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일순의 아내 이인숙 씨와 동생 장화순 씨

한국현대사에서 ‘원주(原州)’하면 지학순 주교를 떠올린다. 1970년대의 유신독재아래서 ‘정치적 망명객’들의 우산이 되어 주었던 지 주교의 품이 그만큼 컸던 탓이다. 그리고 김지하를 떠올리지만, 그 우묵한 배후엔 늘 무위당 장일순(요한)이 있었다.

장일순은 호를 호암(湖岩)이라 부르다가 1960년대에는 청강(靑江)으로, 1970년대에는 무위당(無爲堂)으로, 1980년대부터는 일속자(一粟子), 곧 ‘조 한알’로 불렀다.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무위당좁쌀만인계’를 시작해서 최근에 ‘무위당 사람들’이란 사단법인을 설립했는데, 장일순의 동생인 장화순 씨(전 진광고등학교 교장)는 “좁쌀이 아니라 조다. 좁쌀은 이미 방아를 찧은 것이라 다시 생명을 싹트일 수 없지만, 조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형님은 조인 채로 땅에 떨어져 무엇인가 생명을 낳기를 기대했다”고 말한다.

조(粟)인 채로 땅에 떨어져

무위당 장일순은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406번지에서 태어나 1960년대 이후 67세 되던 1994년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위암으로 숨지기까지 평생 원주를 떠나지 않았다. 현재 봉산동 생가에는 아내 이인숙 씨(82세)가 혼자 살고 있으며, 길 건너편 집에 평생 고락을 나누어왔던 동생 장화순 씨가 살고 있다. 이인숙 씨와 장화순 씨를 만나 가족사에 얽힌 장일순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 요즘 감기에 걸려고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이인숙 씨(사진/한상봉)

술 이야기부터 나왔다. 이인숙 씨는 “그이의 집안 내력이 술을 잘 드시지 못한다. 시집 와도 술상 차릴 일 없겠다 생각했는데...찾아오는 손님마다 술꾼들이 많았다. 그이는 주변에서 권하는 술을 사양하지 못하는 성미라서 늘 따라 주는대로 받아드시고 제방길을 걸어와서는 집에서 토하시곤 했다. 이것도 문제고, 모든지 속으로 삭이시는 분이라 스트레스로 돌아가신 것 같다.”고 했다. 장화순 씨는 “뻔히 못 드시는 줄 알면서도 술 권하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나서서 타박을 준적도 많았지만 소용없었다.”고 전한다. 장일순은 이를 두고 술을 권하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모두 '애정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대뜸 장화순 씨는 “형님은 성인”이라고 말하며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동생은 경우가 어긋나면 흥분하곤 했는데, 형은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야지!”하며 소화하는 기질이었다 한다.

“형님과 나는 세 살 터울인데, 내가 소학교 3학년 때, 한번은 내가 싫은 소리를 하니까, 형님이 물 한 그릇 떠오라고 시켰어요. 그리곤 물그릇을 잡아당기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잔을 확 잡아당기니 물이 넘쳐버리더라고요. 그걸 보고 형님은 ‘느긋하게 보듬어서 소화해야지, 성질대로 하면 안 된다고 타일렀지요.”

장화순 씨는 형님 장일순이 발산하는 성격이었다면 병도 덜 걸렸을 것이라며 안타까와했다. 장일순의 품성은 사실 집안내력이기도 했다. 이인숙 씨가 처음 시집왔을 때 지주집안이라기에 와서 보니, 시어머니가 런닝셔츠 조차 기어입고 계시더란다. 한국전쟁 당시에 평원동 큰집도 불타버리고 가족들이 모여서 봉산동에 소박한 집을 새로 지었다. “그래도 큰 욕심 내지 않고 살아서 마당에서 질경이를 뜯어먹어도 쌀은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부친 장복흥 옹 회갑 기념사진(사진제공/무위당사람들)

그 이상 그동안 우리가 받아먹었다

장일순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본래 원주의 대지주였던 할아버지는 검소하고 겸손한 분이어서 곡식 한 알이라도 땅에 떨어지면 그릇에 주워 담으셨고, 걸식하는 사람이 오면 겨울에는 상을 차려 방에 모시고, 여름에는 마루에 모셨다 한다. 늘 식객이 끊이지 않았던 모양인데, 그중에는 장일순에게 붓글씨를 가르쳤던 차강 박기정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이 원주에 들어오고도 지주집안 가솔들이 고스란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부친(장복흥)이 인심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화순 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해방이 되고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할 때, 어느날 아버지가 소작인들이 붙여먹던 전답에 대한 이전서류를 작성해서 그들에게 갖다주라 했다. 왜요? 라고 물으니, ‘그 이상의 것을 그동안 우리가 받아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전답을 무상으로 내주었던 장복흥 일가는 인민군 치하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나중에 ‘밝음신협’을 만들 때, 장일순이 ‘不患貧 患不均(불환빈 환불균)’이란 현판을 걸어놓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가난을 걱정하지 말고 불평등함을 걱정하라”는 뜻이다.

한편 장화순 씨는 한국전쟁 당시를 기억하며, 자신은 1.4후퇴 때 친구 소개로 2군단 소속 군속으로 일하다 장교시험을 보고 6사단 병기학교 교관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장일순이 편지를 보내 “양갈보는 우리의 누이고 동생이다. 따뜻하게 대해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군인이라고 오입하지 말라는 뜻일 텐데, 나는 군용차를 타고 가다가 그네들이 길을 막고 서서 ‘놀다가라’고 하면, 차를 세우고 돈을 집어준 뒤에 보내고 다시 출발했다. 혹간 종로를 걸어갈 때도 그네들이 길을 막으면 ‘미안해 단골이 있어’라고 둘러대고 자리를 뜨곤 했다.”고 말한다.

부인, 결혼하기 무섭게 형무소 옥바라지

▲ 1988년 서울전시회를 마치고.(사진제공/무위당사람들)

원주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친구 소개로 장일순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 이인숙 씨는 서울 재동 다방에서 만나기도 하고, 하루종일 덕구궁이며 창경원 등에서 장일순과 데이트를 했다. 당시 장일순은 서울공업전문대에 다니다가 미군대령이 총장으로 취임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에 대한 반대투쟁을 하다가 제적당하고, 다시 시험봐서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에 1954년에 사재를 털어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우고, 아인쉬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20대 초반에 ‘원 월드 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와중에 경기여고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이인숙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1961년에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장일순은 “우리가 비록 약소민족이기는 하나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중립화 평화통일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게 빌미가 되어 8년 언도를 받고 3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와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를 두고 이인숙 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형님은 기본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들은 그 언동이 십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성경의 십계명뿐 아니라 모든 종교와 집단에서 만든 법은 ‘최소’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알아서 지켜야 하는 것이 많은데, 남을 돕는다거나 위로한다거나 하는 거죠. 이번에 천안함 사고 때 많은 국민들이 아파했는데, 이런 것은 법에 안 나와요. 규칙이나 금기란 눈에 보이게 남을 해치는 것을 막으려는 거죠.”

어릴 적에 장일순과 장화순은 함께 붓글씨를 배운 모양이다. 어려서 장일순은 잡기에 능하지 않아 딱지치기며 구슬치기, 울타리 나무 박는 일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데 유난히 붓글씨만은 진득하게 앉아서 잘 했다. “나는 세 살 아래인것도 생각 안하고, 형님처럼 안 되니까 화가 나서 붓글씨 쓰는 것을 집어치웠다. 아버지는 유난히 그런 형님을 아끼셨기 때문에 늘 차별당한다는 생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장화순 씨는 말한다.

지학순 주교와 만나 뜻을 통하고 일해 

▲ 1970년경 원주 가톨릭센터에서.(사진제공/무위당사람들)

한편 장일순이 1965년 지학순 주교를 만난 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장화순 씨는 박정희 집권 당시에 교회는 보수적이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 천주교회는 더더욱 보수적이었는데, 천주교 신앙에선 내세만 말하고 현세는 지옥이라고 가르쳤다. 신앙을 돈독히 갖는 것은 영원한 천상의 낙을 누리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는가?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화순 씨에 따르면, 지학순 주교가 원주교구장으로 왔지만, 이북사람으로 남한에서도 청주, 부산 등지에서 사목활동을 한 외지(外地)사람이었고, 원주가 낯선 곳이었다. 그래서 일부 사제들이 몇몇 평신도들을 소개해 주었지만 지 주교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개 조만과 빠짐없이 하고 묵주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다. 신자들을 깨우칠 수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 아마 형님을 만나고 나서야 속이 확 트인듯 하다.”

지학순 주교는 제2차바티칸공의회가 낳은 원주교구에서 공의회 결과를 교구에서 실천해 볼 요량이었고, 늘 타임즈와 뉴스위크지 등을 탐독하며 정세를 분석하고 예감해 오던 장일순을 만나서 이을 도모하게 된다. 서로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형님은 대성학교 교장직을 박탈당한 뒤로는 한번도 공식적인 직함을 가져본 적이 없다. 지 주교에게 교구일을 맡아볼 사람으로 추천한 것도 가톨릭신자도 아니었던 김영주 씨였다. 천주교에선 신자에게만 일을 맡기는 게 관례인데, 주교님이 대단한 분이란 걸 여기서 알았다. 첫 인상이 통하니까 지 주교와 형님은 자주 만나게 되고, 만날수록 답답한 구석이 풀어지니 밤낮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장화순 씨는 전한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사회적인 일은 장일순, 김영주 등과 의논하고, 교회일을 맡길 사람을 물색하다가 원동성당에 있던 최창규 신부 주선으로 원동성당과 교구 양쪽 사목위원장으로 장화순을 선택했다. 장화순 씨는 “교회는 신자들에게 겸손하고 따뜻하게만 하면 만사가 잘 풀리는 법이다. 불손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신부가 명하니 합시다’하면 될 일이 없다”고 말했다.

고요한 말년 

▲ 1993년 항암치료를 받다가 잠시 퇴원해서 제자들과 찻집에서(사진제공/무위당사람들)

장화순 씨는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장일순과 부모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해월을 흠모했던 장일순은 강용하는 법도 없고 항상 겸손했는데,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 형님이 감옥에 갔을 때도 담당검사가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이라며 풀려날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반공을 국시로 한 군사정권이 장일순을 강원도 인사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석방되지 못했다.” 그때에도 장일순은 “옥중에도 불우한 사람이 많다.”며 돌보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장화순은 자신의 친구가 검사가 될 때 “배고파서 들어온 사람은 봐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십수 년 검사생활을 하고 변호사가 되어 그 친구를 다시 만났더니, 그동안 그것만큼은 지켰다고 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단다. “참 고맙다. 이 신세 생전 못 갚겠다.” 친구가 답하길 “아니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으니 내가 고맙지.”하더란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장화순 씨는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힘주어 “요즘 천주교회에서 사형제도 반대운동을 열심히 하니 보기 좋다. 그동안 정치적으로 큰 인물들이 너무 많이 죽어갔다. 열 도둑 놓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무죄한 사람 희생되는 게 더 아깝다.”고 말했다.

지금 장화순 씨는 4년째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지만, 장일순의 말년처럼 고요했다. 오히려 “아버님도 형님도 모두 예순일곱에 돌아가셨는데 난 13년이나 더 살아서 두 분께 죄송하다”면서, 자신도 삶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늘 꿈 없이 자면 죽은 것과 마찬가진데, 매일 밤마다 죽음을 연습한다. 하느님이 데려가신다니, 거기가 천국이라니 좋지 뭐” 하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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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 연행되어 새벽 세 시 열차로 서울로 간다기에 아이 업고 기저귀 보따리 들고 수갑 찬 남편 옆에서 서울까지 따라갔어요.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는 안부가 궁금해 매일 형무소에 찾아갔는데... 한번은 형무소 안 계단에서 그이가 밖에 있는 저를 보았는지 손을 흔들어 보이더군요. 그때는 아이 우유도 먹일 여력이 없어 고생하며, 옥바라지를 했어요. 춘천형무소로 간 뒤엔 마침 그이의 영어실력을 알아본 이가 있어서 인쇄소에서 일하게 되고, 나중엔 그이한테 배웠던 여제자가 간수로 오면서 온실에서 화초에 물을 주다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해월(海月)을 따라 바다로..

장일순이 다시 붓글씨로 마음을 닦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아래서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에 묶여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활동에서 제약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엉덩이를 붙이고 묵선(墨禪)을 하면서 더욱 새로운 해월 최시형에게 마음이 끌렸다. 대학시절부터 마음을 사로잡히기 시작했던 해월에 대해 장일순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장화순 씨 역시 고요히 투병중이다(사진/한상봉)

“눌리고 억압받던 이 한반도 100년의 역사 속에서 그 이상 거룩한 모범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해월에 대한 향심이 많지요. 물론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다 거룩한 모범이지만, 해월 선생은 바로 우리 지척에서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주시고 가셨죠.” 

장일순은 할아버지와 해월 최시형에게서 도리를 배우고, 주변에선 장일순에게 도리를 배웠다. 동생 장화순은 “형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16년이 되었지만 늘 같이 계신것 같다”면서 “시내에서 집에 돌아올 때 함께 천변 제방길을 걷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여기 앉아 계신 것 같다”고 말한다.

“형님은 마음이 대해(大海)같아요. 늘 위로해주고 안아줍니다. 나는 법(法)으로 사는 쪽인데, 형님은 덕(德)으로 사는 쪽이죠. 나무라질 않아요. ‘그런 게 아냐!'하는 법이 없어요. 이야길 다 듣고 나서 노상 ‘응, 그래’ 하시곤 했죠. 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성격인데, 형님은 다 주는 성격이죠. 그래서 할아버지 보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 생각은 이랬죠. 돈을 꾸어간 사람이 안 돌려주면 이유는 세 가지랍니다. 없어서 안 주거나, 있어도 줄 마음이 없거나, 가져간 걸 잊어버린 경우랍니다. 그러니 그걸 재촉하지 말라는 거죠.”

장일순은 붓글씨 작품도 누구든 써달라고 하면 쾌히 응해주었다고 한다. 한 장이든 열 장이든 상관없이 써주었는데, 부탁하지 않으면 알아서 써주지는 않았다는데, 장화순은 장일순의 글쓸 때 심정을 아는 처지라 장일순에게 글씨를 써달라는 말이 도무지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1991년 위암판정을 받고 잠시 회복된 터에 손수 아우 장화순에게 <守則十戒(수칙십계)>란 글씨을 써서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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