을 그 분 집에 초대하여 아삭아삭한 오이지를 무쳐서 밥을 해주셨다. 모처럼 엄마처럼 푸근한 식모 아줌마 집에서 저녁만찬을 즐기고 식모아줌마가 세들어 사는 주인집에 가서 수사반장까지 잘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다음 주중 어느 날이었다. 장로님댁 사모님은 항아리의 오이지가 턱없이 줄어들었다며 식모 아줌마와 대판 싸움을 벌이셨다. 희화화되어진 삽화처럼, 퉁퉁한 사모님이 오이지같이 검고 쪼글쪼글한 식모아줌마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었다.
“슬쩍슬쩍 가져가는 거 다 알고 있다구! 무칠 때 보면 한 양푼이다가 접시에 내놓는 건 반 양푼꺼리 밖에 안 되잖아. 그러다 말려니 했더니 아주 오이지 항아리를 다 퍼다 먹었네 그려!”

대충 이런 말들이 쏟아졌다. 안타깝게도 식모 아줌마는 짱돌에 눌린 오이지처럼 사모님의 폭언에 맞서 한 마디도 맞서지 못하셨다. 자식 같은 우리들 앞에서 가만히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받아들이셨다.

그 시절, 공장에서 학교로 정신없이 흘러가던 우리들이 지쳐있던 만큼 그 식모아줌마도 생활의 결핍에 눌려 계셨던 모양이다. 20여명에 가까운 공장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남는 시간마다 단추를 고르고 스프링을 감던 아줌마였다. 우리들이 웃고 얘기하느라 잠시 손을 멈추는 순간에도 아줌마는 일에서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내 일이든 남의 일이든 일생 손발을 움직여야만 한다는 신념이 몸에 각인되어 있던 분이셨던 것 같다.

그런 아줌마가 소금물에 잠긴 오이지처럼 사모님의 폭언을 고스란히 감당하며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여전히 단추를 고르던 모습을 훔쳐보며 우리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식모아줌마가 오이지 반찬으로 차려주신 밥상을 기억하며 무의식중에 우리들도 아줌마처럼 얼굴이 굳어졌고 소금물에 잠긴 오이지처럼 숨을 죽였던 것이다.

노동자에게도 이야기를 들어봐야

얼마 전, 남편이 유명교회 목사인 대학친구와 만나 얘기를 나누다, 남편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 이랜드 사주이신 분을 초빙하여 간증을 들었다며 신실한 그 분의 신앙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는 좋은 시간이었는데 왜 그런 분이 이끄는 회사에서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노동자들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을 하였다.

나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해서 다른 일들을 예로 들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부분적이라며 그 곳의 사주를 통해 한 번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럼 공평하게 이랜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느냐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오이지처럼 사는 노동자 사이로 강림한 관세음보살

공장... 며칠 전에도 일이 있어 인천 작전동에 있는 '진성스크린'에 다녀왔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하는 그 분들의 임금은 150만원을 넘지 않았다. 일터로 들어서는 순간 화공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플라스틱 용기에 글자와 그림을 새겨넣는 공장이라 늘 산소불꽃이 작열하는 곳이었다. 에어콘은 그림의 떡인 장소였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는 더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공장에 다니던 시절, 친구 '위'가 있어 우리들은 맛있고 넉넉한 점심을 먹으며 공의로운 사랑을 경험하였다. 다른 여러 곳의 공장생활 중 나는 진기하게도 친구 ‘위’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대학을 마치고 출판사를 다니고 방송국에서 스크립트 일과 드라마 작업을 하면서는 그런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 관세음보살이 오이지처럼 숨죽이며 살아가는 공순이들 사이로 슬그머니 나타나신 것 같은 만남을 기억하면 공장이 서늘한 도량처럼 다가온다.

노자의 어록 중 하나로 기억하는데, "나를 알아주는 자가 없어야 내가 귀하다"는 말씀을 오이지를 보며 떠올렸다. 알아주기는커녕, 이 세상에 태어난 것조차 미안해하며 한 세상 내내 좌불안석으로 숨죽이며 살아가던 식모아줌마와 우리를 위해 공장생활 내내 신김치를 먹어주던 친구 '위'는 한여름 땡볕을 가로지르며 내리는 빗줄기 같은 인연이었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벌레먹은 나뭇잎, 이생진

/이규원 2008-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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