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 칼럼]

비가 조금 올 거라는 예보는 완전히 빗나갔다. 낮의 길이가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지난 3월22일 월요일 오후, 나는 시흥 늠내숲길을 걷고 있었다. 점심 때가 되자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점점 제법 굵은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꺼내 쓰고 가까운 절(진관사)을 찾아 걸음을 서둘렀다. 절 처마 밑이라도 얻어볼까 해서였다. 때마침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스님. 사정을 이야기하니 요 뒤로 돌아가서 공양간에 알아보라며 아직 밥이 있나 모르겠단다. 스님 인상이 부드럽다.

밥은 내 배낭 속에도 있다. 이미 점심 공양이 지난 시간, 미닫이 유리문으로 들여다보이는 컴컴한 마루방엔 앉은뱅이 식탁이 길게 놓여 있고 사람은 없었다. 늙수그레한 보살 한 분이 얼굴을 내민다. 들어오란다. 저기 식혜가 있으니 떠다 먹으란다. 예상치 못한 호강이다. 우리 성당도 이럴까? 생면부지인 사람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이렇게 맞아들일까?

도시락을 펴놓고 작은 팩소주를 뜯어 한잔 따랐다. 유리문 밖의 비가 서서히 진눈개비로 변하더니 소주를 홀짝이는 동안 진눈개비는 어느새 탐스런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아, 이럴 수가! 영화에서나 본 폭탄 같은 눈송이들이 삽시간에 마당과 나무와 온 산을 하얗게 덮었다. 사방은 적막강산이다. 비가 오면 빗소리가 가슴을 두드리는데 눈이 오면 눈소리는 어디로 간 걸까. 몰아의 경지가 이런 것일 게다. 아무 말도, 소리도 낼 수가 없다. 무슨 소리라도 내면 이 거대한 침묵이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아서다. 갑작스레 펼쳐진 이 별천지에서 나는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 눈은 그칠 줄 몰랐다. 집에 돌아갈 걱정이 끼어들 구석이 없다.

천주교회의 주교들이 춘계주교회의를 마치면서 입을 모아 한 목소리로 이명박정부의 4대강사업을 질타하고 나섰다. 예전에 보지 못하던 매우 이례적인 처사다. 여권 수뇌부의 반응이 신문에 실렸다. 천주교를 상대로 미리 홍보하고 설득하지 못 했다는 지적에 “천주교는 반대하려고 작정하고 나선 사람들이니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들이 오갔다고 한다. 이른바 당,정,청 지휘부의 인식이 이 정도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교회의는 우리 같은 평사제나 평신도들의 공식, 또는 비공식 단체가 아니다. 명실 공히 한국천주교회의 최고지휘부다. 만만히 볼 게 아니다. 만일에 이 정부가 주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4대강사업을 전면 수정한다면 대통령의 체면 손상은 말할 것도 없을 터다. 반대로 정부의 설득이나 압력에 주교들이 슬그머니 주저앉는다면 지금까지 천주교회가 국민들에게 준 신선하고 정의로운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상실되고 말 것이다. 과연 사태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아무래도 대통령이 주교들에게 머리를 숙일 것 같지는 않은데....

여당 대표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만나서 강남의 최대사찰 봉은사의 주지 명진 스님이 좌편향이니 그대로 둘 수 있겠냐는 이야기를 했단다. 이건 또 무슨 소리? 이명박정권이 좌충우돌이다. 한나라당 대표가 드디어 불교계의 인사권자로 나선 모양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교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겠다고 생각한 걸까?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한낱 이 정권의 하수인인가? 도대체 안상수와 자승은 어떤 관계인가? 명진 스님은 몰론, 봉은사 신도들과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불자라면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일이 아니다. 어찌 될 것인가. 명진은 쫓겨나고 봉은사는 총무원 직할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두 수장이 이실직고하고 사죄할 것인가? 이 또한 초미의 관심사다.

춘분에 엄청난 눈이 내려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을 이뤘다. 그러나 겨우 하루가 지난 다음 날엔 언제 눈이 왔던가 싶게 흔적도 없었다. 이미 산수유나무에 망울을 틔운 봄이 세상이 눈에 덮여 얼어붙도록 그냥 놔두지 않았다. 춘분이 지났으니.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고강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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