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디트리히 슈바니츠 저, 인성기 역 / 들녘, 2002

대학시절 농촌활동 때의 이야기. 논배미에 나타난 뱀을 잡았는데 그 몸 안에 뱀 알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누군가가 뱀 알을 삶아 오더니 먹으라고 내놓는 것이었다. 평소 기가 드센 친구들마저 비위가 상하는지 슬금슬금 피했다. 위기는 호기라던가. 내 안의 남성성이 말했다. ‘먹어 봐’ 나는 그 남성성의 지령에 따라 호기 좋게 그 알을 입에 넣었다. 오, 가련한 내 남성성은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아내느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영웅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포만감이 구역질을 인내하게 하였다. 끝내 뱀 알을 삼켰다.

가련한 내 남성성

뱀 알 사건으로 내 남성성은 한 차례 고역을 치르며 약간의 자기반성을 했지만 그 반성이란 것이 한낱 형식에 그쳤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뒷날 있었던 ‘민물고기회’ 사건. 농촌 청년들과 우의를 다지기 위한 밤낚시의 결과, 희생물이 된 민물고기를 머리 부분만 잘라버리고 초장에 찍어 먹는 대목에서 많은 친구들이 발을 뒤로 뺐다. 농촌총각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맛이 일품이라며 먹기를 권했지만 겉으로는 호랑이도 잡아먹을 기세인 우리 일행들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 갈 데 없는 ‘도횟것’들이었다.

그들의 비위란 것도 따지고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더구나 민물고기를 디스토마와 곧바로 연결시킬 수 있는 그들의 건전한 보건상식이 ‘날고기’ 먹기를 한사코 주저하게 만들었다. 질병과 죽음을 담보로 용기를 과시할 순 없었다. 그 망설임의 순간, 어차피 죽어도 한 번이지, 라며 내 안의 남성성이 호기 있게 나섰다. 태연함을 애써 가장하며 우물우물 씹어 넘길 때, 내 혀에 돌던 민물고기의 쫀득쫀득한 육질의 미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왕 엎질러진 물, 하는 체념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고개를 들던 그 찜찜함 또한 잊을 수가 없다. 때로 만용은 공포를 이기는 법. 끝내 열 마리 이상의 민물고기를 삼켰다.

따지고 보면 청춘은 그런 만용 속에 있기 마련이다. 수컷다운 웅자(雄姿)를 한껏 뽐내고 싶다는 자기과시가 치기 어린 열정을 만나, 웃지 못할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때가 바로 그때다. 그러나 그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청춘의 표정은 심각하다. 운명이 실존에 부과하는 소명에 충실하게 답하고 있다는 선민의식이 그 표정에 자못 종교적 엄숙함마저 부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 얼굴은 한심하게도 제 열정에 갇혀 제 발 밑을 보지 못한다. 기억의 서랍 속에 남자들은 이런 우스꽝스런 표정 몇 개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남성과 여성은 개와 고양이처럼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이라는 부제가 붙은 디트리히 슈바니치의 저서 <남자>(들녘)가 그리고 있는 남자들은 내가 고백한 남성성처럼 시종일관 천박하다. 슈바니츠는 여자들에게 이 가엾은 동물인 남자를 좀 잘 보아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한다. 그는 서문(序文)에서 고교 동창회에서 영웅담을 늘어놓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구나! 남자들이 유치한 농담들을 해대는 것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비애를 숨긴다는 것을, 기회를 놓치고 허송세월하며 실수를 저질러 학창시절의 커다란 희망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하게 지낸 세월이 한스럽지만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싶고 고독하다는 것을, 그래서 일부러 철딱서니 없는 바보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여자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면, 이보다 남자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키워드가 있을까. 뱀 알을 삼키며 어쩔 줄 몰라하는 연약함을 가장 하는 저 영웅적인 표정, 디스토마쯤 걱정될 것이 없다고 호언하면서 태연함을 가장하는 저 표정. 적어도 필자에게 가면은 늘 그런 구체적인 표정으로 왔다.

저자는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개와 고양이의 경우와 비교한다. 즉 남성과 여성은 개와 고양이처럼 태생적으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쓰고 있느니만큼 갈등은 이해관계의 상충보다는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남자는 인위적이고 여자는 자연적'이라고 해석하는 저자는 특히 ‘남자라는 존재는 아주 불안한 생활감정을 지닌 특별한 종족으로서 그 구성원들은 늘 자기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곤경에 처해 있으며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다.’라고 말한다 자기존재를 입증해야만 하는 곤경 속에서 결국 남자들은 억지 춘향격으로 뱀 알과 날고기를 삼키기도 한다. 어찌 보면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많은 영웅적인 행동들이 그런 웃지 못할 딜레마의 산물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가련한 남자들, 왜 그들은 좀더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인지.

남자들은 '문명의 덫에 걸린 존재'다

확실히 남자들은 '문명의 덫에 걸린 존재'다. 문명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고, 그 역할은 특정한 가면 쓰기를 요구한다.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게끔 만들어진 존재가 남자는 아니던가. 그러나 가면 뒤의 얼굴은 무엇인가. 군림하려는 남성 속에도 칭얼대며 위로 받기를 갈망하는 어린아이는 무엇인가. 남성문화는 애써 그 어린아이의 칭얼댐을 무시하기를 강요한다. 내면의 욕구를 얼마만큼 의연하게 배반하느냐에 따라 남성적 힘의 스케일이 증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내면의 욕구도 호락호락 백기(白旗)를 들지 않는다. 내면의 어린아이, 내면의 여성, 그것은 타협의 대상일 수는 없어도 억압의 대상일 수는 없다. 어떤 폭군도 무의식의 역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억눌려진 무의식은 말하는 법이다. “ I will be back""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감이 없진 않지만 저자는 문명이란 여자들에 의해 고안되었고 문명의 목표는 남자를 길들이는 데에 있다고도 주장한다. 저자의 말을 들어 보자. ‘문명은 여자가 고안한 것이다. 문명의 본래 목표는 남자를 길들이는 데 있었다. 사회 안에 문명이라는 팻말을 내건 평화구역 하나가 설정되었다. 그 수단은 섹스였다. 바로 이것이 남자를 이분화시켰고 두 얼굴을 가지게 했다. 남자는 외부 세계, 즉 적들에 대해서는 강한 투사이고 야만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내부 세계, 즉 그가 원하는 여자에게는 유순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여야 했다. 따라서 자신의 거친 행동을 자제하고 야만성에 고삐를 채워야 했다. 요컨대 그는 문명인답게 행동해야 했다.’

슈바니츠의 이분법에 의하면 사회는 냉혹한 동물의 세계다. 그 속에서 남자들은 거친 야수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숨겨야 한다. 그러나 여자 앞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노골화시킬 수 없다. 슈바니츠가 말하는 연애의 세계는 사랑의 소네트를 요구하는 문명의 세계다. 사랑을 얻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본능과 욕망을 억누르고 그것을 문명인답게 세련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자의 마음과 몸을 얻기까지는 슈바니츠의 말은 진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남편들을 생각해 보시라. 현실의 남편들이 과연 문명의 세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숫사자처럼 정글 속에서 군림한다. 오, 문명의 세계 속에서 백년해로(百年偕老)할 수 있는 부부는 행복하다.

남자는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릴까봐 늘 염려하고 있다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남자들이 가지는 원초적 감정은 다름 아닌 공포와 불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남자로서 거세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으로부터의 공포와 불안 말이다. 언제든 냉혹한 승부의 세계로부터 축출될지 모른다는 공포, 그런 축출로 인해 그가 가진 모든 상징적인 권력들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바로 그 불안이 남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가면을 뒤집어쓰게 하는 것은 아닌지. 슈바니츠는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통제다. 그는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릴까봐 늘 염려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남자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편집증 환자다. 그 노이로제에 걸린 남자는 통제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으므로 수천 가지의 회피전략을 개발한다.’ 떠들썩한 술자리를 들여다 보시라.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의 창고에서 자신의 무공(武功)을 상기해줄 수 있는 무용담을 끄집어내는 사내들, 별것도 아닌 일에 왁자지껄하게 웃는 사내들.

남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부러움의 대상은 아니다. 슈바니츠는 여성 독자들에게 동정을 호소한다. 문명은 여성의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되, 문명을 지탱하는 부담은 남성이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는 인위적이고 여자는 자연적이라고 말한다. 즉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여자이고 남자는 추후에 남자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자는 어떤 일을 덧붙이지 않아도 여자 그 자체이다. 그러나 남자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통과의례를 거쳐야 비로소 남자가 된다.

슈바니츠는 동․서양에 널리 퍼져 있는 성인의식을 한 예로 든다. 성인식에서 남자들은 영웅적으로 행동해야 할 처지에 곧잘 놓인다. 모든 성인식과 통과의례의 구조는 이렇다. <남자가 되려거든 고통을 이겨내라. 고통의 얼굴을 숨겨라.> 그러나 남자의 몸 속에 갇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남자들은 제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타인에게 들킬까봐 불안하다. 남자의 무의식은 그런 것이다. 의연한 표정과 불안한 표정, 한 남자는 이런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을 지닌다.

폭발과 도주

남자로서의 압력이 한계점을 초과하면, 남자는 고압가스통과 같이 되어 폭발한다. 폭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외부로 향하는 공격적인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로 향하는 자가 공격적인 유형이다. 전자의 남자는 화를 내거나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게 되며, 후자의 남자는 도주한다고 슈바니츠는 말한다. 억압적인 남성상이 지배적인 코드로 작용하는 대한민국에서 ‘폭발’과 ‘도주’는 도처에서 목격된다. 음주는 폭발의 한 유형이고, 예술과 외도는 후자의 한 유형이리라. 상기해보시라. 대한민국에서 소비되는 도저한 알콜의 양과 황색저널리즘의 지면을 장식하는 갖가지 기사들을. 술꾼과 바람둥이에게 연민 있을진저, 음주와 외도는 결국 가련하기 짝이 없는 일탈의 몸짓이다.

공격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더라도 슈바니츠의 논점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은 높다. 그는 말한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어느 정도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남자가 몸을 외부의 사물처럼 체험하는 것도 그러한 태도에 속한다. 그는 자기 내면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는 몸 속에 느껴지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버린다. 그는 방해가 되는 유약한 것을 가능한 한 무시한다. 그 대신 그는 몸을 통제하려고 노력한다. 그에게 몸은 세상의 사물들 중 하나다.

이런 점은 유년시절의 기억 속에서 그가 자신의 몸을 낯선 대상처럼 마주보고 있었던 경험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우선 몸을 통제하는 것을 배워야 했으며, 이 방식을 통해 비로소 몸을 자기 것이 되게 했다.’ 자신의 몸을 도구로 여기는 남성들은 여성들의 몸조차 도구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슈바니츠의 남성관은 매춘과 남성의 외도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주는 현재의 억압적 남성문화의 기원을 통찰할 수 있게 할지는 몰라도 현재의 남성적 문화를 초월할 수 있는 깊은 사유와 대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무한한 지적 배경, 서구문명을 넓게 조감하는 문명론적 시각으로 슈바니츠의 저서들은 풍부한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 여기에 그의 탁월한 유머감각까지 가세한다. 여러모로 아쉽기는 하지만 이만한 읽을 거리도 만나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남자는 남자라는 이데올로기의 어쩔 수 없는 희생물이다. 강함을 남성의 전유물쯤으로 알고 있는 남성들, 그 강함을 내던져 버리고 탈주와 일탈을 꿈꾸는 사내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얽히지 않는다면 성(性)은 무엇이겠는가. 남성을 동정할 채비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남성을 적으로서가 아니라 동반자로 알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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