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에 대한 단상

죽음처럼, 풍경들은 우리를 포함하기 위해 우리를 매혹한다.

▲ 은밀한 생/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문학과지성사/2001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하루만에 읽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철학적 단상… 가볍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대단한 흡입력을 가진 매혹의 텍스트였다. 파스칼이나 루소의 철학적 에세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소설 같기도 한, 딱히 뭐라 분류할 수 없는 제멋대로의 책이지만 말이다.

키냐르는 작가이기 이전에 지독한 탐독가였다. “나는 원래 한 명의 독자이다. 내게는 평생의 열정인 독서가 마법의 양탄자여서 나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매일 글을 쓰지는 않지만 매일 책을 읽는다. 어떤 것도 내게 독서를 포기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그에게 ‘독서하다’는 ‘사랑하다’와 ‘음악을 하다’와 동일어라고 한다. 독서든 사랑이든 음악이든 ‘빠짐’을 전제로 한다. 빠짐은 대상과의 일체를 지향한다. 너와 하나가 되겠다는 에로스적 충동! 그 끝은, 이라는 질문에 프로이트는 스타카토로 답할 것이다. 죽음! <은밀한 생>은 시종일관 사랑으로써 죽음을 말하는 책이다.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먼 과거로 간다. 태초의 어미에게로 

치아를 활짝 드러내는 미소, 여유 있는 포옹과 입맞춤, 사랑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라는 유행가 속에서 사랑은 무엇보다 잔인하고 쓰디쓴 경험이다. 그것은 환희의 경험이라기보다는 비탄의 경험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베르테르와 롯테, 트리스탄과 이졸데… 수많은 사랑의 텍스트를 끌고 가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비탄이다. 파국으로 가는 비탄. 완전성은 추상의 영역에서 논할 성질의 것이지 현실의 영역에서 논할 바는 못 된다.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사랑은 끝내 지고야마는 게임. 사랑이 뜨거운 것이라면 그 패배하리라는 줄기찬 예감 때문은 아니겠는가.

모든 연어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연어의 출생이 이미 모천(母川)에서의 죽음을 배태하고 있었던 셈. 탄생 이전의 따스하고 축축한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은 열락을 찾아가는 에로스의 길이요, 동시에 둥근 무덤을 찾아가는 타나토스의 길이다. 그래서 모든 교미는 조금씩 슬픔을 닮아 있다.

어머니의 강으로 헤엄쳐 돌아가는 길, 분리 이전으로 귀환하는 길, 더 이상 이별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 아득한 길, 아스라한 길,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며 생의 모든 얼룩과 회오(悔悟)를 쏟아버리는 길, 침묵의 대우주 속에서 경계가 지워지며 비로소 어둠과 하나가 되는 길, 서서히 잦아드는 열락 뒤에 가지런한 호흡이 오고 그 호흡마저 새벽별처럼 사위어 가는 길, 너의 이름마저 아니 나의 이름마저 희미해지는 길…

키냐르는 소설의 <은밀한 생>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모든 강물은 끊임없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간다. 나의 삶은 침묵으로 흘러든다. 연기가 하늘로 빨려들 듯 모든 나이는 과거로 흡수된다."

기억할 수 없는 땅, 기억 너머의 땅, 그 어머니의 바다로 귀환하는 일,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먼 과거로 간다. 태초의 어미에게로. 

사랑이란 타자 속으로 나를 옮겨놓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자들이다. 매혹은 바라봄을 전제한다. 한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아득한 육식의 기억이 무의식 속에 작동된다. 키냐르는 끊임없이 기원을 찾아간다. 키냐르가 어원학과 심리학을 빈번하게 동원하는 이유도 기원을 찾겠다는 그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대체 기원을 찾아서 무엇에 쓰려는가,라고 묻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내 안에는 내 의지로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무수한 조상들의 기억이 침전된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침전된 기억의 영역, 그 세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나는 이미 그 세계에 묶여 있다. 내가 누군가를 매혹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탐스런 피식자를 바라보는 한 육식동물의 체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내 기억과 무의식은 온전한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미 무수한 조상과 공유되어 있는 것이다. 키냐르는 말한다.

"우리는 또한 연어들과도 같다. 우리의 삶은 그것을 태어나게 한 행위에 매혹된다. 삶의 근원에 홀린다. 여명에 홀린다."

그렇다. "우리의 조상은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말을 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스며든 언어는 선택이 아니다. 우리의 국적은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오줌누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밤의 이미지들의 주인이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은 우리 모두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성보다 열 배나 더 지배력, 본래의 의존관계, 과거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내 속에 있는 욕망, 내 속에 있는 사랑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태어났던 것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어느 정도에 이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함께 사라지는 욕망하는 인간이 그러하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 또한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 속에서 사랑은 태어난다. "매혹된 자는 하나의 시선이다. 자신을 고정시키는 시선을 맞바로 쳐다보는 나머지, 바라보는 자가 보여지는 자 안으로 시선을 통해 옮아간다." 한 사람을 매혹된 시선으로 바라 볼 때, 그 시선은 꿈꾼다. 나는 네 안으로 가고 싶어. 네 안으로 사라지고 싶어. 침묵이 욕망을 감싸고 움직임을 유예시킨다.

연인은 욕망과 침묵에 꼼짝없이 붙들린 존재다. 진정한 연인은 소유하려는 자가 아니다. 주체성을 포기하고 타자 속으로 나를 옮겨놓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소유의 욕망이 아니라 망각의 욕망, 소멸에의 희구다. 내가 내 어머니의 몸에서 왔으니 이제 그 몸으로 돌아가겠다는 회귀의 꿈이다.

우리 모두가 아이였을 때, "우리들의 어머니의 두 눈은 최초의 얼굴"이었다. 그 두 눈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별빛을 우리는 밤하늘에서 본다. 별, 우리를 추방했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반짝임의 나라, 글썽임의 나라.

공모는 사랑보다 더 신비스러운 말이다

연인들은 은밀한 기호를 교환한다. 그들만의 상징과 은유를 만들어낸다. 일체의 사회적 교환장치로부터 그들은 벗어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벗어난 자들이다.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서도 둘만의 은밀한 기쁨의 의미를 읽어낸다. 아무리 주의 깊게 바라보아도 타인들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호들을 해독할 수 없다. 둘만의 은밀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사랑의 기쁨은 증폭된다.

그들에게 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의미가 없다. 키냐르는 이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 카츄사에 빠진 네프 백작, 춘향이에게 빠진 이몽룡을 상기해보자. 사랑은 모든 다른 가치들을 폐기시키고, 한 시절을 신성화시키고, 심지어는 한 개인 개인의 국적과 계급마저 박탈한다.

사랑은 무엇보다 반사회적인 것이다. "연인들은, 이 세상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가족이다 사회의 연대성을 그 공동체 뒤로 멀리 내던져버린 채, 밤이면 꿈속에서 보는 환각에 사로잡힌 장면을 잠과 이미지를 빼앗긴 밤에 불면의 밤에 빛 속에서 행하는 포옹이라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대체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만의 공간이다. 모든 사회적 중재가 그들에게 무시된다. 안중에도 없다. 그들은 눈먼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 사회가 처벌하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이 세계에 고하는 하직 인사"라지만 그러나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추방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여기’고, 이곳에서의 법령이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한다. 그러므로 연인들은 감춘다. "감출 줄 모르는 자는 사랑할 줄 모른다."

그들은 공모자들이다. "공모는 사랑보다 더 신비스러운 말이다." 둘이서 어떤 은밀한 범죄에 가담한다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는 죽음의 형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위험에 몸을 맡긴다는 것, 그 두려움이 둘의 포옹을 더욱 굳세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정은 공포에의 저항이다. 

사랑이란 타인의 냄새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것이다

냄새가 기억을 이끌어내는 심리작용을 일컬어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에 이끌려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냄새와, 냄새의 기억은 있어도, 냄새에 얽힌 기억의 시간은 지금 여기에 없다. 냄새는 지금 여기에 없는 부재를 강력하게 환기시켜준다.

"사랑이란 무엇보다 타인의 냄새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키냐르가 말할 때, 냄새는 곧 부재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 엄마가 벗어둔 옷에 엄마의 냄새는 있지만 정작 그 냄새의 실체인 엄마는 없을 때 엄마의 냄새는 엄마에 대한 강력한 그리움의 증거물이 된다. 모든 냄새는 부재의 증거다. 왜 냄새는 있는데 너는 없는가, 부재가 존재를 달뜨게 한다. 그러므로 "향기는 보이지 않는 것의 유혹이다."

내 속으로 너를 온통 침투시키고 말겠다는 무의식의 표현일까, 사랑에 빠진 자는 흠뻑 공기를 빨아들인다. 그의 몸 주위를 떠돌던 공기들, 그의 몸 속을 빠져나온 공기들이 ‘내’ 속으로 들어온다. 한 존재를 비로소 온전히 가졌다는 착각의 나르시시즘이 그를 지배한다. 그러나 후각처럼 쉽게 피로해지는 감각이 또 있을까. 모든 냄새는 찰나적이다. 한 사람을 소유했다는 우리의 의식이 그렇듯 그것은 흐리멍덩하다.

후각은 시각처럼 분명한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흐리멍덩한 감각, 명철하지 않은 감각이다 그러나 모든 냄새에는 발원지가 있게 마련이다. 모든 냄새는 그 발원지를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냄새가 있다는 것은 냄새를 피우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냄새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너는 어딘가 반드시 존재한다, 라는 등식은 이렇게 성립하지만 오늘날의 향수 산업은 이런 등식을 간단하게 비웃는다. 도처에 너의 냄새는 있는데 너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는 현대의 비극!! 모든 향수 산업은 체취의 유일무이한 개체성을 무화시킨다. 

죽은 자들과 더불어 사고하는 기쁨이다

"모든 독서는 출애급이다."라는 키냐르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독서는 끊임없이 ‘이곳’을 벗어나는 행위다. 지금 이곳에 만족하는 자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어떤 결핍이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결핍이 없으면 독서도 없다. 키냐르는 "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라고 고백한다.

지금 이곳이 충분하다면 왜 다른 세상과의 접속을 꿈꾸겠는가. 독서는 "사회의 그리고 시간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기. 이 세계의 모퉁이에서 살아가기"다. 그것은 "자신 밖으로 떨어져 나가기"이다. "결코 자신의 밖으로 떨어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다."라고 키냐르는 말한다. 사랑은 나를 벗어나 너로 귀환하겠다는 망아와 몰아의 체험이다. 독서 역시 나를 벗어나는 망아의 체험이다.

"독서하다. 사고하다. 독서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사고와의 만남이라는 경험에서 오는데, 거기에는 일체의 경쟁관계나 정신의 기능을 종속시킬 일체의 의도가 배제되어 있다. 타인이 파악한 것을 함께 나눌 뿐이다. 독서는 죽은 자들과 더불어 사고하는 기쁨이다."

독서는 또한 배반과 금기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이다. "독서와 사랑은 지식을 뒤집는 인식이고, 끌어당기고 생각해야 할 것에 불복하는 일이며, 가족이나 집단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이다." 탐미적인 독서가들은 책을 통해 배반의 힘을 키운다.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비밀결사를 구성한다.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연령의 구분 없이 섞이지 않음이, 결코 서로 만나는 일 없이도 그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그들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오히려 틈새와 주름들 안에, 즉 고독, 망각들, 시간의 경계, 열정적인 생활태도, 응달지역, 사슴의 뿔, 상아페이퍼 나이프들 안에 칩거하고자 한다. … 그 선택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속하는, 짧지만 수많은 삶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한다. 그 선택이 도서관 구석에서 촛불을 밝혀놓고 말없이 서로를 읽어가는 반면, 전사계급은 전장에서 요란법석을 떨며 서로를 죽이고, 상인계급은, 장이 선 마을광장이나 이 광장을 대체한 장방형의 매혹적인 회색빛 화면 위로 비추는 빛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서로를 물어뜯는다."

독서는 고독의 시간을 요구한다. 독서는 집단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사적인 체험이다.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삶은 사적일 경우에만 생동감으로 넘치고, 나체는 이미지가 부재할 때만 나타나고, 여명이나 황혼에서 반복되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자기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선에 대한 기억마저도 벗어난, 매순간에 동의하는 욕망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모국어들, 구어들, 인간 상호간의 언어들을 다소간 등지지 않은 사생활이란 없다."라고 말할 때 ‘삶’을 ‘독서’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한다. 나는 몽테뉴, 루소, 바타유가 시도했던 것에 완전히 감탄했다. 그들은 사유, 삶, 허구, 지식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몸인 듯 뒤섞었다. 한 손의 다섯 손가락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었다." 기존의 장르에 포섭되지 않겠다는 것, 나만의 유일성을 훼손시키지 않겠다는 욕망이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이른바 '키냐르식 담론'들. 그것은 어떤 장르이론으로도 분류되지 않는다. 내적인 요구와 부름에 키냐르식 담론은 충실하다. 어떤 사회적 요구에도 불응한다. 그는 말한다. "음악과 사랑 간에는 차이가 없다: 진실한 감동을 듣게 되면 완전히 길을 잃게 된다." 그것은 길을 잃은 자의 장르다. 

감추면서 비밀을 드러내기

"키르케가 말한다: 자신의 나체를 맡기는 것(배설 구멍 드러내기, 생식 구멍 드러내기, 성기와 생식기관들을 드러내기), 밤중에 잠든 육체를 고백하는 것, 자신의 이름을 실토하고 비밀을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사랑의 내 가지 표지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진정으로 서로 말을 나누려면 침대로 들어가서,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서로의 몸 위에 올라타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체로 몸을 내맡기지 않는 여자에게 남자는 속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나체로 몸을 내맡기지 않는 남자에게 여자는 속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키냐르는 경고한다.

사랑, 모든 이들에게 감추면서 오직 한 사람에게 자신의 온몸을 던져 송두리째 말하기.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는 자는 결국 자신으로부터의 떠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에게 결별을 고하는 경탄이다."라고 말할 때의 키냐르의 행복은 즐겁지만은 않다. 결별을 예감하는 자의 행복, 행복은 이런 불안 속에 둥지를 튼다. 

불가해성이 사랑이다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이 풍경보다 먼저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 어떤 관념이 풍경보다 먼저 우리 안에 침투해서 하나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하는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이를 아름답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떤 미학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대체 내 안의 어떤 것을 촉발시키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봐도 우리의 의식은 속수무책이다. 찧고 까불어 봐야 의식이 담당할 수 있는 몫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 그 불가해성이 사랑이다. 키냐르는 말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과거를 응시한다." 그렇다면 연인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과거를 응시하는 것일까. 젊은 어머니의 싱그러운 피부, 어미의 젖을 빨던 어린 포유류의 감각,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 안에 빛나는 별빛… 그 기억으로부터 어떤 이도 자유로울 수 없다면 매혹은 우리의 운명이다. 사랑은 피할 수 없다.

말 안듣는 사지.
나른해진 몸뚱어리.
굳어진 혀.
수척한 모습.
눈물.
비밀.
홀로 타오르는 육체의 정염.
이러한 것들이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결과는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고통을 진정시키고
죽음을 떼어놓고
사랑과 관련되지 않는 관계들을 해체하고
낮을 증가시키고
밤을 단축시키며
영혼을 대담하게 만들고
태양을 빛나게 한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