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이규원, 이김규원, 규원...

근래 들어 페미니즘에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姓)에다 어머니의 성씨를 같이 기재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어머니를 존중하며, 여자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마음에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남아 있는 양반가의 에너지

나는 전주 이씨 동족촌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당숙이며 작은 할아버지인 관계 속에서 성장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대(代)까지 훈장을 하셨던 이유로 글방집이라 불리었는데 대단치는 않지만 양반가의 에너지가 나름대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집안에 명절마다 집안의 (남자)어른들이 모여 왈가왈부하는 논쟁꺼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읍내에서 미장원을 내고 미용사로 일하는 고모를 호적에서 파내자는 논의였다. 고운 외모에 늘 고대기로 머리를 매만져 시골 읍내에서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던 고모는 미용실 손님들을 대상으로 익힌 사교술까지 겸비하여, 조그만 읍내에서는 당시의 여배우들보다 높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연, 고모는 읍내의 명사들과 데이트를 즐겼고 고모의 이런 연애가 집안 어른들에게 수모(?)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문의 수치인 고모가 감히 전주(全州) 이씨(李氏) 명문가의 성씨(姓氏)를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가문의 체통도 살리자는 논지에서 호적제명처분 여부를 놓고 혼란이 일곤 했다.

7년 전, 어머니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친가와 외가의 호적등본을 모두 떼어 보았다. 만남과 헤어짐, 소속을 같이 한다는 결속감과 구속감이 서류 속에서도 진하게 배어나왔다. 문제의 고모님 역시 결혼하여 호적을 파간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친가, 외가의 할머니들은 이름도 없이 '담양전씨', '해주오씨'등, 가문의 성씨만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개인의 실체를 인정하는 이름은 애초에 지어지지도 않은 채, 가문을 나타내는 성(姓)과 조상(씨족)들의 거주지를 의미하는 본관(本貫)만이 할머니들의 소속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 분들은 열 다섯 정도의 어린 나이에 혼인을 하셨으니 '아가', '얘야', 등으로 불리다 결혼하여 친정집 지명을 받아 '청양댁', '고창댁'으로 불리었다. 그러니 따로 이름을 부를 기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이 할머니들이 성씨라도 가지게 된 과정에도 만만치 않은 역사의 거친 숨결이 담겨 있었다.

성씨, 어떻게 생겼나

성(姓)은 원래 석기시대 씨족공동체의 명칭에서 출발하였다. 그 후 청동기의 수입과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에 대한 정복전쟁이 활발하게 진행됨으로써 정복민과 피정복민 간에 복속 관계가 형성되자, 정복민과 피정복민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씨가 사용되었다.

그 후 계급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 차별이 생겨나면서, 다시 계급 분화가 진행되어 소수의 상층 계급은 다시 자신들을 다른 부류들과 구분할 고유의 성(姓)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고유의 성은 중국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한자화된 성(姓) 혹은 한자를 빌려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특권을 표시하는 혈족 집단 명칭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성은 원시적 씨족제의 분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된 계급 관계에서 그 특권을 표시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성의 사용하는 층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한편 이와 반대로 중죄인 또는 반역한 무리에게서 성을 박탈하기도 했다.
성씨의 정치학

갑오경장 이전에는 백성들의 30%만이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천시 당하던 직업에 종사하는 무당이나 백정, 노비들은 개똥이, 돌쇠, 삼돌이, 마당쇠 등으로 불리다, 조선후기에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이들이 양반의 족보를 사서 성씨를 취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1909년 일제의 민적법 시행으로 성(姓)이 없던 천민이나 노비들에게 그들이 신청하는 대로 유명한 성씨나 양반의 성씨를 주어 호적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는 양반성씨들이 성씨별로 단합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이렇게 성씨를 주어 노비를 양민(良民)으로 만들면 세금을 징수할 대상이 늘어나 식민통치의 효율성이 증대하였다고 한다.(姓氏의 기원 中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성씨가 사실은 (씨족)공동체의, 나아가 국가권력의 요구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씨는 어느 공동체가 그 사회 속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획득하는 가문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는 시가 말해주듯, 이름이란 한 개인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되어가면서 획득하는 명칭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할머니들이 한 번도 이름으로 불려보지 못하고 한 세상을 살아가신 건, 그 분들이 속한 가족사회 안에서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인 것이다.

성씨를 버린 아나키스트

그런데 청말민국초(淸末民國初)의 중국사를 읽다, 그즈음 중국의 아나키스트 사회에서는 집안의 성씨(姓氏)를 버리고 이름만 쓰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스푸(師復)의 본명은 류샤오빈(劉少賓?)이었다. 그런 그가 만주족인 청나라를 향한 배만(背滿) 혁명운동을 시작하면서 류쓰푸(劉思復)로 개명하였다. 그러다 아나키즘을 수용한 후, 가족주의와 종족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꿔 스푸(師復)가 되었다.

스푸는 청나라 말기의 전제군주제와 봉건문화를 비판하면서 “중국의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 일종의 암흑의 감옥일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가족제도의 폐지를 위해 혼인혁명과 족성혁명을 주장했다. “가족의 기원은 혼인에 있으며 가족의 경계는 족성에 있다. 따라서 혼인을 폐지하면 가족제도의 근원을 끊을 수 있고 족성을 폐지하면 가족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표리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그가 1912년 심사(心社)라는 도덕계몽단체를 만들며 12가지 규약을 세우는데 그 중에, ‘족성(族姓)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다.

가정의 억압을 없애려면 성씨를 버려라: 아나키스트

러시아 사상가 크로포트킨(1842~1921)의 사회이론 아나키즘(Anarchism) 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으로 'an은 없다'는 뜻이고 'archie는 우두머리, 강제권, 편제'를 뜻하는 것으로 강제권력을 배격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잘못된 번역으로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로 불리며 혼돈과 착취의 상황에 빗대여 무정부주의라고 부정적으로 쓰이곤 하는데 이는 정작 아나키즘이 개혁하고자 하는 세계였다.

아나키스트 스푸는 착취와 차별의 기초구조로 작용하는 가정의 억압을 없애기 위해 족성(族姓)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가정의 확대개념인 민족주의 세력이 권력집단화하는 걸 보며 철저한 아나키즘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조세현 著,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중에서)

그리고 1907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중국인들 사이에서 발간하는 아나키즘 잡지 <천의(天義)>의 대표 논객 하은진(何殷震)도 처음에는 부모의 성을 모두 사용하여 하은진(何殷震)이라 쓰다가, 나중에는 부모의 성씨를 모두 폐지하고 진(震)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

새로운 가정의 형태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 구성원이 아닌 저마다 외따로 존재하던 이들이 뭉쳐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가 하면 여러 가정이 결합하여 하나의 가정을 만들기도 한다. 비혼의 가정도 점점 늘어가는추세이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이 붕괴되어 가는 걸 말해주는 것이며, 한편 가정의 포근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정의 품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든 따스한 가정에 대한 집착은 어쩔 수 없이 가정 너머의 거친 영역에 울타리를 치는 어두운 그림자를 품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고자, 아나키스트들은 상징적으로 성씨(姓氏)를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한 가정의 형제애로 묶어 평등한 세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왜 혼인을 해서 가정을 이루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왜 혼인을 해서 가정을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남편으로 예수님을 기억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떤 훼손이 생기는 걸까...?’ 어떻든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족보는 예수님 대(代)에서 끊긴다. 붉으죽죽한 적신(赤身)의 몸으로 오셔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가정 안에서 성장하셨건만... . 혹여,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이 바라는 세계의 원형을 예수님의 생애에서 읽어낸 건 아닐까, 하는 묵상을 해본다.

로마대제국이 망해가는 시기는 로마의 경계 곳곳에 다가오는 적들과 로마를 벗어나려는 제국민들을 가로막는 성곽을 쌓던 시기와 맞물린다고 한다. 자신을 펼쳐 열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순간 방어의 기제로 바뀌는 경계가 바로 성장이 멈춰지는 임계점인지 모르겠다. 가정을 지켜내는 비법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다른 가정과의 경계에 예민해지며 울타리를 공고히 하는 것보다 소통과 펼침 속에 그 생명력은 넓고 깊게 자리잡게 될 것이라 믿는다.

가문과 가정이 붕괴되어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지나치게 자신이 속한 가문과 가정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그 의미에 사로잡혀 포근함을 상실하는 가정도 많아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절대적일 것 같던 성씨(姓氏)의 선택과 표현방법이 다양해지고 있다.

이규원, 이김규원, 규원... '규원'이라고 이름만으로 나를 불러보니 일가를 이룬 분들을 흉내내는 것 같아 어색했다. 만약 지금 내 스스로 성씨를 버린다면 전주 이씨 집안어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예전 고모님의 연애사건보다 더 큰 사건으로 호적제명처분 논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성씨가 붙지 않은 이름이 내게도 아직은 겉옷을 걸치지 않은 것처럼 허전하고 정다운 가족을 잃어버리는 것 같이 서늘해지는 일이다.

/이규원 2008-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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