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규 칼럼]

예수 그리스도의 장애인과 병자들에 대한 관점은 복음서의 치유기적들에서 드러나듯 당사자주의였다. 이는 최근 장애인운동의 주류이자 대세인 독립생활(independent living)패러다임에서 장애당사자주의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분은 치유기적을 행하면서 치유대상자를 피동적 수혜자로 여겼던 기존의 소위 ‘기적의 손’ 치유자들과는 달리 현대 사회복지의 중요 개념인 임파워먼트(Empowerment) 곧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give authority to)하여 그들의 내재된 능력을 이끌어내는(give ability to) 방식으로 그들을 치유사건의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를 통해 장애인과 병자들은 치유과정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분은 늘 치유를 입게 된 장애인과 병자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확인해주셨는데, 이는 그들 당사자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을 주지시켜주는 확언의 표현으로 그분만의 독특한 말씀이었다.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치유기적 사화들을 살펴보면, 보다 오래된 전승일수록 치유기적에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르 10,52)는 식으로 당사자의 믿음이 강조되지만, 그 전승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치유기적에 있어 당사자의 믿음보단 그분의 사죄권이나 신적 권능이 더 강조된다. 이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교회공동체의 사목적 필요성이나 그리스도론의 확립 차원에서 전승에 대한 의도적인 편집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역설적으로 그것은 그분께서 치유기적을 행할 때 당사자의 믿음을 중요시하고 그에 가장 큰 비중을 두셨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유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분 영성의 뿌리요 바탕이 히브리의 전통적 인간관인 영육일원론의 통전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구약시대 유대사회에서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는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원론적 표리부동의 위선적 삶으로 빠져들 때면 서슴없이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또 그 심판의 채찍으로 그들을 다시 영육일치의 통전적 삶으로 이끌어 복음적 공동체를 복구시키곤 했었다.

그런 전통을 바탕으로 활짝 피어난 그분의 영성은 특히 장애인과 병자들에 대한 치유기적들을 통해 온전히 구현되었으며,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예수따르기’를 실천했던 사도 시대까지만 해도 교회 안에 충만히 살아 있었다.


교회의 로마제국화, 자선사업과 장애인복지의 잘못된 결합

그런데 교회가 선교시대로 접어들어 지중해 문화로 깊이 끌려들어가면서 입게 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그런 히브리적 영성도 쇠퇴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그리스 영육이원론이 교회의 정통 영성과 신학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면서 교회의 장애인복지는 어느덧 자선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되면서 신자로 대거 유입된 로마제국의 귀족이나 상류층들에 의해 자선이 나름대로 복음정신을 실천하는 신앙행위의 핵심요소로 여겨지면서, 장애인과 병자들이 자선의 주요 수혜대상자로 되었고, 자선사업과 장애인복지가 깊이 결합되는 잘못된 조우가 이루어진다.

자선의 기본 정신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영육이원론의 관점에서 볼 때 열등하게 여겨지는 육체와 지상의 삶에 별 가치와 의미를 둘 필요가 없으니, 자선과 같은 지원을 통해 최소조건의 생명 유지만 하다 ‘죽어 천당 간다’는 말 그대로 장애인과 병자들이 살아생전 겪은 육신 고통에 대한 보답으로 영혼만이라도 천국에서 영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가 모범을 보여주었던 장애인복지의 중추적 흐름이었던 당사자주의는 외면당하고, 자선하는 이들 스스로 천국가기 힘드니 그 대신 그들에게 자선함으로써 그 공로로 천국을 간다는 보상심리까지 여기에 보태어져 아예 장애인복지의 주체와 객체가 본말전도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둔 자선은 그 후 2천년 가까이 그리스도교의 장애인복지의 기본 패러다임으로 굳어져버렸다. 비록 ‘교회가 있는 곳에 복지사업이 함께 한다.’는 말이 있듯 교회가 그동안 장애인복지에 그 나름 기여한 바가 매우 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애당사자가 주체가 된 사업이나 활동이 아닌 그들을 오직 피동적 수혜자로 여기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따름이었다.

심지어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자선사업의 경우 그 폐단은 더욱 심하여 어느 측면 그것이 장애당사자보다는 오직 자선을 행하는 자의 심리적 위안거리로 여겨지거나 극단적으로 자선행위를 행하는 자의 자기과시 수단으로까지 전락하는 상태에 이르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이는 지난 2천년 동안 자선행위의 황금률로 여겨져 온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에도 위배되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위선행위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교회를 통해 숱한 자선운동이 펼쳐지고 자선단체 자선병원 등이 개설되었지만, 장애인복지 현실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질적으로는 초대교회에도 미치지 못한 채 이어져 왔었다. 애덕을 지닌 선의의 사람에게조차 장애인복지는 외딴 곳에 따로 모아놓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것으로만 여겨졌고, 오직 장애인은 자선의 시혜대상일 뿐이었다. 그렇게 2천년을 흘러왔다.

치유행위를 통하여 그들은 인간회복을 이루면서 구원의 길로 나아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기적은 전통에 비추어 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장애인과 병자들을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복귀시켜 통합시키려는 것이었으니, 그의 모든 노력은 오직 그들 장애당사자로 하여금 스스로 인간존엄성을 되찾아 일어설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것이었다. 사실 한 인간의 인간화는 그 사회공동체의 정상적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여 통합(integration)됨으로써, 인간적 삶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다.

예수가 전통적 관습과 달리 장애를 죄와 동일시하거나 그들을 단죄하지 않고 무조건 온전히 수용했던 것은 그분에게 장애인과 병자들이 사회적 억압체제가 낳은 구조악의 희생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그 당시 장애인을 비롯하여 숱한 밑바닥 인생들 이른바 죄인들을 옥죄는 사회적 구조악의 멍에들을 몸소 치워주고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안겨다주었다.

더우기 그분은 치유된 장애인과 병자들이 공동체 안으로 정상적으로 복귀하도록 그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그 길로 자상하고도 섬세하게 안내하였다. 야이로의 딸에게는 ‘먹을 것을 주라.’ 하였고(루카 8,55), 군대마귀에 들렸던 자에게는 옷을 입히고 가족들에게 돌아가게 하였고(마르 5,15~19), 중풍병자에게도 치유된 후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고(마르 2,11), 수종병자 역시 치유시키신 후 돌려보내고(루카 14,4), 벳자타 못 가의 장애인에게는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요한 5,14), 시청각장애인은 치유시켜 손을 잡아 일으키고(마르 9,27), 나자로에게는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였고, 나인 고을 과부의 죽은 외아들은 살려서 어머니에 돌려주고(루카 7,15), 바르티매오는 예수공동체의 제자로 받아들였고, 나병환자들은 사제들에게 보내 완치되었음을 확인시켰다(마르 1,44). 이러한 철저한 사후관리는 마치 사회복지에서의 책무성 실천으로까지 보인다.

그분이 장애인의 사회복귀를 치유과정에서 최우선 궁극과제(goal)로 삼은 것은, 현대 장애인복지에 와서 비로소 화두가 된 독립생활 패러다임을 이미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에 대한 절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그분의 치유행위를 통하여 그들은 주체적으로 인간회복을 이루면서 세상을 통해 구원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었다.

교회의 오도된 장애인복지는 예수의 장애인관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

지난 2천년 동안의 교회의 오도된 장애인복지 방식과 장애인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장애인관에 대한 교회구성원의 잘못된 해석과 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교회의 복지활동이 인류의 삶의 질 향상과 문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면서도, 동시에 장애인복지가 이제껏 시혜적 차원에 머무는데 부정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적 행태의 근본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런 측면은 현대에 와서도 변함없으며, 특히 그 어떤 국가보다 교회의 의해 주도되었던 현대 한국의 장애인복지 선진화 실현에 일정 부분 역기능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교회가 지난 2천년 가까이 자선사업을 주축으로 하여 장애인복지에 물심양면으로 쏟은 노력과 정성을 그분이 하신 바에 따라 올바른 방향으로 모을 수 있었더라면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주체적 독립생활 무엇보다 삶의 질 향상에 얼마만큼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측면이 없지 않는 것이다.

이제 장애당사자주의의 새로운 장애인복지 패러다임이 선진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자리 잡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교회의 시혜적 장애인복지 패러다임은 극복되어져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전적 영육일원론에 입각한 그 영성이 교회의 장애인복지에서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의 장애인복지 안에서 장애당사자의 주체의식이 되찾아져야 한다. 그를 통해 장애인의 독립생활과 사회통합, 무엇보다 참된 구원이 교회를 통해 온전히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의 날’이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 되는 현실

올해도 어김없이 장애인의 날은 왔다. 특히 올해는 장애인의 날이 제정 된지 30년인 특별한 해로, 사람으로 치면 서른 살은 생애주기로 봐 가장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펼치는 장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과연 그 연륜만큼 이 땅의 장애인복지 현실은 성숙되어져 있는가.

물론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비롯하여 관련 법과 제도들이 마련되어 이른바 사회적 인프라는 일정 수준 구축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실질적 내용을 살펴보면 미흡하기 짝이 없고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 대책들만 무성하다. 아직도 생존권 쟁취가 생사의 문제인 장애인들이 대다수이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 요구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빈들을 헤매고 있다.

그리하여 이날을 축하할 하루가 아니라 오히려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보내는 장애당사자들의 아픔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교회는 여기에 어떤 응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정중규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지체장애 1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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