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규 칼럼] -구원은 비축문화 극복으로

동서고금의 여느 문화보다도 현대는 구조적으로 탐욕에서 비롯된 비축문화(備蓄文化)로 되어 있다. 맹목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절제를 모르는 축적(蓄積)에 대한 과도한 편집적 행위. 그것이 경제발전주의로, 군사력 경쟁으로, 신세계 환상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그 비축문화에서 집단이기주의와 빈익빈부익부, 심지어 끝 간 데를 모르는 퇴폐향락주의 등 현대사회의 모든 병폐가 비롯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축적된 경제적 부(富)는 계급사회보다 더한 인격적 단절을 계층간에 안겨다 주고 있다. 진실로 부유한 자가 피리를 불지라도 가난한 자는 도대체 왜 피리를 부는지 알 수 없어 춤출 수가 없는, 또는 가난한 자가 곡(哭)을 할지라도 부유한 자는 도대체 왜 곡을 하는지 알 수 없기에 같이 울 수가 없는, 전혀 상호이해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실 한 사회의 비인간화는 우선 계층·세대·지역간에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이며, 인간화된 사회란 상호간에 언어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공동체다. 빈익빈부익부의 ‘20대80의 양극화 사회’에선 이런 단절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일용한 양식만을 지니는 비(非)축적 사회를 꿈꾸며

비축문화의 늪에 빠져있는 현대사회를 구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만나의 정신’이다. 그 옛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광야에서 허기져 있을 때 하늘로부터 매일 매일 필요한 만큼씩 내려와 그야말로 일용한 양식이 되었던 ‘만나’. “오늘 먹을 것은 오늘 벌어서 오늘 먹는다.”는 정신으로 불요불급한 비축을 방지하면서, 이 땅에 ‘부패한 어제의 만나’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능력대로 만나를 줍되 필요 이상의 것은, 능력껏 주워도 자기필요량을 구하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주어 그야말로 모두가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하여, 축적욕구가 낳는 물질적 억압감에서 해방시켜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imilian Weber, 1864~1920)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적한대로 마치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전형적인 비축사회인 자본주의사회를 낳았듯이, 그러한 노력이 ‘일용한 양식만을 지니는 비(非)축적 사회구조’를 깨트리지는 앓을까 하는 염려가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나눌 때 일용한 양식도 오히려 보다 풍요로워진다. 나눔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생활은 자연 정신적인 것에다 가치를 두게 하는 까닭에 삶의 질이 거룩할 만큼 높아질 것이다. 일용할 만나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게 되면 허례허식의 과다낭비와 탐욕스런 사치가 사라진다. 그러면 오히려 잉여분을 공동선의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할 여력이 생겨나고 그렇게 적요적급하게 이뤄지는 투자가 ‘어제의 부패한 만나’를 온전히 없애 주며 ‘있는 만나 모두’를 쓰게 할 것이다. 그런 정신적 풍요는 탐욕적인 향락이 아닌 진정한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런 자발적 가난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안겨주게 된다. 예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라고 단언하신 말씀 그대로다.

“내일은 어떡하지?”

사실 ‘내일 걱정’이야말로 인간의 악마성을 부채질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유혹자의 첫말은 늘 “내일은 어떡하지?”로 시작한다. 아담과 에와에 대한 유혹에서부터 광야의 예수에게도 마찬가지 질문이었다. ‘내일 걱정’은 인간에게서 행복을 빼앗는 악마의 수단이고, 그 ‘내일 걱정’ 때문에 인간은 무언가를 모으고 더 나아가 쌓아두려까지 한다.

비축문화의 상징인 바벨탑이 악의 상징인 까닭도 그러하다. 축적욕구가 인류문명사에 남긴 온갖 좋지 못한 것은 ‘만악(萬惡)’ 그 자체다. 불평등, 전쟁, 폭력, 살인, 착취, 억압, 증오, 파괴, 분열, 대립, 갈등, 침략, 광란, 심지어는 온갖 질병들까지 인류사의 모든 악행과 병폐의 근본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발적 가난의 구원성이다. 농경시대 이후 인류문화에 뿌리 깊게 박히게 된 축적욕구의 악성(惡性)에 대한 고발과 심판이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만일 그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참으로 그 복음을 인류가 그분을 통해 알지 못했더라면, 인류는 스스로 만든 축적욕구의 바벨탑에 깔려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분이 오심으로 해서 그 축적욕구의 악성(맘몬성)이 드러났고, 인류는 맘몬의 거짓됨을 깨달으며, 참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베들레헴에서 지극히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나신 그분의 ‘육화’와 참된 나눔의 길을 밝혀 드러내기 위해 당신 몸을 구원양식인 성체로 바치신 ‘육화의 육화’ 사이엔 그런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나처럼 스스로 가난해져라. 혹 그럴 순 없다면 나처럼 자신을 나누기라도 하여라. 거기 구원이 있다.” 나눔으로써만이 가난의 구원성 그 길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진복팔단의 첫머리처럼 하느님과 함께 하려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 축적이 없는 그곳에 복락원이 실현된다. 이 축적의 시대에 있어 구원의 길도 그처럼 오직 축적을 거부하는 나눔이 함께 하는 자발적이고 적정한 가난에 있는 것이다.

집을 떠나라, 집을 찾지 마라, 집을 갖지 마라

궁극적으로 구원으로 향하는 자에게 가장 큰 유혹은 언제나 집으로부터, 집을 향하여, 집에 대하여 온다. 집이란 무엇인가. 안주하려는 곳, 이제껏 이루어 놓은 걸 지키고 모아 두려는 곳, 나를 가두어 놓으려는 곳, 모든 것을 필요 이상으로 흰개미탑처럼 쌓아두려는 곳이다. 따라서 집을 떨쳐 버리지 못함은 소유에 대한 집착 때문이요, 집짓기를 원함은 그대 생명력이 이미 쇠진되었음을 뜻한다. 사실 경제적 축적과 집은 라틴어로 같은 어원을 지니고 있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여. 집을 떠나라, 집을 찾지 마라, 집을 갖지 마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나 붓다도 노자도 집이 없었다.

불길이 되라. 집이 가둘 수 없는, 그 어떤 집으로도 도대체 가둘 수 없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라. 그대를 가두려는 모든 집을 태워 버리는 기운 찬 불길이 되라. 그대의 영역, 삶과 생명의 터전을 제한하려는, 모든 것에 불길이 되라. 참된 삶의 노래는 결코 머물 수 없으니, 끝없이 나아가라.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인 반골(叛骨)은 집을 부수는 자, 집을 떠나는 자, 집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 억압의 죽음이 휘두르는 녹슨 칼에서 부활한 자이다.

정중규 (장애인운동가,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지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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