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어느 날 한 농부가 철학자 크산토스에게 “왜 정성스럽게 키우는 채소가 아무렇게나 두는 잡초보다 훨씬 못 자라는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크산토스는 황당한 질문에 “신의 섭리가 아닌가.”라며 슬쩍 넘어가려 했다. 이솝우화를 쓴 이솝은 이 철학자 크산토스의 노예였다 그의 통찰력은 철학자인 주인과는 달랐다.

천호동 성당에 다닐 무렵, 그 성당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사는 관리인 아저씨는 하얀 진돗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성당이라 진돗개는 늘 개줄에 매여 반원을 그리며 제자리걸음을 하다, 우두커니 서서 예수상에 성호를 긋는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멍하니 먼 데를 쳐다보곤 했다. 그 당시 나는 일년 동안 새벽미사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간절한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일 년을 넘기고 또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하느님은 묵묵부답이셨고 가슴에는 답답증이 쌓여갔다.

개줄을 풀어줄 누군가

어느 비오는 날, 나는 성당 마당에 찍힌 진돗개의 발자국을 보고 울어버렸다. 개줄 길이를 반지름으로 진돗개의 수많은 발자국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진돗개가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 그 갇혀있음이 내 가슴에 고여드는 답답증과 하나로 보였다. 나를 묶어놓은 개줄의 실체는 잡히지 않은 채, 매인 현실에서 놓여날 길을 찾기 위해 일 년을 새벽미사로 바치며 애를 태웠던 것이다. 내 목에서 개줄을 풀어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소외감... 외로웠다.

사막을 걸어보면 사막지방에서 형성된 종교가 인격신을 따르는 이유를 알게 된다고 한다. 무생명의 천지, 생명을 위협하는 거친 자연 안에서 마음속에 동그랗게 또아리를 트는 갈망은 오직 하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생명의 심연을 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인격신을 좇는 마음의 진실은 외롭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우주의 법칙, 사리 분명한 초월적 원리보다 인격적인 위로자가 있었으면 하는 건 자연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cosmos)>의 서문에서 저자는 "... 코스모스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아주 희미하게라도 응시하노라면 그것은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떨리며, 높은 데서 떨어지는 아찔한 느낌이, 아득한 기억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위대한 신비들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

지상의 사막, 우주의 심연은 사람에게 같은 울림을 전해주는 것 같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를 통해 만나고자 한 것은 지구 이외의 어느 별에든 누군가 살고 있어 응답해주기를 기다린 것이었으니... .

사막을 홀로 걷고 있다고 느꼈다. 이 세상에 나의 자리는 없다고 노여워했다. 논밭에 뿌려진 씨앗이 아니라 밭둑에서 밭으로 기어들어가려는 잡초처럼 존재감을 거부당하다 보니, 점점 질긴 잡초의 생명력마저 잃어가던 시절이었다. 성당의 미사에 참석하며 잡초가 아닌 당당히 논밭의 한 구석을 내 자리로 주장하는 콩이나 벼, 보리가 되고 싶다며 기도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장례미사가 있던 어느 날,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이 부러워 그가 나였으면 했다. 내가 대신 죽어주는 조건으로 우리 가족에게 얼마의 돈을 주었으면 하는... .

엄마 코에 손을 대어보았다

일 년 동안의 새벽미사를 약속하고 이행하며 드린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좀 시들한 마음으로 새벽미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받지 못하면 죽지 않는 이상 신(神)에게 마음을 풀어놓을 수밖에.

그 시절 가장 큰 고뇌는 어머니가 늘 병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데, 나는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도 앓고 있었다. 세상과의 부조화? ... 딱히 그 병명을 제시하지는 못하겠다. 자다가도 일어나 엄마 코에 손을 대어보곤 했다.

거리에서 구급차가 지나가면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스 영화 속의 어머니들, 늘 부엌에서 빵을 굽거나, 검은색 옷을 입고 마후라를 쓰고 골목길을 지나면 건강한 엉덩이살에 골목이 꽉 막힐 것 같은 그 어머니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좋았다. 박완서 소설 속의 어머니들처럼 세속에 밝아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당신의 자식들을 지상에 자리잡게 하는 어머니를 갖고 싶었다. 어떤 음식도 한 번 드시면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으시는 우리 어머니는 하늘하늘한 몸매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분이셨다. 그런 몸으로 자식들을 위해 애를 쓰고자 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아 지쳐버리셨다. 무의식 속에서 엄마가 몸이 약한 게 늘 불안했던지, 나는 친구들과 중국집에 가면 친구들이 남긴 짬뽕국물까지 들이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꿈속에서도 상실감으로 가슴이 텅 비어갔다. 살고자 하는 의지에서 딱 손을 놓으며 내 마음이 죽어가는 순간, 검푸른 밤 서편 하늘에 손이 나타났다. 서서히 움직이는 (한)손은 하늘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크기였다. 손안에는 작은 삭정이, 아니 바싹 마른 시신 같기도 한 무엇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삭정이 혹은 시신에 생기가 올라온다는 느낌을 받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위로가 가슴에 차올랐다. 온 우주가 한 생명을 지키고 있었다는 자각, 잡초처럼 버려지고 뽑혀나가는 존재로 살아가는 미미한 사람들, 아프면 죽을 날을 기다리는 무능한 사람들을 하늘은 눈동자처럼 애지중지 살피고 있었다는 믿음이 마음에 새겨졌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 든 것만큼이나 평안한 일이었다. 우주는 하느님의 자궁이었다.

노예 이솝의 답변

좀 맹랑한 통계수치이긴 하지만, 기도와 그 효과에 대한 통계치는 서로 인과적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기도 중에 사람들은 바라는 결과를 넘어서 영원에 닿으며 성장하거나 단순한 현실이라는 차원을 벗어나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기도가 이루어졌다거나 응답이 없다는 대답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일지 모르겠다.

한때, 사막을 홀로 걷는 듯한 외로움은 개줄에 매인 개처럼 나를 울게 만들었다. 그런 어느 날 꿈속의 손은 부지불식간에 외로움을 잊게 해주었다. 꿈을 되새겨보노라면 여유가 생기며, 세상과의 만남의 길을 터주었고 이전의 일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참을 힘을 주었다.

철학자 크산토스의 노예 이솝은 “왜 정성스럽게 키우는 채소가 아무렇게나 두는 잡초보다 훨씬 못 자라는지요?" 라는 농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대지(大地)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잡초가 친자식이고 농부가 억지로 씨를 뿌리고 심는 채소는 의붓자식이겠지요?”

/이규원 200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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