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회]

▲ 워싱턴D.C. 성모영보 성당에서 미사 참례자들이 성체를 영하고 있다.(Dreamstime)
한 구절 안에서 같이 언급하는 낱말로 “전례”와 “전쟁”보다 더 부조화스러운 단어 조합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어권 국가에서는 널리 쓰이는 말로,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전 세계 주교들의 연이은 회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공동체에서 줄곧 이어져 오던 논쟁이다.

최근 미사 중 바치는 기도의 번역문과 관련해 새로운 결정이 내려지고, 교황청 관계자들이 “개혁의 개혁”을 공공연하게 촉구하며 라틴어를 부활시키려는 교회 내 열성집단들과 의미심장한 교섭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전례 전쟁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인가?

아마 전례 전쟁만큼 교회 안에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고, 또 깊은 분열을 일으켰던 주제는 없을 것이다.

예배의 중심 행위인 전례는 신앙 공동체의 유전자 정보를 구체화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결정하는 열쇠이며, 나아가 인간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행위에 대해, 삼위일체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우리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 대해, 지역공동체와 더 넓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결정하는 열쇠이다. 이처럼 전례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상당히 많은 것들이 좌우된다.

역사가이자 예수회 신부인 존 오맬리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이하 전례헌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례는 “우리가 하는 일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례 개혁의 의미를 거꾸로 뒤바꾸려는 최근의 시도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보면서, NCR과의 전화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85년, 주교시노드는 다른 모든 문서들을 해석할 때 기준이 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가지 헌장들(사목헌장, 계시헌장, 교회헌장, 전례헌장)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중 하나를 손보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나머지 전부를 손대는 것입니다."

전례 논쟁의 추이는 또한 교황 요한 23세가 맨 처음 공의회의 개념들을 제안한 지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리고 공의회가 끝난 뒤 45년이 흐르는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싼, 역시 길고도 분열적인 갈등 안에서 어떤 관점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약 40년간 전례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어왔는가 하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 과정은 분명히 파악하기 어려운 "공의회의 정신(spirit of the council)"을 둘러싸고 어느 쪽의 해석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볼 때 최근 전례가 바뀌어온 방식을 보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들에 분명히 나타난 주교 단체성(collegiality)과 대화라는 주제가 확산되어 교회 운영양식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들이 그동안 오래도록 수세에 있었으며, 이제는 거의 총퇴각을 해버린 듯한 생각이 든다.

전례 전쟁을 둘러싼 논의들은 주로 정밀한 지적․신학적 용어로 이루어지지만, 이는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교회정치학이다. 또한 전쟁의 전열이 비단 자유주의-보수주의, 혹은 개혁 찬-반 세력이라는 구분에 따라서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체적으로는 이 구분이 틀리지 않지만, 현대 전례운동의 초기 주요 인물들 중 하나였던 이도 개혁이 실행된 이후 30년 뒤, 애초부터 개혁을 반대했던 이들이 오늘날 제기하는 것과 똑같은 비판을 한 적 있다.

전례가 논조를 정한다

1963년 11월 22일, 한자리에 모인 세계 주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문서, 즉 <전례헌장>이라는 혁신적인 문서를 인준했을 때, 공의회 나머지 회기들의 논조와 방향은 결정적되었다. 그 문서로 현대 세계가 알던 교회가 영원히 변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개혁의 개혁"이 시행되고 있다 해도, 공의회 결과 발생한 일들은 역사 안에 여러모로 기록되어 있다.

․ 제대의 방향이 뒤바뀌어 사제가 신자들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 성체 배령대가 없어졌다.
․ 성체를 무릎 꿇지 않고 서서 영하게 되었다.
․ 라틴어가 각 나라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대체되었다.
․ 전례가 성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긴밀한 연결을 갖게 되었다. 특히 사회정의 이슈에 관련하여 더욱 그렇게 되었다.
․ 더욱 심오한 변화로, 미사 중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공경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깊이 자리 잡았으며,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수직적인 것에서 수평적인 것으로 더욱 그 강조점이 이동하였다.
․ 아마도 평신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변화로 다가온 것은 성찬전례에서 평신도들이 단순히 수동적인 참관자에서 벗어나 공동 참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네소타 주 컬리지빌 성 요한 수도원의 고(故) 고트프리 디크만 베네딕토회 신부가 말했듯이 "그것은 평신도들의 마그나카르타였다."(그는 전례헌장 작성에 참여한 세계 전례학자 55명 가운데 하나다)

▲ 2008년 8월, 시카고의 성명(聖名)성당에서 미사가 끝난 뒤 복사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CNS/Catholic New World/Karen Callway)
전 세계의 주교들과 교황이 전례 개혁을 승인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들이 모두 정해졌던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의 엄숙한 선언이었던 전례헌장은 또한 정치적 문서이기도 했다.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비단 신자들이 어떤 기도문을 외우게 될 것인지, 언제 서고 언제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전례 중 사제가 어떤 동작을 취하게 되는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훨씬 더 깊은 함축은 교회론, 즉 우리가 어떤 종류의 교회가 될 것인가 하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1963년, 당시 신부이던 조셉 라칭거가 보기에 새로이 선언된 문서로 무엇이 타격을 받을지는 분명했다. 라칭거는 일견 긍정적인 어조로, "전례적 의사결정의 권력 분산"이라고 썼다.

그는 "전례헌장의 첫 장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근본적 혁신을 상징하는 진술을 담고 있다"고 썼는데, 그 혁신이란 각 나라 주교회의에 독립적 권한이 새로이 부여된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교회의에 최초로 그들만의 교회법적 권한을 부여한 이 짧은 문단은, 주교들의 오랜 바람이었던 주교 권력 강화에 관련해 교회헌장 안의 그 어떤 조항보다도 중요성이 크다." 훗날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 당시 라칭거 신부의 말이다. 이는 즉 교회 권위의 분산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이었다. (계속)

번역/황근하

[National Catholic Reporter 2010.3.1.  탐 로버츠 (NCR 기자, troberts@ncronlin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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