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종종, 유부남과 결혼하려는 미혼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모두 사랑의 노예(?)가 아닌가 싶도록 감정의 급류에 휩쓸리는 게 보는 이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런 마음 앞에서 공동체의 덕목을 운운한다는 것도 우습고, 다만 사회제도와 그 제도에 맞춰지지 않는 사람의 실체를 확인하며 아직은 미완성인 채로 갈등을 겪는 지상의 조건을 탓하였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에서 월선이와 용이는 한 동네에서 자라 오누이처럼 애틋함을 지닌 사이다. 그러나 월선이가 무당의 딸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용이 부모는 그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편견은 깊고 무거워, 용이와 월선

이슬을 머금은 들꽃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두 사람의 감정은 헤어져도 몸만 멀리 있을 뿐, 마음은 한 치도 멀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은 평생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이들 곁에서 두 사람의 비애와 행복을 가시눈으로 흘겨보는 용이의 조강지처 강청댁에게 월선이의 존재는 그대로 비수가 된다.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일생을 지내다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는 강청댁을 바라보는 건 인연의 어긋남, 사람 마음만큼 어쩌지 못하는 게 없다는 걸 여실히 새기는 일이었다. 용이와 월선이는 시대의 편견이 강요한 이별을 반은 감수하고 반 정도는 거부하며 일생을 살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 만큼 사랑이 깊었을 것이고 조강지처 강청댁의 입장에서 보면 무책임한 두 사람이었을 것이다. 전근대적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편견은 깊고 무거워 애초에 월선이의 삶을 가두어 놓았고 그로 인해 이들 세 사람의 일생은 사회적인 강요가 운명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없을 것이다. 논어에 이르기를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 하여 육십 세가 되면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 귀에 순하게 들려 저절로 이해가 된다는 말인데, 마음먹기와 그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기가 순하게 호응하는 경지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래 전,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며 어느 분의 아내가 된 지인(知人)이 있었다. 아는 이들을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는 나의 지인인 이 여자 분을 향한 비난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사인데다 막강한 권세까지 쥐고 있는(?) 남자를 향해 여자가 이기적인 생각을 품었다는 비난이었다. 어떻든 두 사람은 남자의 전처가 죽은 후, 조용한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았다. 남자가 전처와 살던 그 집에서.

머릿결이 거칠어지고 허옇게 탈색되면서

가까이에서 여자 분을 바라본 나는 미디어가 전하는 뉴스, 앞뒤가 끊긴 조각난 이야기에 저마다 가감하며 편집된 스캔들 너머로 한 사람의 운명이 은하수처럼 흘러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경을 보았다.

아내를 둔 남자를 오랫동안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터져 나오던 시점에서 나의 지인은 머리가 반백이 되어갔다.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니었건만, 머릿결이 거칠어지고 허옇게 탈색되면서 그분의 삶은 머릿결처럼 헝클어지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어서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기도 어려웠지만,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할 여력이 없던 나는 그 분 집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저 나의 일상사를 이야기하다 돌아오곤 했다.

사회적으로 각색되고 부풀려지는 이야기를 전혀 나누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정도가 심해지는 지인의 흰머리는 결혼을 앞두고는 올백이 되었음에도 정면으로 그분의 사랑을 내놓고 뭐라 할 말이 없었기에 좀 생뚱맞은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남극 하늘에 오존층이 깨져 빙하가 녹고 있다든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유대인들 간에 두 국가가 성립되어 공존하는 프로그램이 가동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노엄 촘스키가 미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데 등등, 나의 지인이 처한 문제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많은 여자들, 어쩌면 대다수의 여자들에게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절대적일 만큼 중대사일 것이다. 그런 문제에 정면 대응하여 의견을 갖지 못한 채, 저 먼 하늘의 별의 흐름이나 아무도 살지 않는 남극의 얼음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절대적인 존재,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울 에너지를 찾아 통째로 체질변화를 꾀하고 싶었던 것일까... . 한 남자를 만나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그때 내게 별 관심이 없었다. 나의 지인이 전 존재를 걸고 치루는 싸움에서 초연했다. 그분의 어느 말도 내 안에서 에너지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담담히 그저 듣고만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수그러들었을때, 지인의 남편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나는 두 사람이 부부로 생활하는 집에서 같이 식사할 기회가 많았다. 남자분은 이미 사회적 명사라 오래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개인으로는 처음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회였다.

자신의 노구(老軀)를 엄마 잃고 헤매던 유년의 마음에 투영한 채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을 지켜보던 내게, 차츰 그 분은 그저 막 태어난 강아지로, 이제 막 열매의 틀을 지닌 애기감처럼 자연에 맡겨진 순하고 여린 생명으로 보여졌다. 이미 나이가 들어 청년시절과 장년의 세월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유년시절과 노년의 세월이 앞뒷장처럼 달라붙어 원형회귀를 하는 것 같은 노인이었다. 사회적 권세의 흔적인양, 더러 유명 호텔에서 스테이크를 보내오고 이러저러한 행사를 치루며 여러 명사들이 들려 간단한 브리핑을 전하기도 했지만, 정작 이 분은 마지막 생명의 길에서 되돌아보며 자신의 노구(老軀)를 엄마 잃고 헤매던 유년의 마음에 투영한 채, 여린 생명들에 취해 정원을 몇 바퀴씩 돌며 새로이 움트는 생명체에 자지러지는 황홀감을 표현한다든지 집 나간 강아지를 향해 미칠 것 같은 연민으로 사무쳐 있었다.

아내인 나의 지인은 이러한 남자 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녀에서 중년에 이르도록 아내 있는 유부남을 두고 숨듯 살아온 자신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을까',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뭐라 말하기 어려운 슬픔을 느꼈다.

누군가의 아픔을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사랑은 그 나름의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지인의 남편을 바라보며 내 안에서 부정적인 마음이 고여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불러들여 그의 정체성을 지우면서 존재하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거부감, 사랑이 덧칠된 욕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사랑과 욕망이 꽈배기처럼 꼬인 감정의 흐름은 임계점에 다다르면 욕망의 부피만큼 추락하고 사랑의 순수만큼 구원의 손길로 다가올 것이다. 욕망이 배제된 사랑도, 사랑이 없는 욕망도 비현실적인 일일 테지만.
간통(Adultery)과 천사(Angel)의 첫글자

<주홍글씨>에서 헤스터 프린은 딤즈데일이라는 목사와의 간통으로 딸 아이 펄을 낳는다. 그리고 목에 간통(Adultery)의 A 글자를 걸고 다녀야만 했다. 19세기, 지금처럼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헤스터 프린은 뒤따라오겠다던 남편을 기다리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마을의 목사 딤즈데일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남편이 나타나자, 헤스터 프린은 간통을 저지른 여자로 추락한다. 온갖 증오를 다 감내하며 그러나 여자는 성실하게 살아갔다. 간통의 상대방 남자는 청교도인 목사이지만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죽어갔지만, 헤스터 프린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벌을 다 받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은 그녀 가슴에 달고 있는 A를 천사(Angel)의 첫글자 A로 읽어낸다.

감정의 변화, 인연의 어긋남들, 그리고 근원적인 한계를 지닌 사람들을 하나의 제도 속에 묶어 이끌어가는 건 무리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반사회적 또는 비사회적인 행동들이 끊임없이 폭발하는 것이리라. 제도 속에 자신을 가두며 답답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일이나, 일탈을 벌여 제도 너머에 둥지를 트는 일 모두 생명이 지향하는 완전한 행복은 아닐 것이다.

나름의 몫만큼 아픔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소설 <토지> 속의 용이와 월선이, 그리고 숨겨진 사람이 되어 일생을 살아온 나의 지인, 그리고 <주홍글씨>속의 헤스터 프린과 딤즈데일은 어떻든 이 지상에서는 외면당하며 동시에 사랑받는 사람들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는 경계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결혼생활에 성실하지도 못하고 혼자 살아내지도 못한 채, 결혼과 이혼 그리고 간통이라는 낯붉히는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나보다. 문화인류학 속에는 갖가지 결혼의 형태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한 사회가 받아들이는 형태는 대체로 하나로 고정된다. 저마다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지향점이 어긋나는 사람들이 하나의 제도 속에 묶여 살아간다는 게 이미 많은 문제점을 품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어떠한 대안이 없음에랴 나름의 몫만큼 아픔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속에는 사람들 저마다 수호천사가 있어 보호받고 있다고 위로한다. 이처럼 점성술에서는 세상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만의 별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가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는가 보다. 때로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찬 공기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겨울별들은 노숙자들 마냥 춥고 외로워 보이지만. 저마다 어느 순간 제 고향별에로 회귀하며 우리는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것일까.

아이들을 만나 책읽기를 하다, 어느 한 아이의 성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과 같은 희성이었다. 녀석에게 물었다. '아빠 이름이 뭐니?'

/이규원 200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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