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친구와 둘이 우리도 공연문화를 향수해보자는 의기투합이 이루어져 오랜만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무료로 공연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풀피리스러운 공연 관람

풀피리 공연이었다. 풀피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신 남도의 남자 어르신과 제자들의 공연이었다. 호띠기, 호드기로도 불리는 풀잎과 나뭇잎을 소재로 만든 풀피리로 민요곡들을 연주하는데, 단조롭지만 음악의 원형을 감상하는 기분이 들어 흥미로웠다. 직접 사회를 보시면서 공연하시는 연주자 분은 두루마기로 단장하시고 남도의 사투리가 배인 음성으로 “이런 자리에 올라서니 생광시럽구먼요.”, “인정스럽게 들어주시면 감사허것씁니다요”하더니 말없이 무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와서는 “물 좀 마시고 왔습니다요.” 등등 무대매너가 풀피리스러웠다.

2008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풀피리를 다시 들으며 나는 오래 전 소를 이끌고 강둑을 거닐며 듣던 호뜨기 소리를 듣는 기분에 감싸였다. 풀피리 소리에 섞여 엄마가 쓰던 어휘들을 풀피리 공연자를 통해 다시 들으며 오래전에 멸종된 생물로만 여겨졌던 사투리 혹은 고어(古語)들이 밤하늘에 별이 돋듯 생광스럽게 찾아듬을 확인했다.

떠나가려는 청춘 어느 한 때

공연이 끝나고 경복궁 옆 프랑스문화원 옆을 지나다, 이 건물이 오래 전에 이미 다른 나라의 영사관으로 바뀌었음을 보며 우리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건물은 젊은 시절의 꿈과 희망을 담고 있었기에 어디론가 자리를 옮긴 프랑스문화원은 우리들의 청춘이 떠나가버린 것을 은유하였다.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 문학이 던지는 매혹적인 금맥을 찾기 위해 우리는 불어사전을 뒤적였고 이해하지 못하는 프랑스영화를 보고 또 봤다. 그런데 이제 프랑스 문화원은 어디론가 거처를 옮겼고 우리들은 불어단어들을 다 잊어버렸다. ...그 시절 빈 강의실에서 동사변화를 외우느라 보내던 시간들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겨 놓았는지 혹은 어느 순간 불현듯 우리들 삶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런지... 궁금했다.

80년대, 프랑스 문화원은 프랑스 문화를 전해주는 아지트였다. 언뜻 프랑스 문화의 정수는 사라지고 와인이나 마시며 불어를 말하는 것 같은 허무함이 스치기도 했지만 프랑스 영화를 보며 그들의 독특하고 대담한 시선에 놀라곤 했다.

<레옹 모랭 파뜨(?)>였던가 제목도 흐릿해진 어느 교구 사제를 주인공으로 만든 영화에서 젊은 사제의 사랑과 갈등이 흑백 화면 속에서 아름다웠다. <암흑가의 두 사람> 같은 대중적인 작품들은 어쩌다 만날 뿐, 주로 예술영화들이라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불어 대사를 영어로 자막 처리하여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다르게 말하곤 했다.

프랑스 영화의 페이소스

어른들은 프랑스 영화의 페이소스(pathos-관객이나 독자들에게 동정심이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의 요소)를 자주 말씀하셨지만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어느 날 에디뜨 피아프의 노래를 좋아하던 절도범과 형사의 추격전을 담은 작품을 보며 페이소스가 무언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도범 하나가 파리경시청을 홀딱 뒤집어 놓으며 태연자약 범행을 되풀이했다. 유명 정치인 집과 보석상들이 털려나가자 경시청에 전담팀이 구성되었고 날밤을 세우며 형사들이 뛰었지만 헛수고였다. 워낙 민첩해서 바로 눈앞에서 놓치기를 거듭했다. 또 다시 대형사고가 터져 전담팀의 반장은 이번에만은 놈을 사로잡으리라 다짐하며 치밀한 정보망을 펼쳐 그가 프랑스 어느 지방 도시로 가고 있다는 걸 알아내고 즉각 팀을 가동시켜 추격전을 벌인다.

한적한 국도변에 자리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형사들과 범인은 떨어진 자리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눈앞에서 범인이 밥을 먹고 있었지만 섣불리 체포하지 못한다. 그가 어떤 흉기 및 폭발물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여러 번 거의 다 잡은 상황에서 놓친 경험 때문에 형사들은 레스토랑의 설계를 머리에 그리며 범인이 도망칠 가능성을 두고 방어막을 짜느라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도 목울대가 쿨렁거렸다.
에디뜨 삐아프의 장밋빛 인생

이때 긴장에 지친 여형사가 한편에 놓인 피아노로 다가가 에디뜨 삐아프의 <장미빛 인생>을 연주한다. 그러고 보니 햇살이 넘쳐 들어오는 작은 레스토랑 주위는 여름꽃들이 피어있었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곳이었다. 프랑시스 잠이 노래하던 전원의 풍경의 소박한 음식점 안에서 피아노 연주곡 <장미빛 인생>이 흘러나온다. 외관상으론 행복한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풍경이었다.


잠시 후, 치밀하고 냉혹해서 빈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절도범의 입이 움직이며 허밍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절도범의 긴장이 풀려가자 형사들은 절호의 기회를 맞아 긴장으로 뻣뻣해졌던 것 같다. 음악이 끝나자 남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피아노로 다가가, "마드모아젤, 에디뜨 삐아프를 좋아하세요?"하고 물었다.

남자의 파란 눈을 바라보던 여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도 삐아프를 좋아한다며 앵콜을 청했다. 피아노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장미빛 인생>을 연주하고 테이블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형사들은 하나는 화장실로 향하고 하나는 계산을 하는 것처럼 카운터로 가다 절도범을 덮쳤다.

에띠뜨 삐아프는 우리나라에서 가수 이미자가 갖는 이미지보다 더 서민적인 샹송가수이다. 그녀의 평전을 보면 고아나 다름없는 출신이었다. 게다가 맹인으로 태어나 어느 성녀의 축일날 기도로 눈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귀품이나 내숭이라곤 약에 쓸래도 찾을 수 없던(?) 삐아프만은 절도범으로 인생을 메꿔가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이해해주리라 여긴 듯 영화 속 남자는 잠시 도망자 처지를 망각하고 삐아프의 노래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자승자박,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한계 안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삶을 프랑스 영화는 ‘페이소스‘라는 표현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영화작가들의 표현법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크게 한몫 한듯하다. 지나치게 나약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지만.
소멸과 불멸의 심연 사이

풀피리 소리를 들으며 잃어버린 시간-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시간들을 떠올리며 알싸한 슬픔을 맛보았다. 강둑의 풀을 먹이느라 소를 데리고 거닐며 버들가지 혹은 보리줄기로 만든 호뜨기 소리와 소방울 소리를 많이도 들었다. 그 원시적 음악을 들으며 저녁 어스름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시간들... 그 길 위에서 어미소는 송아지가 눈에 안보이면 산야가 울리도록 크게 ‘움메’ 하고 불렀다. 그러면 어디선가 송아지가 ‘음매’ 하며 뛰어오던 풍경이 선하다. 바람 속을 향해 소리쳐 불러본다, 움메!! 소멸과 불멸 사이의 심연을 메꿔줄 누군가를 부르듯.

비오는 날, 주유소 옆을 지나노라면 물 위로 기름방울이 섞이며 프리즘에 비친 햇볕처럼 무지개빛 색채를 토해놓은 걸 보게 된다. 지질학적 시간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지금 우리가 원유로 퍼올리는 것들은 생물체들이었다. 생물체들이 흙속에 묻혀 오랜 시간 화학적인 변화를 거듭하다 원유로 형질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기에 이 생물체들이 그들의 양식인 태양에너지를 저장한 것이 빗물에 풀리며 무지개빛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거슬러 올라가 하느님이 숨결이 우리에게 내장되어 있다면, 그리고 지난 시절 마음을 다해 뭔가를 이루고자 했다면 그러한 에너지들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리라는 계시를 빗물에 퍼지는 기름을 보며 느꼈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빛나는 통찰력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꼽추를 양아들로 입양한 노트르담 성당의 주교는 밤마다 종탑의 어두운 방에서 제도용 콤파스를 가지고 벽에 라틴어 스펠링으로 ‘숙명’을 새겼다. ‘인간’의 문제에 가차없이 정면 응시하는 불문학의 매력이 발산하는 이런 힘은 한편 지독한 어둠으로 다가오지만 그 어둠 속에는 통찰력의 별들이 어김없이 빛나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 속으로 사라져간 열정과 애태움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열어가는 과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소방울 혹은 풀피리 소리 같은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두운 소멸을 건너 불멸의 별밭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이규원 2008-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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