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

“우리는 이 시대 한국인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로 살아간다.” 2004년 1월, 설립 10주년을 앞둔 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워크숍에서 처음 만들었던 우리신학연구소 사명선언문이다.

인천교구 시노드(1997년~2000년) 준비과정에서 본당진단프로그램을 개발한 뒤, 우리는 교구·본당·교회기관의 조직진단과 중장기계획 수립을 도우면서 가장 먼저 비전 공유를 위해 사명선언문을 만들라고 주문해왔다. 우리 도움으로 만든 사명선언문 가운데 그 작성 과정과 활용에서 가장 모범은 2003년에 만든 안동교구 사명선언문이다.

“기쁘고 떳떳하게!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이처럼 남들에게는 비전 공유가 중요하다, 그래서 사명선언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우리는 10주년을 맞으면서야 비로소 사명선언문을 만들었다. 말한 대로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가족도 사명선언문을 만들면 좋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가족의 사명선언문도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5년 뒤인 2009년부터 우리신학연구소 사명선언문을 바꾸었다. “우리는 스승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가고 지금 여기 우리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낸다.” 사명선언문이 조직의 존재 이유와 이루고자 하는 꿈을 표현하는 것이니, 끊임없는 시대 읽기와 자기 성찰을 통해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 세계화, 다문화 상황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낡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바꾸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앞뒤 문장을 바꾼 것이다. ‘스승 예수의 가르침대로 공동체를 살아가는 것’(신앙실천)을 ‘지금 여기 우리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내는 것’(신학화)보다 앞세웠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4년 우리신학연구소를 설립할 때만 해도 가톨릭청년학생운동을 포함해 천주교사회운동이 활발한 편이어서, 우리신학연구소는 천주교사회운동의 신앙실천을 성찰하고 신학화하는 일에 힘을 쏟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천주교사회운동은 물론 자발적 평신도신앙실천운동 전반이 침체된 상황에서는 평신도의 신앙실천을 불러일으키는 일에도 연구소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 인식의 변화에 따라 앞 뒤 문장을 바꾸어 강조점을 달리한 것일 뿐, 사실 신앙실천과 신학화는 전후 관계나 인과 관계가 아니다. 동시에 일어나야 할 일이고, 동시에 일어나야 제대로 된 신앙실천, 제대로 된 신학화가 모두 가능하다.

내 생각에 우리신학연구소 사명선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금 여기 우리의 하느님 체험’이다. 과연 하느님 체험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하는가? 최근 공부모임에서 읽은 서공석 신부의 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 상태로 실존하시고 그렇게 체험되는 분이다. 하느님은 우리 인식이나 체험의 직접 대상이 아니다.”(<새로워져야 합니다>, 113쪽) 곧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 상태가 아니고서는 체험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서 신부는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변하는 장’이고 ‘베푸심의 장’이라고 한다. 최근 세례 받은 지 1년 남짓 지난 분의 신앙 체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사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렸고 따뜻함을 느꼈고 그 뒤로는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 분이 체험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베푸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15년 남짓 내가 관심 가진 신학 영역은 사목신학이었다. 교회 쇄신을 위해서는 새로운 사목 모델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제안을 진지하게 하기도 하였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열매가 거의 없다. 함께 하면서 공들였던 몇몇 교구 시노드도 결정사항이 실천되지 않고 있고, 좋은 본당 일구기 차원에서 세운 중장기계획은 주임사제가 바뀌면 죽은 계획이 되었다. 물론 우리 실력과 노력 부족 탓도 있지만, 교회 변화를 조금이라도 이끌어낸다는 일이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자꾸 되지도 않는 일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다. 결국 확실히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스승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 실천 현장이 교회 안이든 밖이든 상관없는데, 교회 안에서 제도화되거나 변질되지 않고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우리신학연구소는 교회 쇄신을 위한 사목 모델 개발과 적용에 매달리면서 하느님 체험의 현장으로부터 멀어졌다. 현재 우리신학연구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신학연구소는 새 길 찾기에 나섰다. 시대 읽기와 자기 성찰을 통해 우리 사명을 다시 정립할 것이다. 새로 정립된 사명에 따라 ‘신학연구소’라는 조직 형식을 버리고 평신도신앙실천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그 첫 걸음으로 지난 3월 17일 워크숍을 가졌는데, 이 자리를 통해 확인된 화두는 우리가 만나고 함께 할 ‘우리’가 ‘어떤 평신도’인가 하는 점이다. 내 생각에는 교회의 경계에 서 있는 평신도이다. 교회를 졸업했으나(물리학자 장회익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곧 교회에서 머물라고 강요하는 신앙 방식과 수준을 넘어섰으나,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더 나은 신앙실천을 모색하는 평신도를 만나야 한다.

이들 안에서 이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이를 쉽고 분명하고 구수한 신앙언어로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신앙운동(신앙실천)과 신학운동(신학화)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신학연구소가 지금 벌이고 있는 다양한 방식의 교육 프로그램, 공부모임(“교회와 사목”, “복음과 대안사회운동”)은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자리이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줄수록 더 풍요로운 실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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