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18세기 조선시대, 당파싸움에서 밀려나 국외자로 지내야했던 남인들 사이에서는 생지명(生誌銘)이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마련하는 게 잠시 유행이었다고 한다. 묘지명은 사람이 죽은 후, 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기리는 행위인데 생지명이란 살아있을 적에 친구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묘지명을 미리 지어놓는 것이고, 자찬묘지명은 이름 그대로 스스로 자신의 한 생을 기록하여 남겨두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러한 풍조로 인해 정약용 선생이 쓰신 자찬묘지명과 중형(中兄) 정약전의 묘지명을 통해 우리는 1779년 주어사 천진암에서 서학을 공부하던 모임이 시발점이 되어 조선에 천주교회가 성립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미리 지어놓은 묘지명

왜 이런 일들이 남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을까 추측해 본다. 당파싸움에서 밀려나 권력에서 멀어지다 보니, 정치행위에서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며 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을 것이고 그로인해 그들은 사회적 자아의 상실이라는 사회적 죽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남인들 사이에 동병상린의 연민이 퍼져나가며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후세에라도 남겨 증명하고픈 갈망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미리 지어놓은 묘지명을 친구의 문집에, 또는 자신의 글 속에 실어 자취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18세기 ‘님’(임금)의 사랑을 잃은 이들의 행로가 이러했다.

이 시대, 지식인의 한 사람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를 살던 시절이었다. 18년 유배 생활 중, 그 어느 눈 내리는 밤이었다. 다산초당에 머물던 정약용 선생은 눈길로 산을 넘어와 대흥사의 암자 중 하나인 일지암에 머물던 초의(草衣)스님을 찾아왔다. 오로지 유교경전을 공부하여 시문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로 등용되어야만 삶의 의미를 지니며 살 수 있던 시대에 선생은 그러한 과정에서 남부럽지 않을 실력과 패기를 지니고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급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선생은 급락하여 시퍼런 장년의 초기에 패기를 접으며 장장 18년의 세월을 유배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야 했다. 더러 20년, 30 년의 유배자들도 있었으니 이 분들의 참혹함은 뭐라 말하기 어렵다. 지금의 비전향장기수분들과 비교되는 역경을 사신 분들이다.

무료히 하루하루 책이나 봐야하는 형벌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밤, 내리는 눈을 보며 누군가 마음을 나눌 존재를 찾아 선생은 밤길을 나섰다. 당시 초의 선사의 나이는 다산 선생의 큰아들보다 한 살 아래였다. 눈길을 걸어온 아버지 격인 손님을 맞아, 초의선사는 차를 끓여 대접했다고 그의 문집에 기록해 놓고 있다. 차를 마시고 내리는 눈을 내다보며 말이 없이 앉아만 있다, 선생은 일어나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고 하는데, 배웅하며 초의선사는 그의 뒷모습에서 더할 수 없는 외로움을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다산, 고운 님을 여의고서

님-정조 임금은 다산 선생에게 고운님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고 그에게 삶의 자리를 펼쳐주던 사회적 생명의 은인이었을 정조가 일찍 죽자 선생은 정치권력에서 추락하고 일신의 자유조차 속박당하는 유배형을 받는 암담한 처지로 바뀐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곧 중앙의 정치세계로 돌아가 어린 순조임금을 보필하며 뜻을 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세월을 먼 강진 땅에서 오로지 책 읽고 읽은 책들을 편집하여 새로운 책을 만들어내는 일로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다행으로 그즈음, 청나라는 건륭제의 지시로 중국의 전통적인 4개 학문 분야인 고전·역사·철학·문학(經史子集)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만을 선정하여 편찬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완성되어 학문이 융성하던 시기였다. 그 뒤를 이어 강희제 역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펴내었고 이러한 백과사전격인 전집들이 출판되었고 곧 조선에 직수입되어 다산 선생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이 책들을 읽어볼 수 있었다. 현실정치에서 님을 상실했지만, 다산 선생은 학문의 보고를 통해 보국애민의 심정을 담은 저서들의 편찬으로 훗날의 정치적 평강을 꿈꾸었다.

한용운의 아름답고 각별한 님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만나는 님은 스님의 절대자인 부처가 될 수도 있었고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이라고 읽을 수도 있었다. 그저 한 사람으로 아내와 자식을 둔 사람이었으니 그 가정의 따뜻한 가장이 되어 이름없는 남자로서의 행복이 그의 님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국어선생님을 통해 그 시를 배우며 시 속의 님이 사랑하는 애인이기보다 '조국'이며 '종교적 절대자'라는 풀이에 왠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싯구 속의 님이 시인이 사귀던 남자 혹은 여자였다고 말하면, 이 또한 설득력있는 풀이는 아니라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사회적 자아를 상실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님을 사모하는 이성(異性)을 부르는 호칭이 지닌 지평만큼이나 사회적인 입지를 마련하고 이끌어주는 이를 향한 부름으로 나아가 진리로 이끌어주는 에너지를 향해 부르는 호격으로도 아름답고 각별하게 다가온다.

아들의 서재를 밝히는 아버지 이광사

18세기 인물로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조선 후기 문인이며 서화가이고 양명학자였다. 그의 아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의 저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이광사 집안은 소론의 대표가문이었는데, 주자학적 이념이 지배하던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소론의 선비들은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광사는 가족과 함께 양명학자들의 유배지인 강화도로 이사하여 양명학의 거두인 정제두(鄭齊斗)에게서 배웠다. 그는 소론이 영조 때 세력을 잃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1755년 나주괘서사건(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의 인물들이 정권을 쥐고 있는 노론을 비판하고 그 부패함을 열거한 대자보 형식의 글을 나주 객사에 걸어놓은 사건)에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받을 때 연좌의 죄목으로 엮이고 이어 주모자 윤지, 윤광철 부자와 편지 연락을 주고받은 게 드러나 아내는 자결하고 이광사 자신은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됐다가 그 곳에서 그의 학문이 이름나 사람들이 모여들자, 유배지를 완도군 신지도(新智島)로 옮겨 일생을 섬에서 살다 죽은 인물이다.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의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연려실'이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신선이 비단으로 만든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화가였던 아버지 이광사가 아들의 서재에 휘호해준 것을 아들이 그대로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이긍익은 스무 살 때 나주괘서사건을 보며 그로부터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흩어진 야사(野史)를 정리하고 태조 이래의 정사(正史)를 객관적 역사인식을 토대로〈연려실기술>을 완성했다고 한다. 작은 소품의 글도 쓰는 이에게는 소중한 기억이고 마음을 담은 게 될 것이다. 하물며 거대한 집단의 역사를 써내는 일은 어쩌면 반드시 신(신선)과의 접신의 경지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심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담아 이긍익은 그의 호를 옛 역사가의 설화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접신으로 쓴 역사서, 연려실기술

약 30년간에 걸쳐 저술된〈연려실기술>은 조선의 역사서로서 원집(原集) 33권, 별집(別集) 19권, 속집(續集) 7권으로 된 대저술이다. 이긍익 일생의 총체가 바로 이 책일 테니, 시간을 내어 세세히 그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이광사, 이긍익 부자(父子)는 조선 후기 당쟁에 휘몰려 일생을 불우하게 살다간 분들인데, 이광사의 숨겨진 일화는 삶의 자리를 빼앗긴 예술가이자 시대의 주류와 동떨어진 한 지식인의 고뇌를 절감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광사는 신지도 섬에 귀양 살면서 박을 심었는데, 그것이 다 익으면 손수 자기가 지은 글을 그 속에 집어넣고 밀랍으로 주둥이를 봉해 파도 앞에 흘려보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같은 글을 쓰는 땅에서 얻어 보는 자가 있어 바다 동쪽에 이광사가 있음을 알게 되면 족하다."라고.

명예를 탐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사람이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서야 존재하며 의미를 지닐 수 잇는데, 그 관계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게 유배의 형벌이었다.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살다 그 곳에서 죽은 이광사의 간절한 바램과 그의 외로움이 읽히는 에피소드이다.

무수한 ‘님’들의 사이버 해방공간

18세기, 정치권력에서 떨어져 나온 지식인들은 생지명(生誌銘) 혹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으며 그들의 불우한 현실을 감수하였다.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요즈음 사이버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님’이라고 부른다.

오프라인의 한정된 공간을 뛰어 넘어 무한한 만남을 맺어주는 시공간 속에서 만나는 님들은 우리 시대의 논제를 공박하며 정련된 의견을 생산해내지만 더러 당파싸움의 재현인 듯 몰아붙이고 덮어씌우는 경우도 있어 논리보다 힘을 과시하는 장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무한한 우주를 연상시키는 무한공간 사이버는 무수한 님들이 이룩해가는 율도국이 아닌가 싶다. 옛사람들이 진정한 삶의 자리, 또는 그 삶의 자리를 이루어주는 이를 님이라고 불렀다면, 이 시대 해방공간인 사이버 시공간의 수많은 님들은 스스로가 님이며 님을 찾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 글이 자리하는 곳도 역시 사이버 공간이다. 님을 잃고 헤매며 우는 일이 없도록 님다운 사려를 담은 생각을 나누어야 할텐데...늘 역부족이다.

/이규원 2008-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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