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이슬람 세계의 민화모음집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노예소녀 셰헤라자드가 현인(賢人)이 낸 수수께기를 풀어냅니다.

현인: 칼보다도 날카로운 것은 무엇이며 독보다도 빠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삶 속에 숨어 있는 죽음은 무엇인가?

셰헤라자드: 칼보다도 날카로운 것은 혀이며 독보다도 빠른 것은 질투의 눈길이고 삶 속에 숨어 있는 죽음은 바로 가난입니다.

가난과 청빈의 차이는 무엇일까. 가난은 의지하여 삶을 펼쳐나갈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고, 청빈이란 의지적으로 가난한 삶을 지향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가난을 모방하며 조롱하는 청빈도 있어

대학에 다니던 무렵, 그분이 수녀원에 가기 전 조금 알고 지냈다는 이유로 어느 수녀님을 찾아갔다. 전화도 없이 불쑥 발길이 저절로 그 집에 닿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분을 떠올리고 그 곳에 갔지만, 그 집에 머무를 것 같던 하느님을 만나러 갔는지도 모르겠다. 수녀님과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말을 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디프레스 상태였는지 내가 그저 벙긋벙긋 웃고만 있어 좀 실성한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녀님과 밥을 먹고 수녀원 언덕배기를 넘어 돌아오는 길이었다. 수녀원 담장 너머에 사는 동네 아이들이 수녀원의 공터로 넘어 들어와 놀고 있었다. 지지배배 찌륵찌륵 꾸우꾸욱... 새들이 저마다의 목청으로 떠들어대는 것처럼 아이들은 놀이에 빠져 소리치며 까르르 웃어댔다. 수녀님은 아이들이 자주 수녀원으로 들어와 저렇게 놀며 소리쳐서 기도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 나와서 돌아가라고 소리치면 모두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또 저런다며 덧붙이시길, 왜 당당하게 여기서 놀고 싶다고 말은 못하고 몰래 숨어 들어오는지 모르겠다며 못마땅해 하셨다.

가공된 위인전 속의 영웅 캐릭터-워싱턴의 어린 시절과 이순신장군 및 오성과 한음을 그려낸 어린이판 위인전-가 현실의 남루한 아이들을 조롱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담장 안 수녀원의 붉은 벽돌집과 넓은 공터는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놀이터로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그 아이들은 아직 위인전 속의 담대한 행동을 읽을 여유를 지니지 못했을 게 분명할 만큼, 담장 밖 아이들의 처소는 허수룩해 보였다.

수녀님은 내 손을 꼭 잡고 언덕배기를 넘어 배웅해주시며 그저 무심코 얘기한 것뿐인데, 내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힘겨운 이야기들이 침묵하며 차갑게 식어갔다. 그래서 수녀님이 잡은 내 손을 슬쩍 뺐다. 가난한 아이들이 그들만의 체험의 축적 속에서 익혔을 숨고 기어들어가는 굴곡을 수녀님은 성가셔 하고 있구나 하는 거리감에 그만 그분의 손을 놓고 혼자 걸어 나왔다.

돌이켜보면 수녀님도 다양한 경험이 없으셔서 좀 무신경(?)한 것에 불과하고 아이들한테 시달리는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지쳐 있던 내게 수녀님들의 청빈한 생활은 가난을 모방하며 조롱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언제든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되어 있는 분들과 언제든 최소한의 삶도 박탈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궁지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예 생선장수에게 구어 달라고 하지 그러느냐

먼 친척 오빠와 잠시 같은 집에서 살던 시절이 있었다. 시장에서 막 생선을 토막 내어 손질을 해주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오빠가 시장에서 고등어 두 마리를 사오셨다. 그런데 손질이 되어 있지 않은 채였다. 나는 무심코 그거 손질해달라고 해서 가져오지 왜 그냥 들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빠는 불 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럴 바엔 아예 생선장수에게 구어 달라고 하지 그러느냐며, 나를 향해 돼먹지 않았다며 야단을 쳤다. 많이 섭섭했다. 뭘 잘못했다고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그 분이 살아오신 삶을 전해 듣고서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새끼 머슴으로 남의 집에 들어가 농사일을 배우고는 열다섯 살이 되면서는 어른 몫을 해내 정식 머슴의 새경을 받으며 일했다고 한다.

뒤늦게 장가를 들어 아이들을 낳고 잠시 잘 사는가 싶었는데, 간암에 걸려 투병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서울에 있는 우리집으로 오셨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빠는 큰 병원에는 아예 가질 않았다. 미리 치료비에 겁을 먹고, 벌어 모은 돈을 자신을 향해 축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죽으면 남은 자식들이 먹고 살 길이 없다며 큰 병원에 가보자는 친척 어른들의 말에 고개 한 번 갸웃하지 않았다. 다만 아는 사람이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버드나무 한의원에서 약 몇 첩 먹고 병을 고쳤다는 얘기만을 신뢰하며, 그 병원을 찾아가 한방치료를 조금 받고 약을 지어가지고는 시골로 내려갔다. 그 후 곧 오빠의 부음이 들려왔다.

그 오빠의 처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리석어 보였고 돈의 노예로 살다간 사람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머슴살이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삶을 꾸려온 입장에서 보면, 생선을 손질해 달라는 부탁은 떼를 쓰는 것이고 투정이며 사치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스타일 자체가 오빠의 인생을 모욕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시골로 내려가면서, 우리 엄마에게 오빠는 꿈속에서 죽은 아버지를 뵈었다며 숙모님을 마지막으로 뵙는 것이니 절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였음에도 자신의 죽음을 말하며 남은 처자식이 걱정이지 자신은 아버지가 데리러 온 것 같다며 편안해 하였다. 대신 오빠의 숙모인 우리 엄마만 돈이 너를 죽이는구나, 하시며 훌쩍훌쩍 우셨다.

남은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전문병원에 가기를 겁내던 그 오빠는 자신의 분수 안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배가 임산부처럼 부풀어 올라 한의원에 드나들면서도 택시 한 번 타지 않던 오빠였다. 어떠한 유산이나 부가가치도 모르던 분이었으니, 오로지 몸으로 벌어들인 알곡들을 처자식에게 남기고 떠나는 마음을 이해할 만 했다. 또 다른 가능성과 세상의 호의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오빠가 애처롭지만, 가난한 자가 가난한 길에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한 생을 올곧게 살아간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슬람의 민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가난이란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 말했듯, 생명을 가진 존재는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졌기에 가난을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데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쳐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걸 보면, 어쩌면 우리 사회는 경제에 병이 든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병이 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규원 2008-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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