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에피소드 하나: 어른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 요즈음 학습지의 모태라고 볼 수 있는 '일일공부', '장학교실' 등의 이름이 붙은 학습지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주로 야간학교에 적을 둔 남학생들이 낮 동안 전날의 채점을 마친 시험지와 그날의 시험지를 겹쳐 배포했고 나는 그들이 걷어온 시험지를 사무실에서 채점하는 일을 맡았다.

아르바이트라는 말도 생기기 전이어서 시간당 페이가 아니라 월급으로 계산해주었는데 비교적 보수가 좋은 일터였다. 고등학교 입학금을 마련하느라 차곡차곡 저금을 해서 거금 5만원을 모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같은 집에 세 들어 사는 젊은 새댁이 우리 방으로 들어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착실히 일 다니던 것 같으니 모은 것이 있지 않겠느냐며 어린(열다섯 살이었다) 내게 자기 남편이 누군가의 누명을 쓰고 감방에 있다는 하소연을 하며 간곡히 사정을 해왔다. 선뜻 5만원을 내주었다. 무슨 각서를 생각할 나이도 아니었고 돈거래를 해본 적도 없어 어른이 말을 했으니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

그 돈으로 젊은 새댁은 집근처 공장 앞에 포장마차를 차려 떡볶기와 만두 등 공장 사람들의 간식거리를 주로 팔았다. 점심시간마다 사람이 가득 모여들었으니 장사는 잘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곧 돌려준다던 돈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돈을 빌려가던 날 찌개를 끓여다 주며 학생이 자취하느라 제대로 먹질 못하니 안쓰럽다던 인정스러움은 꿈속의 일인 양, 그 새댁은 나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린 탓도 있고, 좀 무신경한 면이 있던 나는 돈이 마련되면 갚겠지 하며 지냈다. 그러다 연합고사를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금을 준비하며 그분을 찾아가 빌려간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랄까, 젊은 새댁은 돈을 빌린 일이 없다며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일체 말이 없었다.

나는 망연히 서서 그녀가 떢볶기에 고추장을 더 풀거나 홍합국물을 국자로 마시는 걸 머릿속에 담으며 지켜보다 돌아왔던 것 같다. 후에 그녀의 남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돈을 대신 갚아줄 것을 요구했더니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가버렸다.

유야무야 돈도 받지 못하고 가슴에 깊은 불신의 구렁만 패인 채 그 분과의 인연은 멀어져갔다. 하나의 경험으로 인격이 고정되는 건 아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 어른들 도움을 청해서라도 돈을 받아 내거나 그분의 사과를 들을 걸 하는 후회를 했다. 돈을 받아내지 못한 게 성품이 너그럽거나 여유가 생겨서가 아니라 앞뒤가 전혀 다른, 사람의 낯선 표정에 대응하지 못한 탓이기에 안으로 분노가 쌓였다.

이제 당시의 새댁보다 더 나이 들어 뒤돌아보니,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살 길을 찾아 벼라별 궁리를 다했을 걸 생각하니 딱한 마음도 든다. 새댁으로 불리었으니 나이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라는 사람도 과히 미덥지 않았고. 그녀와 나 사이에 좀 더 부드러운 해결법은 없었을까... 그녀가 품었을 죄책감과 내가 그녀를 향해 내뿜은 부정적인 에너지 - 그녀가 잘못되길 빌었다 - 는 그녀와 나의 삶을 많이 파괴했을 텐데 말이다.

에피소드 둘: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눈길

우리 동네 구역장님은 나이가 쉰아홉인데 스물둘에 결혼해서 스물다섯에 남편을 잃고 두 자녀를 기르며 살아오셨다. 순간순간 자신이 결혼을 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는 말씀을 하신다.

따님은 결혼하여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어린 손녀와 통화라도 하는 날이면 활짝 핀 과일나무의 꽃처럼 온 몸의 세포가 다 웃음을 품어 옆에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에 아드님은 젊은 나이에 병원신세를 지다 지금은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지낸다. 그래서 회사에 원서를 넣기라도 하면 신원조회에 '장애' 판정이 걸림돌로 작용해 취직이 어렵다. 늘 허드렛일이나 하니 안정적이지 못해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런 아픔이 구역장님의 온몸을 마비시켜 굳어 있을 때도 많으시다.

엊그제, 구역장님은 갑자기 남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사자며 오셨다. 전에 없던 일이라 의아해서 물어보니, 그날이 남편의 기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기일마다 음식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올해는 그러고 싶지 않다며 그 돈으로 옷을 사 입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무슨 염치로 제삿밥을 먹으러 왔는지 모르겠다며 쓸쓸해 하셨다.

기일을 맞은 구역장님의 남편은 귀여운 외모를 지닌 구역장님을 혼자 짝사랑하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옛날 남자들의 해결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구역장님은 처녀로서 아기를 임신하고 구로공단에서 가리봉동으로 많이 울며 헤매었다고 한다. 그러다 하느님의 뜻이 생명을 죽이는 건 아닐 것 같아 낳기로 결정하고, 아기아빠 역할만 잘해주길 바라며 예식도 없이 남편과 살았다. 그런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어 구역장님은 웨딩드레스도 입어 보지 못한 채 미망인이 되었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원치 않는 남자와 정신없이 2-3년 결혼생활을 하다 남편과 사별한 것이다. 잠시 동안의 신혼생활을 끝으로 구역장님은 혼자 두 아이를 기르느라 공장에 다니다 식당으로 옮겨가며 지금까지 밥 짓는 일을 하신다.

몇 해 전, 삼십대의 아들이 뇌출혈로 쓰러지자 구역장님은 어미가 처녀로 임신하여 고뇌와 절망으로 보낸 시간들이 태교에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며, 그런 불안정이 아기의 몸속에 머물다 결국은 뇌출혈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셨다. 의학적인 원인을 떠나 연약한 어머니로서 태아를 소중히 아끼지 못한 자책감 탓일 것이다.

이제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어렵지만 아드님이 운전도 하고 돌아다니니 그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하지만, 종종 회한에 잠겨 오전에는 자학으로 보내다 오후로 들어서 겨우 마음을 추스르든지, 그 반대로 오전에 좋게 지내면 오후는 죽은 남편을 원망하는 걸 일삼으신다.

바라던 여자를 아내로 얻어 잠시 동안이지만 남편은 마음을 다해 아내를 사랑한 듯하다. 그런 기억의 힘으로 구역장님은 30여 년 홀로 사시며 자녀들을 길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구역장님의 무의식 속에 자신의 의지를 넘어선 결혼에 대해 아직도 저항감이 남아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아이들과 낮은 곳에 처한 여성들을 위해 더 많이 발언해야...

어른들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남자들이 여자를 향한 눈길에는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면이 많아 보인다. 힘의 불균형을 이용해서 사리에 어긋난 일들을 저지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마지막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들이 군중의 외침을 막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예수님은 저들이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루카 19장 40절). 옛날에 어머니는 억울한 일을 보면, 벙어리라도 말을 하겠네 하는 말씀을 덧붙이곤 하셨다.

이제는 아이들과 여성의 인권이 많이 신장된 듯 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구석이 너무 많다. 또한 전문직 여성들과 일반여성들 간에 깊은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하느님의 말씀(히브리서 4장 12절)은 양쪽에 날이 선 칼보다 날카로워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꿰뚫는다고 한다. 그 자녀들인 인간의 말에도 고조된 에너지가 담겨 있다.

돌들이 소리치고 벙어리가 말을 해야 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지지 않도록 자기방어력이 없는 아이들과 낮은 곳에 처한 여성들을 위해 더 많이 발언하고 강한 액션을 취해야 한다.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 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요금)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 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팔원(八院) - 서행 시초(西行詩抄), 백석의 詩 (조선일보 1939년)

/이규원 2008-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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