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풍요로운 가난> 엠마뉘엘 수녀, 마음산책

▲<풍요로운 가난>, 엠마뉘엘 수녀
무언가 쌓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기는 한 순간이다. 달리 말하자면 부(富)는 어려워도 가난은 쉽다는 말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인간의 본원적인 조건은 부(富) 쪽이기보다는 아무래도 가난 쪽이다.

벌거숭이 어린아이가 가진 것이라곤 적수공권(赤手空拳)의 ‘가난’밖에 없다. A. 겔렌은 이런 인간의 불완전성을 두고 "인간은 결핍의 존재" 라고 정의했던가. 겔렌의 시각에서 '결핍'은 인간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결핍이 여타의 행동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 겔렌의 견해다. 결핍은 충족의 전제조건이다. 비움이 없으면 채움도 없다. 완전한 포만은 그러므로 죽음이다.

더 채워야 할 것이 없는 곳에 행동과 실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핍의 의식이 끝장난 포만의 공간, 거기엔 예술도 문화도 없다. 예술이 무엇인가. 그것은, 있어야 할 것, 그러나 이곳과 여기에 없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술은 그리움과 욕망의 표현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예술은 지금은 없지만, 있어야 할 어떤 것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평화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없었다면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가를 갈증의 존재, 결핍의 존재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이때의 갈증과 결핍을 반드시 물질로 좁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황금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리움도 있는 법이지 않은가. 애정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창작에의 그리움도 있지 않겠는가.

소비만으로 행복이 호락호락 달성될지..

호화스런 화보로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여성잡지들, 이 책들 안의 고급스런 인테리어는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를 부르주와 취미를 은근히 자극한다. 이 책들은 '이 정도의 센스와 품위가 있는 곳에 행복이 깃드는 거야'라고 말한다. 뿐인가. 주위를 둘러 보라. 행복을 약속하는 저 수많은 기호들. 자동차 광고 속에서 함박 웃는 행복한 가족,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신부의 흐뭇한 미소, 아이스크림을 한 입 가득 깨무는 아이들의 더할 수 없이 행복한 표정.

과연 소비만으로 행복이 그렇게 호락호락 달성될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광고 속에서만큼은 행복의 표정은 차고도 넘친다. 광고를 가히 행복의 전도사라 부를 만하다. 광고는 행복의 표정을 보여줌으로써 ‘구매가 있는 곳에 행복도 있다’라고 말한다. 그 행복의 표정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경쟁의 대열에 합류한다.

평당 2000만원이 넘는다는 한국판 베벌리힐스, 타워팰리스. ‘주거문화의 혁명, ’귀족들만의 공간‘이라고 광고가 떠들썩하다. 모든 것이 첨단이란다. 거실 벽의 HAS(Home Automation System) 터치스크린에서는 도곡동 주변의 교통상황과 오늘의 날씨, 그리고 주요 뉴스가 컬러 화면과 자막으로 안내된단다. 거실 벽에 부착된 초강력 먼지 흡입기는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고, 아파트 내에는 헬스장, 수영장, 골프연습장이 있어 ‘원스톱리빙’이 가능하단다. 여기에 물셀틈없는 첨단 보안시스템까지 가세를 한다고 하면 ‘주거문화의 혁명’이란 말도 마케터들의 허언은 아닌 듯싶다.

인간적 진실은 불편함 속에서

집이란 안락한 곳이니만큼 하이테크놀로지에 힘입은 편안한 주거공간이라고 해서 나쁠 것이 없다. 어차피 문명은 편리를 증대시키는 쪽으로 흘러오지 않았으며, 기술의 역사란 편리의 증대와 방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도 할 말은 없다. 문제는 편리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 편리 때문에 간과해버리고 마는 인간적 진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인간적 진실은 불편함 속에서 그 싹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

장자(莊子)는 이미 오래 전에 편리만을 추구하는 물질문명의 위기를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초나라를 지나다가 밭에 물을 주는 한 노인을 보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물동이로 물을 길어 나르는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 쉽게 물을 퍼 댈 수 있는 기계를 권하자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꾀하는 일이 생기고, 꾀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꾀하는 마음이 동하며, 꾀하는 마음이 발하면 순수한 마음이 사라지고, 순수한 마음이 없어지면 정신과 생명이 안정하지 못하고, 정신과 생명이 방황하면 끝내 진리를 지닐 수 없다.""(<莊子> 天地편) 사람들이 기계를 쓰게 되면 기계에 얽매이는 마음이 생길 수 있으며, 그러한 마음이 생기게 되면 순박한 마음을 잃게 되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천지만물의 본체인 도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장자는 지적하고 있다.

편리가 능사는 아니다. 에베레스트산을 오른 알피니시트들은 많다. 그러나 최상의 찬사는 가장 험한 시즌에 가장 험한 코스를 통해 에베레스트를 오른 알피니스트에게 돌아가는 법이다. 최상의 찬사를 몸에 안을 알피니스트들이라면 그의 종교가 무엇이건 간에 성경의 이런 구절에도 흔쾌히 동의할 법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태 7, 13-14) 좁은 문은 편리의 문, 안락의 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예수가 갔던, 또 알피니스트들이 갔던 형극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길을 우리 범인(凡人)에게 강요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부(富)로 인해서 우리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상기할 수는 있다.

‘카이로의 넝마주이’ 엠마뉘엘 수녀

▲ 엠마뉘엘 수녀
<풍요로운 가난>(마음산책)의 저자이며, ‘카이로의 넝마주이’로 알려진 엠마뉘엘 수녀는 말한다. “가난은 하느님,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훨씬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이게 해주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최상의 우리를 되찾도록, 본질로 되돌아가도록 이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난에 바쳐진 최대의 헌사(獻辭)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마디로 가난이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세존이나 보리달마가 아닌 바에야 이런 유혹에 혹할 사람은 많지 않다. 여전히 우린 가난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해인 수녀는 <풍요로운 가난>을 온 국민의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의 욕심은 얼마든 권장받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도 가난이 존재의 풍요로움의 토대가 됨을 알려준다. 그러나 읽기가 녹록치가 않다. 법정의 <무소유> 또한 소유에의 집착이 고뇌의 싹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가난에 대한 풍요로운 질감까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법정의 가난은 속세의 가난이 아니다. 속세 저편 산문(山門)에서의 가난이다. 거기엔 탁발승의 깨달음은 있지만 가난한 이들의 아픔은 없다.

이집트, 수단, 터키 등 빈한한 국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던 엠마뉘엘 수녀는 “교회는 재산을 팔고 가난해져야 한다”는 청원서를 교황에게 냈을 만큼 직선적인 언행과 정열을 가졌던 사람. 아흔을 넘겼지만 부당함을 보면 아직도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그녀의 이런 말은 두고두고 음미해볼 만하다. “나는 패러독스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가난이라는 불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뿌리뽑고 싶을 만큼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이 악이 어떻게 풍요로움의 원천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음미는 우리 의식과 생활 속에 깃들어 있는 거품을 걷어내는 일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볍게 속삭이는 책이 아니라 존재를 흔들어대는 책, 으르렁거리고 포효하는 책이다. 그러나 그 으르렁거림과 포효는 한없이 고요해 보인다. 그것이 성자(聖者)들의 어법이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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