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김진홍과 이명박, 그리고 전태일

모처럼 동대문 시장을 순례하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청계천변을 따라 시청 쪽으로 걸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켜들고 광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촛불을 저주하며 나라를 걱정하는데 화염병과 최루탄, 이름도 어수선한 무슨무슨 탄의 연기 자욱한 풍경에 익숙한 내게 촛불집회는 너무 부드럽고 아름다워 정작 촛불을 켜든 호소도 잠시 잊게 만들었다.

그런데 몇몇 개신교 목사님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 낯익은 이름, 김진홍 목사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반가움으로 보다 그 내용에 잠시 당혹스러웠다.
"김진홍 목사님, 목사로서 당신이 부끄럽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부끄럽다니...'

때로, 이젠 부끄러운 이름, 김진홍

'1971년, 청계천에 즐비하게 서있던 판자촌에서, 31살 열혈청년 김진홍 목사님은 활빈(活貧)교회를 세웠다. 마을주민이 교회를 섬기는 게 아니라 교회가 마을주민들을 섬기자는 모토를 내세우며 헌신하셨고 빈민촌 청계천변으로 몰려 이미 사회적 자아를 상실한 그 동네사람들과 연대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저마다 자존감을 갖도록 회생시켜 나갔다. 이러한 활빈교회의 목회에 감동한 외국의 선교사들이 목사님의 역동적 선교를 배우기 위해 판자촌교회를 찾아오곤 했다. 그러다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1976년 목사님은 철거민들을 이끌고 남양만에 머물며 두레마을을 일궈내셨다. 목사님의 친근한 대중적 이미지는 판자촌민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부드럽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목사님의 목회 에피소드들이 아직도 중년층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데 2008년 서울 청계천 시위현장에서 그분의 이름은 그리스도교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내 마음은 쉽게 그 광경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미디어를 통해 뉴라이트연합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 이명박 장로님을 대통령으로 지지한다는 기사를 읽었고 이어 지금의 촛불시위와 이를 보도하는 방송인들을 향해 의구심을 느끼게 하는 인터뷰를 하셨지만 그분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촛불을 들고 민의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분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하느님은 한 사람 안에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가

김진홍 목사님이 1970년대 청계천에서 사목하던 중 체험한 에피소드 하나. 청계천 판자촌에 사는 어느 여인이 깊은 병에 걸려 목사님이 그 분을 엎고 지금의 한양대 병원(?)으로 갔다. 그런데 돈이 없어 치료도 받아보지 못한 채, 축 늘어져 다 죽어가는 환자를 되업고 돌아오는데, 목사님은 여인이 너무 가엾어 울컥 하느님께 대들었다고 한다. 만약에 하느님이 이 여자를 살려내지 못하고 죽여버리면 하느님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청계천을 떠나겠다고 협박성 기도를 쏟아부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등에서 맥을 놓아가던 여인이 어느 순간 꿈틀대며 살아나는 기척을 보내왔다. 그 때 목사님은 살아계신 예수님과 만나는 뜨거움에 사로잡혔다며 간증하셨다.

스테디셀러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에서도, 마을의 신부님이 성당과 신자들에게 닥친 급박한 처지를 해결하다 지쳐버리면, 도끼를 들고 십자고상에 다가와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휘두르겠다는 협박을 하셨다. 그러면 어찌된 일인지 하느님은 겁에 질렸다는 듯이 신부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폭소가 터져 나오는 대목이었다. 목사님의 체험을 들으면서도 눈물과 미소가 오버랩 되었다.

별 것 아닌 병으로, 병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고 돈이 없어 병자를 되업고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을까. 그 분의 개척교회 이름 활빈(活貧)의 뜻은 가난을 이겨내자는 의미이다. 멀리 소설 속 홍길동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조직한 무리도 바로 활빈당(活貧黨)이었음을 기억한다.

가난 극복, 청계천이 낳은 이명박과 김진홍

이러한 청계천 성공담을 이뤄낸 목사님이 청계천개발의 주역(?) 이명박 장로님을 대통령으로 지지했고 그 뜻을 이루셨다. 두 분은 청계천을 공통분모로 세상과 맞서 쾌거를 이루신 분들이니 공감대가 없진 않으리라. 그러나 한 분은 경제개발의 의지를 불태우는 분이고, 다른 한 분은 경제개발에 밀려난 이들을 돌보는 목회 일을 하셨던 분이기에 좀 의아한 생각은 들었다.

허나 두 분 다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한 분들이었으므로 의기투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통분모는 커 보였다. 더구나 지난 대선의 주제는 '경제회생'이었으니 두 분이 평생을 두고 의지를 불태워 온 화두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거목이신 두 분은 그 분들의 피땀 어린 청계광장에서 촛불시위대에 의해 수모를 겪고 있다. 그 이유를 청계천은 알고 있을까? 청계천이 품고 흐르는 묵중한 이야기 중에는 이 분들과 동시대인이었지만 조금 자리를 달리해, 우리 영혼을 관통하며 소멸해간 한 사람의 이야기와 맞물려야만 그 연유가 찾아지지 않을까 한다.

또 하나의 청계천 이야기, 전태일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앞에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한 자리를 동판으로 표시해 놓고 있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 피복공장에서 일하던 22살 젊은이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호소를 남기고 자신의 몸을 불태운 사건은 어쩌면 십자가 사건만큼의 충격으로 사람들 가슴에 불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후일 그의 평전을 읽던 나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열넷 열다섯 어린 소녀들이 평화시장 다락방에 위치한 피복공장에서 그녀들의 나이와 맞먹는 시간을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어린 처녀들이 하루 받는 급여는 당시 커피 한잔 값에 불과한 50원이었다. 그녀들은 저임금으로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다 혼탁한 봉제공장의 먼지를 마셔 폐가 망가졌고 그 공장바닥에서 잠자며 보온을 하지 못해 어린 나이에 자궁을 들어내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누이동생격인 어린 처녀들의 공장생활을 지켜보며 전태일은 그녀들의 삶의 가치를 세상에 각인시키고 그들의 인권을 지켜낼 길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 길은 전태일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등신불(等身佛)이 되는 것으로 좁혀졌다. 22살, 젊다기보다 아직은 어린 청년의 죽음이었다.

청계천 거리는 그 곳에서 성공을 일군 두 분의 이야기와 끝내 거기에 몸을 묻은 이의 희망과 절망을 품고 있다. 지금 청계광장과 시청, 광화문을 넘나들며 처음 촛불을 밝힌 이들은 한 세대 전, 청계천에서 시다로 미싱공으로 일하던 이들과 같은 나이라 그들을 보는 마음이 유정해진다.

이 새로운 세대가 치켜든 촛불에 대한 응답이 따뜻하고 슬기로운 것이기를 기도한다. '어떤 답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규원 200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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