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생각한다는 것ㅣ고병권ㅣ너머학교ㅣ2005년

내가 사는 집 근처에 구화학교가 있었다. 구화법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구화법이란 듣지 못하는 아이들이 입술의 움직임과 얼굴표정으로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발성연습을 통해 음성언어를 습득하게 하는 농아교육법이라고 네이버 사전은 말한다.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지극히 무반성적인..

어쨌든 사람들은 그 학교를 ‘벙어리 학교’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연히 그 학교 앞을 지나다가 나는 큰 충격과 맞닥뜨렸다. 벙어리학교라면 당연히 ‘조용한’ 학교이어야 할 터인데 무척이나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벙어리는 말을 못하니, 벙어리 학교는 매우 조용할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벙어리는 정확한 발음을 못할 뿐이지,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록 명확하지 않은 소리로나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고, 정확한 발성을 익히기 위해 부단히 어떤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벙어리 학교는 조용할 것이라는 것은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지극히 무반성적인 생각이었다.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평이하게 쓰인 철학책,  <생각한다는 것>의 저자, 고병권은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해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왜 아니겠는가.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선입견에 불과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무지개의 색을 다섯 가지 색으로 보았고, 아프리카의 어떤 종족들은 무지개를 세 가지 색으로 인식한다고 하지 않던가.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이라는 것은 우리의 무지개를 표현하는 우리의 언어체계가 그렇기 때문이지, 무지개의 실상이 그렇기 때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무지개의 색을 일곱 가지라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일상에서 이런 어리석음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유색인종보다는 백인이 월등한 존재라는 생각은 또 어떤가. 기술의 양면성을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기술은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켜주고 삶의 질을 개선시켜 준다는 생각은 또 어떤가. 경제성장만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또 어떤가. 왜, 어째서 그런가를 묻지 않고 남들이 하는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고병권은 말한다.

정신의 나이테의 동심원을 넓혀갈 수 있는 기회

고병권은 낯선 것과 마주치라고 충고한다. 또 ‘다르게‘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나‘로부터 벗어나서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낯선 것과 마주치고, 다르게 생각하고, 나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것과 마주치게 된다. 새로운 풍경과 마주치고, 새로운 언어와 마주치고, 새로운 삶과 사고방식과 마주치게 된다. 여행을 통해 마주치게 된 새로움은 내가 속해 있던 방식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안겨준다.

내가 살았던 방식 말고도 얼마든지 더 좋은 방식의 삶이 가능할 수 있음을 우리는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여행은 정신의 나이테의 동심원을 넓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시간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고, 때론 체력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독서는 여행을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또 하나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볼 수도 있고, 다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구경할 있으니 독서야말로 매우 경제적인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뿐인가. 여행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의 나와 그것을 읽지 않았을 때의 나는 똑같은 내가 아니다. 한 권의 책은 우리를 분명히 변화시킨다.

내가 살아온 방식, 내가 살아온 제도와 체제가 권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삶에는 자유가 없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는 습관이나 통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자유롭다.”라고. 알게 모르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도록 강요받는다. 교과서는 단순히 지식만 전달해주지 않는다. 교과서에는 반드시 어떤 삶을 살라는 무의식적인 명령과 강제가 있다. 그 명령과 강제를 아무런 의심 없이 고분고분 따르는 삶은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생각 없는’ 삶이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학생은 이래야 하고, 어른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 라는 규칙은 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이 사회가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그 근본부터 의심해보는 자세, 그것이 생각하는 자세, 철학하는 자세가 아닐까.

고병권의 책은 생각한다는 것과 철학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준다. 그 어법은 쉽고 나직하고 간결하다. 역사와 문화, 기술과 생태계를 아우르는 풍부한 예화들을 더 끌어들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입시공부와 게임과 인터넷에 혼을 빼앗긴 대한민국의 청소년이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내공과 생각의 힘을 길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흔쾌히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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