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사랑이란 무얼까.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수많은 아포리즘을 토해냈지만 공자님 말씀으로 기억하는 애이인욕생지야(愛而人欲生之也)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이라고 옮겨 볼 수 있다. '사랑', '사람'이 '살다'라는 어원에서 파생한 어휘라는 걸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런 연유에 기대여 새겨보면 더욱 공자님의 풀이가 가슴에 새겨진다.

때로 사랑이 애증으로

주변에서 어렵게 소설처럼 사랑을 이룬 이들이 그 사랑(?)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종종 본다. 이름만 들어도 따뜻하던 사람을 향해 미움이 스며들고 어느 새 사랑은 애증으로 바뀌어 간다.

J는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는 남편을 지키면서 죽음을 통해서만 부부의 인연을 끝낼 수 있음에 깊은 회한이 몰아쳤다. 기계의 도움을 받으며 회복을 꿈꾸는 남편에게 그녀는 아내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어떻든 아내인 그녀는 중환자실 앞에서 새우잠을 자며 환자를 지켰다. 아침 회진을 끝내고 담당의사가 남편의 바이탈 싸인을 얘기하며 회복의 기미를 말해주면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구렁에 빠진 듯 절망스러웠다.
'혹시라도 남편이 죽지 않으면 어떡하지...?'

다시 남편과 살아갈 생각을 하면 차라리 자신이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 심정을 터놓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날마다 환자의 상태는 변해 모든 싸인이 죽음으로 방향을 바꿔버리면 J의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도대체 이렇게 몰아치는 증오의 감정은 어디서 시작되어 덩치를 키웠을까. 인간관계 특히 부부 사이에 틈이 생기며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면 뭐라 말하기 어려운 아픔을 느낀다. 에베레스트 산을 허물어 부어본들 그 틈이 메꿔질까 싶다.

결혼생활 중 J는 남편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얘기한 적은 없었다. J가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으며 그녀는 남편을 집에서 내보냈다. 동네 여관에 머물며 남편은 밤마다 전화를 걸어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사랑을 고백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만 더 자신에게 사랑이니 어쩌니 했다간 입을 찢어버리겠다며 전화를 끊곤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고 그녀도 말하지 않았다. 커다란 균열을 일으킬 사건이 있었는지 그저 서서히 사랑이 소멸해간 것인지 알 수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의식주'라는 말로 정리하지만 그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 세상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긍정의 힘은 외부에서 받아들인 혹은 내재적인 사랑이 한 사람 안에서 발효한 에너지일 것이다. 성장과정 중 애정의 결핍은 영양결핍 만큼이나 그 사람의 인격과 신체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던가.

마음이 먼저 취한 사랑의 아픔

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여의도를 지나다 우연히 친구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이미 내 친구는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후라서 나는 그 아저씨를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누기가 편치 않았다. 그런데 아저씨는 퇴근 후에 칵테일이나 한 잔 하자고 제의했다. 친구와 셋이서 만나 영화도 보고 밥도 먹던 사이라, 저녁에 우리는 시청 근처 어느 술집에서 만났다. 미리 와 있던 아저씨는 그 당시 여자들에게 인기였던 청하를 여러 병째 마시고 있었다. 떠나간 여자친구를 꼬맹이라 부르며 지난 시절 그들이 데이트 하며 걸었던 거리와 같이 보았던 영화들을 되살리며 피식피식 웃더니 아저씨는 친구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투데이 화이트 브로썸 스윗 드~림 멜로디... 어느 날 학교 뒷산에서 친구가 이 노래를 가르쳐주던 게 떠올라 나는 술기운을 핑계대며 코를 휑 풀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탈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아저씨는 갑자기 취기를 드러내며 지하철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당혹감에 잡아 흔들며 좌석으로 앉히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의 가방을 머리에 베어 주고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한 바퀴 순환하고서야 정신을 차린 아저씨와 지하철 모퉁이에서 종이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아저씨는 웃으며 청하가 고약한 술이라며 취기가 갑자기 치솟아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사람의 마음이 먼저 취하지 않고서야, 술이 저 혼자 취해서 사람을 지하철 바닥에 드러눕힐 수 있을까... .'

알콩달콩 정다운 사랑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을 기억하면 사랑의 아픔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랑이 삶에 닿는 것이라면 상실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요한복음서를 읽으면서 주변에서 경험한 사랑의 아픔과 상실이 일으키던 무수한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상상력이 가 닿지 못하는 영역에 사랑은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 달콤함과 아름다움이 그렇고 그 아픔과 쓰라림이 그러했다. 사랑은 공자님의 아포리즘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이기에 그 상실감은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사랑은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키워드이다. 그러기에 사랑이신 하느님은 인간의 정신으로 그 개념을 규정하지 못하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제 머리 속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규정한 하느님은 어쩌면 사람의 크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분이기에 오히려 사람이 하느님을 구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지 사람이 사랑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

어느 덧 세상일에 시들해진 나는 사랑이 애증으로 추락하는 걸 막아내지 못한 채, 사람을 향해 앞뒤가 다른 말과 얼굴을 보이곤 한다. ... 하느님 말씀은 내 발의 등불, 나른하고 이기적인 하루의 처음과 끝에 등불을 켜두며 살고 싶다는 마음을 복돋운다.

 

/이규원 2008-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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